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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약속 (삼상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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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약속 (삼상 22:1~5)


지난 시간 우리는 삼상21장을 중심으로 다윗의 망명생활에 대하여 말씀을 나눴습니다. 

잠간 복습해보지요. 

다윗은 블레셋의 다섯 성읍 가운데 하나인 가드의 아기스 왕 영내로 피신했습니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아기스 왕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 대장군 골리앗을 죽인 이스라엘의 다윗이 분명합니다. 그 때 그 황당한 장면을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아마 다윗이 우리의 정세를 염탐하려고 잠입한 것이 분명합니다.” 

다윗이 이런 분위기를 눈치 챘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위기를 모면하고 살아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미치광이 짓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초점 잃은 눈을 해가지고, 대문짝에 등을 대고 그적거리고, 침을 수염에 흘리고......... 

아기스 왕이 다윗을 가만히 보니까 골리앗 장군을 죽인 용사이기는커녕 사방을 떠도는 미치광이에 불과했습니다. 

아기스 왕은 다윗을 미치광이로 판단하고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 이런 사람을 데려왔느냐?”고 호통을 치고, 내쫓았습니다. 

다윗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가드에서 쫓겨나온 다윗은 아둘람 굴에 은신했습니다. 

아둘람 굴은 유다지파에 속한 땅이었지만 블레셋의 영향아래 있었기 때문에 다윗에겐 비교적으로 안전한 지역이었습니다. 

1.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 

본문은 다윗과 사울 왕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다윗을 통하여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아둘람 굴은 다윗의 도피생활의 비참함을 드러내는 상징물이었습니다. 

‘굴’의 어둡고 칙칙한 이미지는 다윗의 절망적인 상황을 나타냅니다. 

반면 기브아 높은 곳에서 단창을 들고 신하들로 둘러싸인(6절) 사울 왕의 모습은 당당함 그 자체였습니다. 

6절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단창을 들고 에셀 나무 아래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 곁에 섰더니”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였습니다. 

외적인 모습과 다르게 사울 왕은 신하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로부터도 버림받고 있었습니다. 

8절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반면 다윗에게는 추종자들이 몰려왔습니다. 

2절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8절의 ‘하나도 없도다.’라는 말과 2절의 “다‘라는 말을 비교해보십시오. 

사울 왕에게는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고, 다윗에게는 ‘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상황은 분명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한 순간도 멈춤 없이 다윗을 통하여 실현되고 있습니다. 


2. 비전공동체 


저가 본문을 묵상하면서 궁금하게 여긴 점은, 아둘람 동굴에 모인 무리의 성격에 관한 것입니다. 

2절에 보면 환난당한 자, 빚진 자, 마음에 원통한 자들이 다윗에게 모여들었다고 했습니다. 

2절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2절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환난당한 자’란 외부로부터 계속적으로 정치적인 압력을 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이 왜 환난을 당했으며, 어떤 환난을 당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적으로 사울 왕한테 압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빚진 자’란 단지 빚을 진 사람일 뿐만 아니라 빚을 갚지 못하여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노예의 신세로 전락하여 채주에게 도망친 사람들일 것입니다. 

‘마음이 원통한 자’란 마음이‘고통스럽고 분노한 상태’를 말합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마음에 한이 맺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백 명이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집단의 성격은 무엇일까요? 

‘이 더러운 세상 차라리 떠나버리자’는 도피자들일까요?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말자’는 은둔자들일까요?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주먹 하나 믿고 설치던 깡패들일까요? 

모순된 세상을 뒤엎어버리겠다는 혁명가들일까요? 

그들은 무엇 때문에 모였을까요? 

그 집단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그 집단의 성격을 조사하다가 시편 57편을 발견했습니다. 

시편 57편은 사울 왕의 칼을 피해 아둘람 굴에 은신해 있던 다윗의 심경을 담은 시편입니다. 

그 시편의 제목이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라고 적혀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동굴에 은신해 있습니다. 

바깥에는 굶주린 사자처럼 사울 왕의 군사들이 호시탐탐 다윗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시57:4절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시57:6절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 

사자, 불, 창 ,화살, 칼, 장애물, 웅덩이라는 말이 계속하여 나옵니다. 

