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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선택 (룻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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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택 (룻 1:1~5)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거기 거한지 십년 즈음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룻기에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저 한다. 물론 절기 때나 특별한 예배 때에는 다른 말씀을 보겠지만 한동안 룻기를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려 한다. 그 이유는 오늘 날 어려운 환경에 있는 우리들에게 적합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선 룻기의 전체적인 파노라마를 보기 원한다. 

1. 룻기는 한 평범한 가정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다가올 수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브라함은 우리의 믿음의 조상으로서, 롤 모델이 되기는 하지만 우리와는 거리가 있는 영적인 거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다윗은 어떠한가? 그는 유다의 왕이었고 그런 면에서 우리와는 왠지 거리가 느껴지는 믿음의 선진이다. 12 사도들도 그렇고 대부분의 성경인물들은 거리가 느껴지는 영적 거인들이었다. 그런데 나오미의 가정은 아주 평범한 가정이었기 때문에 우리와 연결성이 쉬운 것 같다. 그들의 평범한 삶이 우리의 삶과 유사하기 때문에 쉽게 다가오는 내용이 될 수 있다. 

2. 또한 전체적인 룻기의 내용은 매우 어려울 때에 일어난 이야기이다. 

우리의 현실이 매우 어려운 때인 것을 감안하며 환경적으로도 유사성이 있다. 그렇게 어려운 때에 하나님께서 평범한 가정을 위해서 어떻게 역사하셨는 지를 볼 수 있다. 룻기의 앞부분을 보면 영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 임을 알 수 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이 중심되지 않는 시대였다. 그리고 그 땅에는 흉년이 들었다. 농업 시대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이고 어려움이 극심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상황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볼 수 있다.

3. 가정의 중요성이 highlight 되는 말씀이다. 

어려움 속에서 우리가 반드시 잡아야 할 것은 바로 가정이다. 나오미는 두 아들을 모두 잃고 두 자부와 함께 본향을 향하고 있었다. 아들이 없는 한 노인의 삶은 거지 생활과 같은 어려움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라며 배려 하고 있다. 그러나 롯은 시어머니께 충성을 다하고 있다. 16절을 보자.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그녀는 시어머니를 향하여 충성과 효성을 약속하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 보아스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근속이며 친족인 롯에게 모든 것을 희생하며 가정을 회복하게 된다. 희생을 약속하는 가운데 가정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내용 때문에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하다.

4. 하나님의 부흥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흥은 영어로 ‘revival’이다. 즉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이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다시 생명을 얻는 것이고, 꺼진 불이 다시 피어오는 것이며, 죽어가는 생명들이 새 생명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부흥이다. 하나님은 완전히 죽어가는 한 가정을 revival 시키신다. 그들은 다윗의 조상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씨를 보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부흥의 말씀이 된다. 나도 요사이 하나님의 부흥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기다릴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부흥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경제, 정치, 자원, 혹은 탁월한 leader를 통해서 우리가 뭔가를 기다릴 수 있는가? 아니다. 부흥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주시는 것이다. 지금은 오직 주님 만이 우리를 살리실 수 있고 우리는 오직 그 분을 통해서만 부흥을 체험할 수 있는 때이다. 부흥은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주실 부흥을 기다릴 수 있다. 이상이 룻기의 전제적인 survey 내용이다.

오늘은 특별히 1:1-5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믿음의 선택’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한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선택을 해야 할 때이다. 동물은 자신의 정욕대로 살아가지만 우리 인간들은 지, 정, 의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들을 가지고 늘 선택하며 살아간다. 우리에게는 가장 고귀하고 가장 유익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dignity가 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선택을 잘 해야 한다. 더우기 하나님의 백성들은 믿음의 선택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 인생관으로만 선택할 수 없다. 믿는 성도들은 그것들 위에 믿음을 가지고 선택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믿음의 양심을 가지고 선택해야만 한다. 요사이 우리들은 참으로 선택(Decision Process)할 것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의 미래에 대한 선택이므로 이것은 어려운 선택이 될 수 있다. 하나님 말씀으로 상황에 도전하고 믿음으로 선택해야 한다. 늘 믿음을 갖고 정의로운 선택을 해야 하고 편리보다는 평안과 평화를 위한 선택을 해야 한다. 

본문의 엘리멜렉은 믿음의 선택을 하지 못했다. 1절을 다시 보자.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그는 모압 땅으로 이주하기를 선택하였다. 이것은 매우 실용적이고 make sense적인 선택이었지만 결코 믿음의 선택은 아니었다. 물론 이 내용으로 이민이 잘못된 선택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우리는 성경을 말씀의 context로 해석해야 한다. 성경은 성경을 통해서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셨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는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주로 땅을 통해서 역사하셨다. 그렇지만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들과 민족들과 방언들이 주께 무릎을 꿇게 되었다. 아브라함는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가다가 실족하였다. 그는 애굽에 도착하지만 그곳에서 아내를 잃을 뻔 하였다.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큰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명백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허락하시고 그곳의 이방인들을 몰아내시어 그들이 백성들과 함께 하지 못하게 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을 통한 메시아의 씨를 잘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엘리멜렉이 모압 땅으로 이주한 것은 매우 실용적이고 관습적이며 세상의 상식적인 선택이었지만 결코 믿음의 선택이 아니었다. 믿음 없이 한 선택의 결과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실제로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했다. 

