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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형통케 하심 (창 37: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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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통케 하심 (창 37:12~24)
 
 
어느 날 아들이 학교에 갈 시간인데도 이불 속에서 뒤척이면서 도무지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런 아들을 어머니는 계속해서 깨우려고 합니다.  마지못해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아들이 어머니에게 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나 학교 안 갈래요.  가기 싫어요."
"대체 왜 그래?  이유가 뭐야?"
"얘들이 나랑은 안 놀아주고 자꾸 왕따시킨단 말이에요."
그러자 어머니가 한숨을 푹 쉬며 타이르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가야지.  니가 선생인데 어떡하겠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교회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마음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세상 일들 때문에 지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떻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일진대 이 거룩한 주일 아침에 주님의 전에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옆 사람을 보시면서 축복의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잘 오셨습니다."

오늘 주님의 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먼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기독교가 세상의 일반 종교와 다른 것은 일반 종교에서는 끝없이 일평생을 배우라고 합니다.  배움이라는 것이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불교라든가 유교라든가 모든 종교가 다 끝없이 배우다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배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수준이 되면 내가 행했던 일을 너도 할 것이요, 나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 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만의 가진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태산같이 떡 버티고 있는 장애물들 앞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뒹굴기도 합니다.  때로는 파도처럼 몰려오는 수많은 인생의 시험 앞에서 슬퍼하고 애통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아직도 기회와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온함과 사랑이 여러분의 심령 깊은 곳에서 강같이 철철 넘쳐나기를 축복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무장하여 모든 시험도 시련도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일단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시험이나 시련은 일단은 이기고 봐야 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어느 수준이 되면, 어느 때가 되면 내가 행한 일을 할뿐만 아니라 나보다 더 큰 일도 할 날이 오리라!"  그래서 복음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우면서 아버지 어머니는 자식에게 늘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는 이 다음에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보다 더 좋은 아들이 되거라."  후계자가 없는 성공은 불행입니다.  우리말에 아버지는 강아지 같지만 아들은 호랑이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반대로 아버지는 호랑이 같았는데 아들은 강아지 같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가면 갈수록, "오늘보다 내일은 더 큰 일을 하리라!  내가 30대 보다는 40대에는 더 큰 일을 할 것이요, 40대 보다는 50대에는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나는 날이 가면 갈수록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이 한 말씀을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잠언 11장에 보면, 성읍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축복에 의해서 부흥되고, 도성은 악한 자의 입을 통해서 무너진다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우리는 악한 세력을 정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늘의 특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땅의 악한 세력을 정복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 밖에는 없습니다.  이 땅의 악한 권세를 물리 칠 수 있는 권세를 허락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무너지면 안됩니다.  하늘의 특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너지면 세상은 다 무너집니다.  거룩한 하늘의 영이 세상을 살리지 못하면 더럽고 악한 영들이 세상을 썩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 14:12)

저는 이 약속의 말씀을 믿을 때마다 용기가 나고 힘이 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믿는 여러분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이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늘의 능력이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늘의 권능이 여러분의 온 몸과 영혼을 사로잡아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점점 더 큰 일을 하게 하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늘 많은 것이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실패와 낙심과 고난 앞에 무너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모든 실패에도 건질 것이 있습니다.  모든 고난에서도 더 건질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의 여정은 자신을 찾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잘될 때 자기를 찾는 것보다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 자기를 찾는 것이 훨씬 더 바르게 찾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자기 사랑의 대상을 찾으러 나왔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나의 능력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는 우리들에게 제일 귀한 발견은 뭐니 뭐니 해도 하나님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인생에서 제일 아름다운 일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이 부족한 종을 붙들어 쓰시옵소서.  하나님, 모나고 거친 나를 고쳐 쓰시옵소서."

