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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담대히 전하게 하시는 주님 (행 4: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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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대히 전하게 하시는 주님 (행  4:23~31)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다가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고 뛸 수 있게 해준 일로 인해 솔로몬 행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게 되었으며 또 그것 때문에 붙잡혀 공회 앞에 불려가 서게 되었고 거기서 공회로부터 거듭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엄중한 경고와 위협을 받고 풀려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건 직후에 있었던 일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공회에서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동료들에게 돌아가서 공회에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들에게 한 말을 다 알렸습니다(본문 23절). 여기서 동료라 함은 단지 나머지 사도들만을 지칭하는 것이라기보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송하며 교제하기를 힘쓰던 예루살렘 교회의 모든 신자(행2:44-47)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다함께 즉시 한 일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한마음으로 소리를 높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본문 24절). 그 기도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적대자들로부터 그들에게 가해진 위협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안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이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할 때 그들의 입에서 제일 먼저 나온 말이 “대주재”였다는 사실은 의미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물론 하나님을 지칭해서 “대주재”라 했습니다. 본래 “대주재”란 노예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주인과 그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을 쥔 통치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밖에는 이 말을 쓰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하나님을 그런 하나님으로 여기며 사도들을 위협한 대제사장들과 공회의 권위는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권위 아래 속하는 것이기에 즉각 무한히 더 크고 높은 권위의 하나님께 호소한 것입니다.

“대주재”란 우주만물과 역사를 다 주장하는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일컫는 말입니다. “대주재여!” 하고 하나님을 부른 신자들이 곧바로 이어서 한 말 자체가 대주재의 의미를 잘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대주재이신 하나님을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라”(본문 24절)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유의 창조주로 고백한 것입니다. 만유의 창조주이시기에 모든 것에 대해 주인이시고 통치자시라는 믿음을 확인한 말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만유의 창조주로 고백한 예루살렘 신자들이 또 어떻게 하나님을 고백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 이어지는 25-26절입니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5절 하반절부터 26절에서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라고 한 것은 시:1-2의 인용입니다. 

단 그 끝의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주와 그의 그리스도”로 바꾸었을 뿐입니다. 여기서 “기름부음 받은 자”는 원래 유다 왕조의 왕을 가리켜 한 말이지만 동시에 훗날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말이었다고 사도들은 이해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 시편의 저자인 다윗이 먼 훗날 태어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벌써 알고 말할 수 있었겠느냐고 제기될 수 있을 질문에 미리 대답한 말이 25절의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한 것입니다. 즉 그것은 다윗의 자신의 생각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다윗의 입을 빌려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예언자였다는 것입니다.

시2:1-2에 대한 사도들의 이해는 이어지는 27-28절에서도 나타납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다윗의 입을 빌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하신 예언은 “과연”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시편 2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사도들은 따라서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세상의 군왕들”과 “관리들”도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을 가리킨 말로 본 것입니다. 헤롯이 바로 그 “세상의 군왕들”의 대표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가 그 “관리들”의 대표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시2:1-2의 예언대로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로마 군인들을 가리켜서 한 말일 것입니다. 25-28절의 내용을 정리하면,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그리스도를 대적한 것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시려고 예정하신 일을 그들이 행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이해는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약속된 메시야가 맞다면 어떻게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가 있겠느냐는 끊임없는 의문에 대해 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희생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셨고 그것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뜻이라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예정하신 일이고 그것을 성령을 통해 다윗의 입을 빌려 예언하신 일이며 하나님께서 그 일을 당신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인이시고 주관자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불행이고 비극이 아니라 바로 인류의 행복이고 세상의 기쁨을 이루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그리스도를 대적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시려고 예정하신 일을 그들이 행한 것이라는 사도들의 이해의 또 다른 의미는 공회로부터 받은 위협 앞에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예루살렘 신자들의 믿음을 재확인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했던 모든 자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예언하신 대로 움직이는 도구들에 불과한 터에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그들의 위협을 두려워할 바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공회는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장본인들이 모인 자리인데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의 도구에 불과했던 자들의 위협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확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결코 걸림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을 만유의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심을 재확인하며 공회로부터의 위협을 이길 힘을 주시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확인하며 고백한 예루살렘 신자들은 29-30절에서 비로소 하나님께 몇 가지를 구했습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예루살렘 신자들은 먼저 공회의 위협을 하나님께서 굽어보시기를 구했습니다. 즉 공회의 위협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상황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 안에 장악해주시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보시며 책임져주신다면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신자들이 두 번째로 간구한 것은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달라는 것입니다. 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는 공회의 엄중한 경고와 위협은 사도들은 물론 예루살렘 신자들을 전혀 움츠려들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위협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위협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무리 위협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전할 수 있는 담대함을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세 번째로 간구한 것은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손을 뻗을 때마다 병든 사람을 다 고칠 수 있는 권능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병 고치는 은사를 통해 유명해지고자 한 것도 아니고 돈을 벌고자 한 것도 아니며 단지 사람들에게 유익과 기쁨을 주고자 한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참 생명이 있으며 그를 전하는 사도들과 신자들의 증언이 참됨을 확신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존귀해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네 번째 간구는 바로 이 세 번째 간구에 긴밀히 연결된 것입니다. 그것은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한 것입니다. 병이 낫는 일을 비롯한 모든 놀라운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것은 사도들 자신이 존귀해지고 신격화되는 것을 막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만인의 생명을 좌우하시고 만병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심을 천하에 공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생명의 길이고 치유의 힘이며 소망의 근원이고 위로의 샘임을 모두가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의 모든 신자의 이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응답하셨음을 오늘 본문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31절을 봅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29절에서 보듯이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소서.” 기도한 대로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이 다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아 담대히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병을 낫게 하고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해달라는 기도도 응답되었음을 봅니다. 그 응답의 역사는 사도행전 전체에 가득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까운 데서만 몇 가지 사례를 찾아봅니다. 행5:1-11은 첫 번째 사례로 불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한 부부가 그들의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사도들의 발 앞에 놓으며 그것이 땅 판 값 전부인양 속인 사실을 베드로가 알아본 것과 그 속임수 때문에 그들이 죽으리라고 말한 대로 그 부부가 각각 죽은 일을 전합니다. 베드로는 또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병든 사람들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들을 다 나음을 얻게 해주었다 합니다(행5:16). 대제사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지만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행5:18-19). 옥에서 빠져나온 사도들은 곧바로 다시 성전에 가서 생명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행5:21).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고 대제사장이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했지만 사도들은 담대하게 대답하기를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5:29-32) 했습니다. 대제사장과 그의 무리는 사도들을 채찍질하고 다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아주었지만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고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행5:40-42).

오늘 본문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나 그를 증언하는 일에는 반대나 방해가 발생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는 의지를 꺾거나 믿음 자체를 위축시키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라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그런 일은 어떤 형태로든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그러한 위협 앞에서 즉시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다같이 한마음으로 소리 높여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수록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당면한 위기상황을 만유의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주인이신 대주재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로 극복하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닥치는 환난과 역경조차도 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며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세상이 가하는 위협에 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예루살렘 신자들은 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는 공회의 엄중한 경고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움츠려들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전할 수 있는 담대함과 능력을 달라고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섯째로,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의 모든 신자의 이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모두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뿐 아니라 병을 낫게 하고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권능까지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며 그 능력을 구할 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담대히 전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의 이 믿음과 체험이 곧 우리의 것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놀라운 성장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증인들이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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