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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역할과 권세 (행 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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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역할과 권세 (행 5:1~16)


저희 교회 개척 초기에는 아주 좋은 변명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아직 개척교회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 한마디면 교회의 부족한 면에 대해서 면죄부가 되었습니다. 아직 개척교회이니 이해해 달라, 그러나 이제 그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벌써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교회의 나이는 사람 나이보다는 개의 나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사람이 여덟 살이면 아직 아이이지만 개가 여덟 살이면 중년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8년이라는 말은 이제 벌써 어른 나이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척교회의 변명은 이제 통하지 않고 이제는 뭔가를 보여줘야 하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저는 제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해서는 부담을 느끼지 않지만 교회가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해서는 부담을 느낍니다. 이제까지 별로 이룬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이대로 별로 이루지 못하고 또 세월이 흘러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지난번에 한국교회사 강의를 하셨던 최재건 교수님의 강의를 들어보니까 그분이 젊은 학생으로 무엇을 공부할까를 고민할 때 ‘교회사를 공부해야 되나, 기독교 역사를 공부해야 되나’를 놓고 고민을 하셨다고 하는 것처럼, 맞는 얘기입니다. 기독교와 교회는 어떤 관계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교회냐 교회가 기독교냐, 교회 없는 기독교가 가능하냐, 또 교회의 모습이 기독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느냐, 기독교는 좋은데 교회는 안 좋을 수 있느냐,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느냐,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관계를 비교하자면 포도주와 포도주 잔의 관계라고 보면 됩니다.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지 잔을 마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잔이 있기 때문에 포도주를 담을 수도 있는 것이고 마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포도주는 잔을 필요로 합니다. 서영춘씨의 유명한 말과 같습니다. ‘인천 앞바다가 사이다라고 해도 곱부가 없으면 못 마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회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교회가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예수님을 믿도록 돕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사람은 교회를 통하여 예수님에 대해서 배우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섬기는 법을 배웁니다. 또 예수님은 당신의 교회를 사용하셔서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복음을 전하시고 교회를 당신의 몸으로 사용하시고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친히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도 교회는 필요한 존재이고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부흥과 기독교의 부흥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데 기독교 신앙이 부흥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나라는 기독교 신앙이 부흥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상당히 큰 책임이 있고 큰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적어도 그 사실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만큼 우리가 이것을 믿고 실천하느냐에 이 시대의 기독교 신앙의 흥망성쇠가 좌우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보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읽기에도 겁이 나는 사건이에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말을 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이 교회의 위상과 권세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첫째는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네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게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는 교회에게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하기를 ‘네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게 아니고 하나님에게 한 것이다’ 교회에 거짓말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거짓말을 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목사님, 한 구절만 가지고 확대해석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물어보실 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다른 구절도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사울에게 나타나셨을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핍박한 적은 없고 교회를 핍박한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당신을 핍박하는 것과 똑같은 것으로 보셨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그 독생자 예수님을 대변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거짓말 한 것은 하나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는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변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에 전하는 말도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된 것처럼 교회가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는 사람의 말로 시작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주신 놀라운 사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섣불리 다뤄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더디 하고 듣기를 많이 하고 사람의 의견, 말하는 것을 자제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절제하고 또 여기에 대해서 조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하게 다룬다면 교회가 이 세상에 전하는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고 의견이 아니고 학술이 아니고 신학이 아니고 논리가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교회도 부흥하고 성도들의 신앙도 부흥하고 또 세상에 하나님의 귀한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권세가 됩니다. 

  
둘째는 교회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을 권한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에게 드릴 예물을 가지고 와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사도들의 발, 이것은 교회에 그것을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들에게 드리는 예물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지금 자기가 받을 몫에 대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받을지언정 베드로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취하는 것도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물이고 베드로는 다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것을 접수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성도들이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물을 접수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에 만일 베드로가 자기 개인이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집 판 돈을 조금 숨기더라도 별로 개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베드로도 여기에 대해서 인간적인 생각으로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드리는 사람이나 접수하는 사람이나 다 동일한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것을 드리고 또 접수해야 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에게 드린다고 하면서 거짓말하는 것에 대하여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것을 지적하고 그리고 치리해야 될 책임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인간적인 생각을 좇아서 타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일조든 모든 예물에 대해서 사람이, 교회가 임의로 ‘안해도 됩니다. 힘들면 넘어가십시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권한이 없는 것은 이것은 사람이 그것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것을 접수하는 것뿐이기 때문에 사람이 임의로 ‘이래도 됩니다, 저래도 됩니다.’라고 말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이것은 예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교회는 성도들을 모아서 그들이 하나님에게 올바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그들을 돕고 권면하고 그들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장적인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가 모여서 찬송을 부를 때 사람들 들으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모든 찬송가를 몇 억 번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각 찬송가를 몇 억 번씩 들어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새로운 곡을 듣기 위하여 우리에게 찬송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우리 같으면 아무리 좋은 곡이라고 몇 억 번 들었으면 ‘아, 괜찮다, 들은 걸로 하자. 찬송가 405장? 들은 걸로 하자. 찬송가 28장? 그래, 그래, 들은 걸로 하자.’ 이런 식으로 할 텐데 하나님은 ‘들은 걸로 하자’가 아니고 이미 수도 없이 많이 들어보셨지만 우리가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음치든 성악가든 ‘그래, 한번 들어보자.’ 주님은 우리의 찬송을 듣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예배를 받기를 원하신다는 얘기입니다. 