성경에 보면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 366번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왜 366번일까?  일년이 365일인데 말입니다.  매일 하나님께서 믿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음성은 "염려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365일에 366일까?  그것은 윤년, 윤달까지 넣으신 정확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옆에 계시는 분에게 축복하십시다.
"우리 염려하지 맙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염려하지 맙시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힘들다고 합니다.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고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통해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누가 억울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만큼 억울하겠습니까?  누가 답답하면 주님의 십자가만큼이나 답답하겠습니까?  누가 분하면 주님의 십자가만큼 분합니까?  사방의 우겨 쌈을 당했다 할지라도, 답답하고 핍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거꾸러뜨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주님보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넉넉히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이 노래가 우리들의 신앙고백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모든 것에 넉넉히 이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사모하셔야 됩니다.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일체의 해방감.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 권능에 생포되는 체험.  나의 삶에 뿌리를 뒤흔들어 놓는 영적 사건.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그 심령에 끊임없이 밀려오는 희열과 감격과 감동으로 인한 행복감, 이런 것들을 사모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하나님의 기적을 믿습니다.  목회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기적을 더욱 믿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 이 시대는 기적의 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믿음의 시대가 끝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 마지막 날에 이만한 믿음을 보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적이 없음을 안타까워하지 말고 우리의 믿음이 없음을 안타까워하셔야 합니다.
"주여! 나에게도 믿음을 주시옵소서!  산을 옮길만한 살아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심에는 그렇게 까다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오는 사람을 그렇게 까다로운 어떤 조건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향해 인간만큼 그렇게 까다롭게 고르지도 않습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50:15)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우리의 생애 중에서 가장 어려운 때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어려운데, "아직 불황은 시작되지도 않았다"라는 말이 들려옵니다.  인생에 거센 풍랑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풍랑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도 그랬고, 다윗도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도 거친 풍랑 가운데를 지나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풍랑 중에서도 '다시 시작하는 힘'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세상 속에서 보란 듯이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그의 아버지 야곱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입니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나이가 들어서 아이를 얻으면 새로운 의욕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야곱에게도 요셉의 탄생은 큰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원래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외삼촌의 가축을 돌보면서 살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계속 살아도 될 텐데, 어느 날 갑자기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겠다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처럼 새로운 도전과 의욕에 사로잡히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요셉의 탄생입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창세기 30장 25절 이하에 나옵니다.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그러니까 야곱은 그 동안 외삼촌 라반의 집에 처가살이하면서 현실에 안주하고 살았습니다.  그냥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20년의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태어나는 순간에 새로운 출발에 대한 의욕이 생겨났더라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면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고향에 돌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에게 있어서 요셉의 존재는 그만큼 소중한 아들이었습니다.  그에게 열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열 아들보다 더 사랑이 가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남다른 사랑을 받았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야곱에게는 네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야곱은 그 네 명의 아내 중에 특별히 라헬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이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을 하루같이 여길 정도로 라헬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제일 사랑하는 아내인 라헬이 낳은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3절에 보면 요셉을 향한 야곱의 마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야곱이 요셉을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했는지 요셉에게는 특별히 채색옷을 만들어서 입혔다는 겁니다.  채색옷은 소매가 길어서 거의 발목까지 오는 옷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옷은 일을 할 때 입는 옷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요셉의 형들에게는 소매가 짧고 옷이 몸에 딱 달라붙어서 일하기에 편한 머슴들이나 입는 옷을 입혔습니다.
 
반면에 요셉에게는 공작새같이 우아한 옷을 입혔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요셉은 일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너는 놀아도 된다"라는 뜻입니다.  이 채색옷은 화려하고 좋은 옷이면서 일에 대한 면제도 상징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이 채색옷은 그 집안의 장자에게만 입히는 옷이라고 합니다.  위로 열 명의 형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집안에 서열이 분명한 장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 한 번째인 요셉이 선택된 자의 옷인 채색옷을 입었다.  그러니 이러한 야곱의 편애가 얼마나 형들의 마음에 분노를 자극했겠습니까?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언제나 시기와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이 요셉에 관한 책을 쓰면서 부제목을 이렇게 잡았다고 합니다.  "A Man of Integrity and Forgiveness"  요셉이 어떤 사람인지를 두 단어로 요약한 것인데, 한 마디로 요셉은 성실성과 용서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어를 하는 분들에 의하면, 한국에서 'integrity'라는 단어는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사실 'integrity'라는 단어는 성실성이 아닙니다.  성실하며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한 마디로 요셉처럼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가리켜서 'integrity'라고 합니다.

사실 요셉은 아버지가 시킨 것보다 더 많이 일하는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12절과 13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에 나오는 세겜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생각이 나십니까?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한 곳입니다.  더 나가서는 야곱의 아들들이 디나의 일로 인하여 거기에 살던 남자들을 다 죽여버렸던 곳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의 다른 족속들로부터 언제든지 복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곳이 바로 세겜입니다.  어쩌면 야곱의 가족들은 '세겜'의 '세'자만 나와도 살기와 보복의 위험을 느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곳에 그의 형님들이 양떼를 치기 위해 갔습니다.  그리고 어린 요셉이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곳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어야 할 형님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일반 사람들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냥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제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세겜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형님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그가 그렇게 했다고 해서 다른 곳을 찾아보지도 않고 돌아왔다고 야단을 칠 아버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요셉의 마음에는 성실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시킨 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목적,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는 데까지 성실성을 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선 우리들의 신앙적 자세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어떤 한 가지의 일을 이루는데만 우리의 마음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목적,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까지 나아가셔야 합니다.
 
