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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뢰아 사람들 (행 1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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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뢰아 사람들 (행 17:11~14)


(행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행 17: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막15:41, 행16:13 
(행 17: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행 17: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마10:23, 행17:10 
(행 17: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행18:5 

우리에게 탐험가로 알려진 리빙스톤의 주의 복음을 위해 아프리카에서 일생을 바쳐 선교했던 선교사입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유언에 따라 몸은 그가 태어난 영국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그가 사랑했던 아프리카에 묻혔습니다. 원주민들은 아주 조그마한 아프리카 부락의 키 큰 나무의 아래쪽에 구멍을 뚫고 그들이 사랑하였고 존경했던 사람의 심장을 안치시켰습니다. 
만약 당신의 심장이 일생동안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곳에 장사된다면, 거기는 어디라고 생각됩니까?
당신의 지갑 속이요? 아니면 직장 사무실의 적당한 자리 아래입니까? 

지금 이 시간 당신의 심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배는 주님께 심장을 바치는 것입니다. 마음을 바치지 않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시간 마음을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잘 살펴보면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다가 유대인들의 극심한 방해와 핍박으로 데살로니가에서 남서쪽으로 약 80km 정도 떨어진 베뢰아로 옮긴 후 베뢰아서 만난 베뢰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베뢰아 사람들....” 이라고 정했습니다. 베뢰아는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볼 때 그다지 중요한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베뢰아의 사람들은 아주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더 너그러운 사람들
본문에서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베뢰아 사람들을 “더 너그러운 사람들”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너그러워서...란 말씀이 신사적이어서 라고 되어있습니다. 무엇이 누가의 눈에 신사적으로 비쳐졌을까요? 신사적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유게네스” 는 고상한 인품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국어 사전에는 “몸 가짐이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 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교양이 있고 인격적이며 흠이 없이 깨긋하고 부지런하며 근면한 사람을 흔히 일컬을 때에 붙이는 명칭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말하는 신사적이란 의미는 그런 윤리적인 측면에서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성경이 말하는 신사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뢰아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신사적인 베뢰아 사람들의 믿음에서 세 가지의 특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수용성입니다. 
신사적인 믿음은 말씀에 대한 수용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까 사람들보다 수용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선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 도망치다시피한 바울과 실라를 따듯하게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드렸습니다. 
바울이 베뢰아 사람들에게 전한 메시지도 틀림없이 데살로니가에서 전한 것과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복음이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십자가에의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오래동안 헬라의 철학과 다신론의 우상 숭배에 찌들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조상 대대로 믿어 온 자기들의 종교와 다르다고 들어 보지도 않고 거부감을 가지고 배타하지 않고 아주 정성을 다하여 마음을 열고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 라고 했습니다. 복음에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가 아니라 수용적인 태도를 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뢰아 사람들이 신사적이라는 평가를 들은 것은 바로 사람과 말씀에 대한 수용성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을 잘 받아드린 그들을 하나님은 신사적인 믿음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보면 수용적인 마음이 있는가 하면 아주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음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은 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항상 수용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열린 마음, 그것이 바로 수용적인 태도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수용적인 사람은 “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압니다”
잘 듣는 사람이 신사적인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귀와 한 입을 주셨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말하는 것의 두 배만큼 듣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성경 구절의 처음 두 가지 명령을 순종한다면 세 번째 명령은 자동적으로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한다면 자연히 성내기는 더뎌질 것입니다.

설교를 얼른 들을 때 듣기 모드로 바꾸어야 합니다. 듣기 모드는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쳐다보라

잘 듣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선 집중해야합니다. 설교자의 입을 바라보십시오.
둘째 메모하라
아무리 잘들어도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메모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무엇을 메모하느냐 하면 말하는 핵심을 적어야 합니다. 즉 키워드를 적는 것입니다. 
핵심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말하는 사람의 핵심이 있고 듣는 입장의 핵심이 있습니다. 둘 다 중요한데 말하는 사람이 나타내고자하는 핵심에 듣는 나의 생각을 적는 것입니다. 깨달은것, 이해된것, 연결되어지는 다른 내용내지는 적용점들을 메모하십시오.