찬송은 예배의 한 행위입니다. 예배는 명사가 아니고 동사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할 수 있도록 그 예배를 주선하고 권고하고 돕고 함께 예배를 드리고 그것을 하나님에게 전달하는 그런 귀중한 책임이 있고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십니다. 

예물도 예배의 한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물을 드리는 것도 예배입니다. 찬송이든 기도든 성도의 교제든 예물 드리는 것이든 이것은 사람 들으라고, 사람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에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올 때 너무 기뻐서 겉옷을 벗고 춤을 추었는데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 오해했습니다. 임금이 체면도 없이 계집종들이 보는 앞에서 그랬다…. 그때 다윗이 말하기를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한 것이다, 다윗을 예배자라고 부르고 예배가 회복됐다고 말하는 이유가 다윗 자신이 예배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되기 위해서도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되면 됩니다. 

로마서 12장에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예배니라’ 영적인 - this is our spiritual worship,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 그 자체가 우리의 거룩한 산 예배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예배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성도의 예배를 하나님께 모아서 드리는 제사장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일 때 하나님이 역사가 나타납니다. 모일 때에 은혜가 나타나고 모일 때에 성령이 임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혼자서 은혜 받은 경우는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밖에 없고 그 이외에는 전부다 모였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신 것도 백이십 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한 중에 임한 것입니다.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임한 것도 그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있을 때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모일 때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혼자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모여서 기도할 때 더 큰 은혜가 있고 더 기도가 잘 되고 그렇습니다. 왜 내가 교회를 나가야 되느냐, 교회를 나가야만 기독교인이 되느냐? 그건 아니지만 그러나 나뭇가지 하나에 불을 붙여보세요. 금방 꺼지지요. 그러나 나무를 많이 모아서 모닥불을 만들면 활활 잘 탑니다. 내가 타는 것이 다른 나무가 타는 데 도움이 되고 남의 타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고, 교회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세 번째로 교회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판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심판할 수 있는 권세. 이 부분은 우리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권세를 대다수의 교회가 행사하기를 주저합니다. 이십일 세기에 이런 것이 얼마만큼 사람들에게 통할지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성경은 그것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가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교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성 베드로 사원에 가면 거기 베드로의 동상이 있는데 손에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열쇠가 작더라도 큰 문을 열 수 있는 것처럼 천국의 열쇠, 교회에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에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것이 열쇠의 기능인 것입니다. 

요즘은 그 기능이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외국 가는 비행기를 타는 사람이 공항 터미널에 가서 체크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공항터미널에 가서 체크인을 하고 버스를 타면 김포공항에서 별도의 체크인을 하지 않아도 이미 좌석을 얻고 짐을 맡기고 그냥 출구로 들어가면 됩니다. 공항터미널에 체크인하는 것은 공항에서 체크인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천국의 열쇠를 주셨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교회가 천국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 체크인을 하면 천국에 체크인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천국의 열쇠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의 죄를 사해줄 수 없지만 교회는 사람의 죄를 사해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3절에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해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이것은 교회에 주신 죄사함의 권세입니다. 교회가 누구의 죄를 사하면 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다는 얘기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바로 후자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들의 죄를 심판했더니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심판하셨어요. 교회에 주신 권세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에 대하여 경건한, 그리고 거룩한 두려움을 결코 잃어서는 안됩니다. 교회생활은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그저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제가 교회의 담임목사이지만 제 교회라고 제 임의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여러분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무엇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 I will build my church, on this rock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반석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한 교회는 승리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함께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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