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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듭남 (요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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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 (요 3:1~5)
 

이번 주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軌跡을 좇아가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주일, 유대인의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의 첫 사역, 유대교의 심장부인 ‘예루살렘 성전’ 정화사역을 보셨습니다. 지난주일 말씀과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입니다. 

본문은 유대종교(Judaism)의 기둥역할을 하고 있던 중요한 한 人物(要人)과의 개인적인 만남 속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主人公이 누구인지? 그의 행동이 무엇인지? 그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관심 가지고 보아야합니다. 

[밤에 예수님을 조용하게 찾아온 要人, 니고데모]

말씀 드리지는 않았지만 본문 바로 앞 요한복음 2, 23-25(2장 끝)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유월절 기간 내내 예루살렘에 머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종교의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일뿐만 아니라, 머무시는 동안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상상치도 못한 일들이 연일 벌어졌습니다. 유대당국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 생겼습니다. 유대교 말고 새로운 믿을 이, 믿음의 대상이 생겨난 것이지요. 놀라운 사건입니다(그러나 예수님은 표적 행하시는 것을 보고, 자기 이름을 믿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당국자 중에서, 일련의 예수님의 行步를 눈여겨보고 있던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전 정화사건이나, 표적 행하심을 보고 ‘대놓고, 저도 예수님을 믿습니다’고는 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고민하고 있던 인물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입니다(av,rcwn ; 산헤드린공회원). 이스라엘의 스승입니다(國師). 그 이름이 ‘니고데모’입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서, 유대종교의 지도자로서 감히 낮에 예수님을 찾아올 용기는 없었지만, 夜深한 밤 隱密하게 예수님께 찾아와서 자기 믿음을 고백하였던 사람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보면, 니고데모는 다른 유대종교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예수님께 대하여 호의적이었고, 예수님을 믿었던 인물입니다. 남다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호의적이었고,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만 보고, 그가 어떤 인물이라고 성급하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니고데모가 어떤 인물인지는, 좀 더 세밀한 검사가 필요합니다(의사선생님들 보면, 환자를 보고서, 금방 진단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검사를 한 후에, 최종적인 진단을 내립니다). 

겉으로 드러난 니고데모의 모습만 본다면야, 멀쩡합니다. 아픈 데 하나 없습니다. 이보다 身手가 어찌 더 좋을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께 대한 나름대로의 분명한 결론을 가지고 찾아온 人物입니다. 표적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께 대한 확신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그냥, 덮어놓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고백, 얼마나 대단합니까?).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며, 인정했습니다. 계보 없는 랍비시라고, 굳이 따지자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랍비)라고 인정했습니다. 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표적 행하시는 능력 많으신 분으로 고백합니다(역사적인 認識; 모세, 여호수아, 선지자). 니고데모는 보통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고데모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차적인 정밀진단), 표적 신앙의 한계]

얼마 전, 신학교 동기 목사님 한 분을 만난 적 있습니다. 그분의 목회철학은, 지금껏 계속해서 사도행전적인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선교적인 교회, 이적과 기사가 일어나는 교회). 그런데 그 분은, 요즘 목회사활이 걸만큼 많은 고민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을 그리 고민하십니까? 여쭈었더니, 사도행전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이적과 기사, 은사가, 왜 당신교회와 목회에서는 일어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생사를 걸고 금식기도라도 해야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장로님들도 그러신답니다. “목사님은, 지금껏 우리교회는 ‘사도행전적 교회를 이루는 교회’라고 하셨는데, 왜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사도행전적인 능력, 은사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하신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목사님과 교회가) 참으로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능력 행함, 표적, 기사가 일어나는 사도행전적인 교회를 꿈꾸십니까? 신령한 은사가 일어나는 교회되기를 소망하시는 분 계십니까? 동기 목사님 중 한 분이, 카자흐스탄 알마타에서 선교하고 계시는데, 그곳에서 소위 말해서 선교역사상 그 類例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대형교회를 이루었습니다(출석교인이, 5000명이). 소위 뜨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입만 열면 다들 놀랍다고 합니다. 그 불모지에서 말입니다. 이슬람권 국가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이는 이유 중 하나가, 기적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랍니다. 병자들이 낫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막 모여듭니다. 그 열악한 환경에서, 병이 낫고 이적기사가 일어나니까, 사람들이 막 몰려드는 것입니다. 소위, 예수 안 믿고 배기겠습니까? 그러나 그 교인들 중에, 과연 예수님이 인정하실만한 믿음의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간단한 문제 아닙니다.

이적과 기사가 나타나고, 능력 행함과 은사만을 추구하는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꾸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적인 교회의 한 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교회됨󰡕의 全部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표적신앙은 한계가 있습니다. 기적을 경험하고 예수 믿으셨습니까? 믿음의 통로가 되었으니, 얼마나 귀합니다. 예수님 사역을 유념해 보십시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면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표적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표적을 보고 자신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그의 몸을 의탁하지 아니하셨다 합니다. 이유는? 그들의 믿음의 진정성이 믿을만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심). 

심지어 누구의 믿음까지도 인정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밤에 조용하게 예수님께 찾아왔던 ‘니고데모’까지 말입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얼마나 위대한 고백이요, 믿음입니까? 

그렇지만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그 믿음조차도 믿어주지 아니하셨습니다. 돌이켜 말씀합니다. “眞實로 眞實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 3).