셋째 맞장구 쳐라

넷째 머릿속으로 생각하라. 

연구에 의하면 듣는 방식에는 네 가지 기본 형태가 있다고 합니다. 

"판단하며 듣는 사람" 
- 이런 부류의 사람은 미리 자신의 마음을 정해 놓고 진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비평적이고, 부정적이며 선입견에 사로잡혀있습니다. 17%의 인구가 이런 부류에 속합니다. 

"질문하며 듣는 사람" 
- 이런 부류의 사람은 경청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계속해서 많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은 대화에서 중요하지만 곧 쓸모 없어집니다. 26%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조언을 하며 듣는 사람"
- 더 많은 수(35%)의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합니다.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신속한 평가를 내릴 만큼 충분히 듣고 나면 상대방이 원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조언을 상대방과는 상관없이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접근해갈 때 생기는 문제점은 무슨 조언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 실제로는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당신은 상대방이 하는 말 전부를 듣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감정이입을 하며 듣는 사람" 
- 22%만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접근법이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기분까지도 알아내기 위해 듣는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의 음색이나 얼굴 표정, 제스쳐와 같은 비언어적인 표현에도 주의를 기울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설교를 들으면서 귀로만 듣지 마시고 눈으로 들으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뭔가 새로운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남의 말을 수용적일 때 그 사람이 신사적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적일 때 그 사람의 믿음이 자라고 은혜를 받게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쳐야 할 것 중에 한 가지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예식장에 갔을 때 예식에 참여하는 태도입니다. 주례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는 고사하고 자신이 축하하러 온 신랑신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습니다. 주례자가 주례를 하든 말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떠듭니다.
음식점에서 오찬을 하면서 회갑연 예배를 드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의도 예절도 하나도 없습니다. 도무지 시끄러워서 설교를 못할 정도로 떠들어댑니다. 사회자가 주의를 주고 주례하는 사람이 축하하러왔으니 축하하는 의미에서 좀 조용할 것을 부탁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디 가서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신사는 남의 말을 경청해주고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경박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남의 말을 많이 하고 자기 말만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도 경청하는 자세를 갖지 못합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신사적인 모습은 말씀에 대한 수용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세입니다. 

2. 간절성입니다.

둘째로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하게 말씀을 들어었습니다. 이것은 간절성입니다. “더욱 간절히” 번역된 헬라어 엑테네스테론(ἐκτεγἐστρογ) “열심히 또는 진심으로” 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들은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은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열심히 있는 믿음이 신사적인 믿음입니다. 
갈 4:18절에 보면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라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 119:123절에서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눈이 피곤할정도로 사모하였다는 것은 눈이 피곤할 정도로 읽고 연구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이렇게 사모하는 영혼에게 하나님은 만족하게 채워주신다고 했습니다. 
시 107:9절에 보면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듣는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 간절성입니다. 

3. 갈구성(渴求性)입니다. 

셋째로 베뢰아 사람들은 갈구성 즉 탐구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갈구성이란 갈급성 즉 목마름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하여 목말랐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진리를 찾았습니다. 본문에서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라고 했습니다. 
진리에 대하여 목마름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 영적인 목마름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진리를 찾는데 마음이 열린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말을 경청했을 뿐 아니라 그들은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무조건 믿은 것이 아니라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상고했다고 했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심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신사적인 믿음입니다. 
마 5:6절에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주리고 라는 페이나오(peinao)는 '궁핍하다', '심한 굶주림으로 고통 당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목마름이라는 단어 디프사오(dipsao)는 '진짜 목마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구성 즉 목마름이 있는 것이 신사적인 믿음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들에게서 이런 특성이 발견되기를 기대합니다. 
인격적으로 교양이 있고 흠이 없이 깨긋하고 부지런하며 근면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이 세상 사람들보다 신사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영적인 면에서 신사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수용성을 가집시다. 그리고 간절성을 가집시다. 목마름을 느끼고 진리를 찾는 믿음이 되어 그 누구보다도 신사적인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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