모압의 땅에서 그 자신도 죽고 두 아들도 죽게 된다. 21절을 보자.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그들이 떠날 때에는 그런 대로 유복한 퐁복한 상태였던 것 같다. 그러나 돌아올 때에는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것을 엘리멜렉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여기 있는 우리들은 살아남을 자가 하나도 없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다. 불순종할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신다면 우리는 다 죽을 것이다. 하나님은 회복과 부흥을 주시는 분이시다. 아무튼 그들은 남자들을 모두 잃고 지금 돌아오고 있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 결정할 수 없고, 세상 상식으로 결정할 수 없다. 물론 세상 상식을 가지고 선택하여 성공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단지 chance일 뿐이고 보장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세상의 자본주의 물결과 함께 간다면 궁극적으로 우리는 터진 bubble로 인해서 실패할 것이다.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것은 믿음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축복을 보장하신다. 잠언 3:5-6을 보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라고 말씀하신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이것을 찾기 원하신다. 엘리멜렉은 이렇게 하지 못했고 믿음의 선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에게 아무 것도 보장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모압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2)또한 후손들의 믿음을 희석시키고 말았다.
 
그의 두 아들은 모압 땅에서 그곳 여성과 결혼을 하였다. 하나님은 신명기를 통해서 당신의 백성에게 이방인의 여인을 취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두 아들은 아버지가 아무런 믿음 없이 결정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엘리멜렉이란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의 이름대로 살지 못했다. 한 가장의 믿음 없는 선택은 그의 자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래서 가정의 leader들의 선택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에 의지하여 선택할 것인가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 엘리멜렉의 선택 뒤에는 하나님의 축복과 보장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 앞에서 선택할 것을 여러분들에게 도전하고 싶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한 두 가지의 원칙이 있다.

(1)내일에 대한 염려 때문에 오늘의 축복을 miss하지 말라.

그의 실수는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염려 때문에 그릇된 선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염려는 모든 의사결정을 망치게 한다. 절제를 못함과 염려의 압박감으로 인해서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염려가 우리를 파괴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산상수훈을 통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마 6:25을 보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우리는 우리의 염려로 키 한 자라도 자라게 할 수 없다. 도리어 내가 가지고 있는 축복을 보지 못하여 그 축복 마저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우리에게는 Heavenly Father가 있다. 그 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 그 분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킬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 하나님은 화내는 아버지가 아니며 도망가는 아버지도 아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염려에 압도되지 말라. 또한 우리에게는 faith 가 있다. 믿음은 우리가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만든 것이라면 강할 수도 있고 약할 수도 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다. 엡 2:8을 보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은 우리가 약할 때에 도리어 강하게 하시고 강하다고 여길 때에 겸손하게 낮추신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Father와 faith가 있으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오직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온갖 염려로 인해서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축복을 miss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과 시각을 바꾸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보게 된다. 우리가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Father, faith, 기도, 공동체, 믿음, 소망, 사랑… 이 모든 것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가 풍요로울 때에 놓쳤던 것들을 다시 붙잡을 수 있어야 하겠다. 엘리멜렉은 이것을 보지 못했다. 아직 건강이 있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는 분들과 가족이 있으며, 예배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음을 감사하다. 우리는 아직도 휠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 이것들을 miss하지 말자. 내게 없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이미 가지고 있는 수많은 것들에 감사하고 집중하여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2)긴 안목을 가지고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줄 믿음의 유산을 늘 염두에 두라.

엘리멜렉의 선택이 그의 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그는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롯은 비옥한 땅, 소돔을 보았다. 지금 당장의 안목으로 가정을 데리고 부패한 도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부패한 그곳의 문화가 그 가족에게 스며들게 하였다. 얼마나 부패했던가? 그의 아내는 그곳을 빠져나오다가 그곳을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되었고, 두 딸은 그들의 자손을 이어가기 위해서 아버지와 동침을 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해서 생긴 민족이 바로 모압과 암몬이다. 가문의 믿음을 생각하지 않고 당장의 안목으로 가족을 죽게 만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결정으로 우리 자손들에게 무엇을 남기는 지를 생각해야 한다. 시편 78:5-7을 보자.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열조에게 명하사 저희 자손에게 알게 하라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후대 곧 후생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 자손에게 일러서 저희로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 계명을 지켜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자손들을 통해서 더욱 빛나고 더욱 능가하는 믿음으로 자라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자손이 당신을 계속 예배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미국 근대 역사는 청교도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과 후손들을 위해서 대서양을 건넜다. 이것은 신앙이 근거된 선택이었다. 그들에게는 거룩한 소망과 기대가 있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을 이곳에 세워보려는 그들의 선택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미국의 근대 역사를 시작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후손들을 위한 담대한 기도와 선택을 해야 한다. 

나무를 좋아하는 미국사람들에게는 좋은 격언이 있다. ‘The best time to plant a tree was 20 years ago, but the second best time to plant a tree is today. (한 그루 나무를 심기 위한 가장 좋은 시간은 20년 전이었지만 두 번째 좋은 시간은 바로 오늘이다.)’ 우리는 나무가 없다고 불평하지 말고 바로 오늘 한 그루의 나무를 심어야 한다. 우리의 2세들이 걱정되고, 그 걱정 때문에 주저 앉아 있는가? 그들을 위해서 오늘 한 그루 나무를 심자. 당장은 힘들어도 20년, 40년 뒤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며, 그리고 자식들의 믿음을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우리에게는 긴 안목이 필요하다. 오늘이 우리 자손들을 위해서 믿음의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절호의 chance이다.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impact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선생님들과 부모님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부모가 어떻게 결정을 하는 지를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위기를 어떻게 이기며 어두운 밤에 어떤 찬양을 부르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지금은 분명한 부흥의 기회이다. 사람은 선택하며 살아가게 되어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그러므로 믿음의 선택을 하라.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허락된 축복을 miss하지 말자. 후손들에게  무엇을 전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기도하며 선택하는 귀한 주님의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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