표적이 우리의 믿음에 주는 유익함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표적으로 인한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지는 못합니다. 표적신앙의 수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병 나아서 예수 믿으신 분 계십니까? 치유의 유익함이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고 치병으로 인한 믿음이 영원한 생명까지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직장생활이 평탄해서 감사하십니까? 富도 얻고, 事業도 잘 되고, 名譽도 얻어서, 예수 믿는 것이 그저 좋기만 하십니까? 그러나 그 믿음이 영생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니고데모 보십시오. 그도 사람들처럼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눈여겨보고는, “저 분이야 말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시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는 확신을 얻습니다. 급기야는 夜深한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니고데모의 믿음의 진정성을 믿어주지 않으십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속마음, 중심, 그의 믿음의 분량을 이미 다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恩賜恩賜 하지 마십시오. 恩賜를 주시는 하나님을 思慕하십시오. 방언방언 하지 마십시오. 방언의 은사가 필요할 때, 방언을 주시는 하나님을 사모하십시오. 병 고치는 능력 구하기보다, 병 고치는 능력도 주시는 그 하나님을 구하십시오. 빵 먹고 배부른 까닭에 또 예수님을 찾았던 수많은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나를 찾아다니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영생을 위하여, 나를 찾으라)”. 그러면서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生命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永遠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 35). 예수님이 福입니다.

[(예수님의 2차 진단)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눈여겨보고 찾아왔던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님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주신 대상이 누구이냐? 하는 것 때문입니다.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는, 그저 평범한 인물이 아닙니다. 유대교를 대표하는 자입니다. 지도자, 산헤드린 공회원입니다. 당대 최고로 존경받던 이스라엘의 선생입니다(國師,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 두 번째 매시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밤에 조용하게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태도는, ‘니고데모’라는 한 人物, 個人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절대 권력과 구원과 의의 기준이라고 자처하던 유대종교(Judaism)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국사인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무어라 하셨습니까? “사람이 거듭나지(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하셨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너 자신을 혁명하라」는 책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독교를 가지고는 하늘나라 못 간다”고 했습니다. 틀린 말 같지만 맞는 말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나 제도, 교리를 가지고 하늘나라 가는 것 아닙니다. 거듭남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이 말이 맞느냐? 묻고 싶으십니까?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님 말씀을 보시면 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로마천주교회(the Roman Catholic Church)는 오랫동안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를 주창해왔습니다(Cyprian의 말). 중요한 것은, 여기서 로마천주교회가 말하는 ‘교회’라는 말의 意味가 과연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로마천주교회가 말하는 ‘교회’라는 의미는, 쉽게 말씀드리면 敎皇(Pope)과 사제라는 직제가 있는 곳이 참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로마천주교회가 개혁교회(Reformed Church)는 참 교회가 아닐 뿐만 아니라, 개혁교회에는 “전혀”(omnino) 구원이 없다고 주장해 왔습니다(교황제도; 곧 사도권 계승이 없기 때문). 정말 억지 교리입니다(1442년 플로렌스 공의회, 자선을 베풀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피를 흘렸다 하더라도 카톨릭 교회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다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4)를 분수령으로 해서, 로마천주교회는 그 동안 적대시해 왔던 개혁교회에 대하여 ‘형제교회’라고 인정하면서, 로마천주교회만이 유일한 구원의 기관이라고 더 이상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改革敎會는, 하나님 나라 가는데 아무런 문제없는 교회일까요? 오늘의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 가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교회일까요? 괜찮은 교회일까요? 그 答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님 말씀 안에 있습니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너희 유대교(Judaism)로, 하나님 나라 어림도 없다. 너희 바리새인들, 하나님 나라 못 들어간다. 니고데모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냐? 어림없다. 나의 표적을 보고 너도 나를 믿는다고? 표적 신앙으론, 어림없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것이 예수님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종교를 거듭남의 대상으로 보셨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 거듭남의 대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國師인 니고데모, 거듭남의 대상이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 당연히 거듭남의 대상입니다(한국교회 이름으로 어림없습니다). 

예수님 말씀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稅吏들과 娼妓들이 너희보다(포도원에 가서 일하겠습니다 하고는, 일하지 않았던 맏아들—바리새인, 서기관, 유대종교 지도자)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逆說, 마 21, 31). 하나님 나라는 교리로 들어가는 나라 아닙니다. 律法主義的인 자기 義로 들어가는 나라 아닙니다. 교단과 교파, 무슨 교회이름(브랜드, 由緖 깊은 교회)으로 들어가는 나라 아닙니다. 제도나 조직, 교권, 직분으로 들어가는 나라 아닙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조계종 성철 宗正이 그러셨답니다. “오늘 불교의 절간들은 도둑놈들의 소굴이요, 중들은 목탁을 치며 부처를 팔아먹는 도둑놈들이다.”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로마천주교는 베드로와 마리아 숭배가 지나칩니다. 장로교인들은 칼빈을, 감리교인들은 웨슬레를, 교회는 목사목사 하는데 위험합니다. 칼빈이, 웨슬레가, 목사가, 베드로가 마리아가 우리의 구원자입니까? 죄인일뿐입니다(추기경, 죄인입니다). 여러분, 목사목사 하지 마십시오. 장로교회 장로교회 하지 마십시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거듭남으로 하나님 나라에 갑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할 자들임을 다시 한 번 고백하십시다. 아멘.

자비하신 하나님, 표적만 보고 예수 믿는 자 되지 않게 하옵소서. 세상의 부와 명예와 가치들을 얻을 수 있기에, 건강 회복할 수 있기에 예수 믿지 않게 하시고, 거듭남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하나님 백성, 자녀,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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