아버지의 목적은 요셉으로 하여금 그저 단순히 세겜에 갔다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목적은 형님들이 잘 있는지, 그들의 형편을 알아보고 오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목적은 세겜이라는 그곳이 아니라 형님들이라는 그 영혼에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목적은 그 한 영혼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잃어버린 그 영혼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제 요셉은 세겜 들을 방황하면서 형님들이 어디로 갔는지를 수소문합니다.  그러다가 어렵게 형님들이 도단으로 갔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서 도단으로 갑니다.  그런데 요셉이 도단에 갔더니 형님들이 멀리서 요셉을 알아보고서는 그들의 중심에 있는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본문 19절과 20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 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한 마디로 요셉을 죽여버리자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에 요셉이 그냥 세겜까지만 갔다가 집으로 돌아갔다면 그는 이처럼 죽음의 위기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실하게 세겜에서 형님들의 행방을 찾아서 도단까지 찾아갔더니, 그곳에서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의 성실함 때문에 나쁜 결과가 온 것입니다.  성실함 때문에 노예로 팔려가고, 성실함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런 일이 생길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성실하게 살았더니 오히려 일들이 더 어려워집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성실하게 살다보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우습게 여깁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보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 앞에서 잔머리를 굴립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나쁜 결과를 낳는 길로 갈 수밖에 없도록 구덩이를 만들어놓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 여정에서 성실함 때문에 오히려 나쁜 결과를 맞을 수 있다.  이것은 실제로 우리들의 삶 속에서 너무나도 쉽게 경험되어지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는, 하나님의 형통케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단기적인 나쁜 결과 때문에 우리의 삶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즉각적인 결과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보십시오.  요셉이 성실하게 행하였더니 나쁜 결과가 왔습니다.  죽음의 위기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형님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만약에 그 구덩이에 물이 있었다면 그냥 물 속에 잠겨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덩이에는 마침 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요셉을 붙드셔서 그가 죽지 않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서 애굽의 노예로 가도록 만드셨습니다.  요셉은 애굽에 가서 보디발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비록 노예였지만, 거기에서도 보디발의 총애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품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요셉이 애굽에 도착해서 그곳에 적응하는 시간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분명히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을 것입니다.  생활 방식도 달랐을 것입니다.  문화도 달랐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그곳에서 어떻게 애굽의 언어를 배우고, 그곳의 생활문화에 적응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창세기 39장 2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무슨 말입니까?  요셉의 고난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구덩이에 던지움을 당하고, 노예로 팔려 가는 수많은 고난 속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을 성실하게 하다가 나쁜 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지금 현재의 시간에서 보았을 때에는 나쁜 결과같이 보였지만, 그 속에는 면면히 흐르는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승리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여 지금 고난의 힘든 터널을 지나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는데도 불구하고 내 삶은 전보다 더 나쁜 결과에 빠져있습니까?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나를 향해서 어렵겠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구덩이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있다는 것을 믿고 고난 중에도 형통할 것을 바라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더 크신 뜻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억울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때 눈앞에 보이는 억울한 일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그림 속에서 이 일은 지극히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광야에 내 몰릴 때에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더 크신 뜻 속에서 나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큰 그림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크게 보상해주실 것을 믿고 다시 일어서시기를 축복합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요셉의 내면을 연단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럼으로 해서 궁극적으로는 그를 애굽의 바로 왕 앞에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13년 동안 요셉을 그 길로 세심하게 이끌어 가셨습니다.  요셉의 내면을 연단시키셔서 바로에게 점점 더 가까이 가게 하셨습니다.
 
솔직히 야곱이 요셉을 품에 안고 키웠던 17년의 시간보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연단하시고 이끄셨던 13년의 시간이 훨씬 더 유익하지 않습니까?  야곱의 품에서의 17년은 형제들간의 미움과 시기와 다툼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이끌림을 받았던 13년의 시간은 거대한 나라의 지도자로 세우시려는 연단의 세월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셉이 간 길을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은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노예로 팔려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미디안 상인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인 보디발에게 팔았습니다.  그러니까 바로를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보디발의 집으로 요셉을 보내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를 통해 비록 감옥이지만 왕의 신하들이 갇혀 있는 곳으로 그를 보내십니다.  거기에서 바로의 술맡은 관원장을 만나게 하시고, 나중에 그 관원장이 바로에게 요셉을 소개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름도 없는 한 소년을 연단시키시고 세우셔서 거대한 나라 애굽의 바로 왕 앞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십시오.  그런데 그 길이 요셉의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아무리 영적으로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을 약간은 볼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찬양을 하지 않습니까?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을 가지고 걷는 사람들이 그 길을 다 알기 때문에 걷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이 눈에는 아무런 증거가 안 보여도 걷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다 보이기 때문에 걷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음을 믿기 때문에 걷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큰 그림 속에서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풍랑 속에서도 감사하며, 찬양하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내일이 어떻게 될는지 나는 모릅니다.  눈에 아무런 증거도 보이지 않습니다.  선명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캄캄하기만 합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지고 걷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주실 최종 승리를 믿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찬양하면서 힘차게 내게 주신 그 사명을 향하여 오늘도 나는 걷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실함과 순종함 때문에 단기적으로 나쁜 결과가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웃을 수 있습니다.  결코 잊지 마십시오.  성실함 때문에 오히려 나쁜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고난 중에도 형통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으셔야 합니다.  내가 아는 것보다 더 큰 그림과 뜻 속에서 나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덩이에서부터 다시 시작한 인생, 최악에서부터 다시 시작한 인생, 그것이 바로 요셉입니다.  우리도 요셉과 같이 지금 내가 서 있는 상황이 구덩이와 같은 최악의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다시 구덩이에서 일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비출 수 있는 믿음의 사람, 축복의 사람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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