보통 사람이 이런 상황을 만났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안으로 자기 연민에 빠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이는가?” 

또한 바깥으로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보복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남편 잘못만나서........”“부모 잘못만나서.......”“회사가 개떡 같아서........”“ 이 사회가 불합리해서........” 

그리고 위로 하나님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왜 나만 입니까? 내가 무슨 천벌 받을 짓을 했습니까?” 

그런데 시편 57편에는 그런 내용이 없어요.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주조를 이룹니다. 

믿음이 가져다주는 역설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우들도 이런 역설을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이 시편을 읽다가 깜짝 놀랄만한 고백을 만났습니다. 

시편57:8절입니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 구절은 그들의 비전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새벽은 밤중에서 가장 춥고 어두운 순간입니다. 

그들은 그 어두운 역사의 새벽을 깨우려고 모였습니다. 

지금은 캄캄한 어두움이지만 곧 밝아올 아침을 준비하자고 모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둘람 동굴의 400명의 공동체를‘비전공동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삶을 바꾸고, 가정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고, 민족의 역사를 바꿀 비전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아둘람 동굴에 모인 무리의 성격을‘비전’이라는 한 단어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광고대행 업자이며, 최고의 작가 중의 한 분인 도티 월터스에 관한 얘기입니다. 

좀 길지만 잘 들어보십시오. 

한 젊은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 결혼을 했습니다. 

1948년의 어느 날 남편이 하던 세탁소가 오랜 불황의 파고를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세탁소를 인수하기 위해 빌려 쓴 5,000달러를 어떻게 갚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빚을 갚으려면 당장 돈벌이에 나서야만 했는데, 집에서 살림만 하고 아이들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아온 젊은 여인에게 세상은 결코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섰습니다. 

‘나이 23세, 학력 고졸, 특별한 기술이나 자격증 없음.’ 

거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은 고작 그것뿐이었습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사방의 문을 두드렸지만, 돌아온 대답은 한결같이 ‘죄송합니다. 자리가 없습니다.’였습니다. 

그녀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침대에 누워서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내게 한 가지 기술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하면서 가슴을 치는데, 그 순간 언젠가 성경책에서 읽은 ‘기름 한 병’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절망에 빠진 여인의 이야기였습니다. 


남편이 남긴 빚 때문에 두 아들이 노예로 팔려갈 위기에 처하자, 절망에 빠진 여인은 남편의 스승이었던 예언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예언자는 그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그러자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기름 한 병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경을 찾아 확인해보겠습니다. 

왕하 4:2절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저가 가로되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예언자는 여인에게 밖에 나가서 이웃들에게 빈 그릇이란 빈 그릇은 모조리 빌려오라고 했고, 그 그릇에다 기름을 부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예언자의 말대로 그릇을 모아 기름을 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붓고 또 부어도 계속해서 기름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기름을 담을 빈 그릇이 없어졌을 때 여인은 다시 예언자에게 달려가 자기가 경험한 놀라운 기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예언자는 여인에게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두 아들과 함께 생활하라.”라고 말했습니다. 


‘기름 한 병’이란 상징입니다. 

이 기름 한 병이 절박한 그녀에겐 한 줄기 빛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내 집에 아직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 안에 남아있는 기름은 무엇일까?’ 

그 순간,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선생님은 그녀의 작문실력이 매우 뛰어나다고 칭찬하시며, 학교신문을 편집하는 일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침대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난로 옆에 쌓아놓은 <볼드윈 파크 Baldwin park>라는 주간지를 꺼내 식탁 위에 펼쳤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그 신문에 실린 광고란 광고는 모조리 다 읽었습니다. 

‘그래, 글 쓰는 일이라면 나도 잘할 수 있을 거야! 혹시라도 글 쓰는 일에 관련된 사람을 뽑는 광고가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구인광고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다만 광고 문안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카피나 문장이 촌스럽고 형편없는 것들이 꽤 눈에 거슬렸습니다. 

‘쯧쯧…. 나라면 이런 식으로 쓰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곧장 신문에 나온 허접한 광고문안들을 다시 고쳐 써보기 시작했습니다. 

몇 차례 수정을 거쳐 나름의 샘플 광고문안을 다 완성했을 때는 이미 새벽을 지나 아침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잠을 하나도 못 잤는데도 이상하리만큼 기분이 상쾌하고 몸도 날아갈 듯했습니다. 

처음 맛보는 뿌듯한 희열이었습니다. 

창틈으로 눈부신 아침햇살이 밀려들었습니다. 

그녀는 서둘러 옷장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맵시 나는 옷을 차려입고 읍내에 있는 신문사로 향했습니다. 

신문사에 도착하니, 작은 키에 깡마른 체구의 사나이가 근심에 찌든 얼굴로 사무실 안쪽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그녀는 그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선생님, 혹시 신문사 사장님 아니세요? 사장님이시라면 광고지면을 좀 사러왔는데요.” 

그러자 사나이의 태도가 진지해졌습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그녀는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문의 광고란을 도매가격으로 사들인 후 광고주를 찾아가 광고 문안을 써서 신문에 실어주고 이익을 붙인 금액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의 제안은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날부터 그녀는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쉴 새 없이 구두밑창을 바꿔 달아야만 했습니다. 

결국 그녀의 광고 문안에 매료되어 여기저기 단골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성경에 나온 예언자의 말대로 ‘빌려온 그릇’인 광고란에다 집에 있던 ‘기름 한 병’인 자신의 글쓰기 능력을 붓고 또 부었습니다. 

그리고 5,000달러의 빚을 갚았을 뿐만 아니라 유명한 광고대행업자, 세계 최고의 작가이자 강사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바로 도티 월터스(Dottie Walters)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에게 아직까지 남아있는 기름 한 병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도 분명히 남아있는 기름 한 병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빌릴 그릇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는 여러분이 사용한 빈 그릇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많습니다. 

이것을 보는 영적인 안목이 열리길 바랍니다. 

이 발견이 바로 비전을 갖게 되는 출발점입니다. 


복음성가-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 이 복음성가는 85세 된 갈렙 할아버지의 고백입니다.) 

왜 비전이 생기면 놀라운 힘이 우리에게 주어집니까? 


첫째, 비전은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줍니다. 


집중력은 모든 학업, 생업, 작품, 그리고 인생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마음을 집중하지 않고 통달할 수 있는 일은 이 세상에 한 가지도 없습니다. 

집중력이 올라가면 몰입상태에 빠져들고, 몰입상태에 빠져들면 초인적인 능력이 발휘되는데 그 결과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둘째, 비전은 매사에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줍니다. 

아무도 모든 일을 다 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합니다. 

비전과 잘 맞는 길이라면 과감히 선택하고 그렇지 못한 일은 주저 없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전이 있는 사람은 시간이든, 에너지든, 돈이든 불필요한 낭비를 하지 않습니다. 


셋째, 비전은 우리를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스티븐 코비(Stephen Covey)는 비전을 가진 사람은 외부자극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동인에 의해 솔선해서 먼저 움직이는‘프로액티브(proactive)’한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누가 시키기 전에 능동적으로 먼저 움직이는 사람들은 내부에 ‘자가발전시스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외부환경이나 조건, 상황의 변화에 일희일비하거나 동요하지 않습니다. 


넷째, 비전은 정신적ㆍ육체적 에너지를 공급해줍니다. 

모든 위대한 업적과 성취는 열정ㆍ집요함ㆍ결단ㆍ도전ㆍ그리고 인내의 산물입니다. 

비전은 이러한 모든 힘을 샘솟게 하는 에너지원입니다. 

자신도 몰랐던 잠재력을 발굴해주고, 온몸을 마비시키는 듯한 두려움도 걷어냅니다. 

넘어져도 웃으며 털고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줍니다. 

비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합니다. 

들리지 않는 소리도 듣게 합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전환시키는 힘을 솟구치게 합니다. 


다섯째, 비전은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 상태를 직시하는 능력을 줍니다. 

비전은 우리로 하여금 매일 매 순간 미래의 자기 모습을 그릴 수 있도록 합니다. 

삼성전자 같은 기업을 일으키고 있는 내 모습, X-선을 발견한 뢴트겐처럼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내 모습, 테레사 수녀처럼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게 해줍니다. 

 매 순간 그런 두근거리는‘내일’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어떻게 귀중한 ‘오늘’ 하루를 게임으로, 술로 흥청망청 날려버릴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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