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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씨름 (엡 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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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씨름 (엡 6:10~20)
 

-  물질세계와 영의 세계

“눈이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사람을 사귀고, 책을 읽고, 과학을 탐구하고, 물건을 만들고, 상품을 고르고, 운전을 하고, 경치를 구경하는 이 모든 일을 하는데 눈의 역할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너무 작아서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립자의 세계가 있는가 하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볼 수 없는 우주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대는 전자현미경을 통해서 세포나 박테리아와 같은 미세한 생물체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전자 천체 망원경을 사용해서 수억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우주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현미경이나 망원경이 우리의 육안이 갖고 있는 한계를 크게 뛰어 넘게 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언급한 것이 세계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물질세계에 불과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전자현미경이나 천체 전자망원경을 가지고도 볼 수 없는 세계가 있는데, 그것은 영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시며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히브리서 3장 4절에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되 영이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영적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  영적 존재로 지음 받은 사람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몸은 영혼을 담은 그릇과도 같습니다. 몸은 물질로 되어 있지만, 영혼은 물질이 아닙니다. 영혼이 곧 나 자신입니다. 몸은 영혼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달리 말하면, 영혼은 운전수에, 몸은 자동차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자동차라도 운전수가 시동을 걸고 운전을 해야 움직일 수 있듯이, 몸은 영혼의 지시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짐승들을 보면 단지 본능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배가 고프면 먹이를 찾고, 배가 부르면 놀거나 잠을 잡니다. 번식기가 되면 짝을 찾아 새끼를 낳아 기릅니다. 짐승은 이성이 없으므로 학문이나 예술이나 윤리 도덕을 모릅니다. 짐승은 영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성이 있기 때문에 학문과 예술을 하고, 윤리 도덕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종교는 문명인들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지구상에서 가장 미개한 족속도 나름대로의 신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물질세계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영의 세계에도 속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에게는 목이 마르면 물을 찾듯이 영적인 갈망이 있습니다. 

시편 42편을 지은 성도는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갈망을 느낀다고 해서 누구나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허탄한 우상들을 섬깁니다. 이는 저를 낳아주신 부모를 외면하고 전혀 엉뚱한 사람을 부모로 알고 공경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죄로 인해 그 영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서론에서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되어 있다고 했는데, 영혼은 영과 혼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영은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일을 하고, 혼은 우리의 이성과 감성과 의지 등을 관장합니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으로 사람의 영이 죽었습니다. 그 결과, 학문도 하고, 예술도 하고, 철학도 하고, 법과 도덕도 논하지만, 창조주 하나님께 대해서는 깜깜절벽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3장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 구절은 죄로 인해 영이 죽은 인간들의 실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이 죽은 사람은 영적으로 무감각한 상태에 있으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박사라도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 거듭남이란?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려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거듭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한번은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에다 유대 최고 종교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의 의원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대해서 박식한 사람으로서 백성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말하기를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의 칭송에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고상한 예술가라도 육에 불과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 앞에 절합니다(사 2:9). 거듭남은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인간적인 방법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성령께서 인간의 죽은 영을 새롭게 살리십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찾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이같이 말씀합니다.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곧 그를 영접한 사람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 거듭난 성도의 삶

이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아가되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에 속한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처럼 욕심을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일을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영광을 바라고 살지 말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고전 10:31). 이 같은 삶은 거듭나기 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거듭난 지금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잘 섬기려는 마음의 갈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범죄하고 요나처럼 불순종하는 자신을 봅니다.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시험에 들 때도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한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분도 한 때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고 탄식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패배에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고 드디어 영적 승리를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말하기를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고 했습니다. 사도는 더 이상 욕심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고,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사랑하지도 않았으며,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 영적 승리의 비결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기가 경험한 영적 승리의 비결을 성도들에게 말씀해 주었는데, 오늘 봉독한 말씀이 그것입니다. 

“10)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19)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적 씨름이라고 했습니다. ‘씨름’으로 번역한 단어는 실제로는 레슬링을 의미합니다. 레슬링 경기를 보면, 두 선수가 맞붙어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엎치락뒤치락 싸웁니다. 레슬링 경기에서는 순간의 방심이라도 허용했다가는 상대방에게 역습을 당합니다. 힘과 기술과 정신력을 다 갖추어야지 어느 것 하나라도 부족하면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적수는 사람이 아니라 마귀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혈과 육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대적해야 할 적수는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와 그의 수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정세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은 모두 다 악령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천사들 가운데도 천사장을 비롯해서 여러 계급이 있듯이, 마귀의 수하에 있는 악령들도 높고 낮음이 있습니다. 마귀와 악의 영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끼칩니다. 오늘날 인간 세상이 타락하고 죄와 불의가 가득한 것은 이 세상이 마귀의 지배 아래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일컬어 ‘이 세상 임금’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2:31). 

마귀가 임금이 되어서 이 세상을 다스리기 때문에 세상은 점점 더 타락하고 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가 가장 큰 관심을 갖고 힘쓰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마귀는 구원 받은 성도들을 노리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차피 마귀의 백성이므로 가만히 두어도 멸망 길로 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므로 원수로 알고 덤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영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면, 마음에 시험이 다가올 때, 단순하게 아무개 때문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악령이 역사하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 마귀의 궤계

마귀는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기를 좋아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가 끝나갈 무렵에 제자들을 데리시고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여행을 가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하니, 다시 물으시기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시몬 베드로의 대답이 얼마나 예수님의 마음에 들었으면 이처럼 파격적인 축복을 하셨을까요? 그 때로부터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만류하기를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위해서 그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사단 곧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그 순간 사단으로 변했다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배후에서 사단이 역사하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귀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수제자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을 시험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시험했던 사단이 지금도 변함없이 그리스도인들을 시험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기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귀한 권면을 줍니다. “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8-9) 먹잇감을 보고 으르렁 거리는 사자,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마귀를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우리에게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 마귀는 겁을 먹고 물러갑니다. 
 

- 마귀를 대적하려면 속사람이 강해져야

그러나 우리가 이 같은 권세를 가지고 실제로 악의 영들을 대적하려면, 먼저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합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하신 에베소서 6장 10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레슬링 선수들을 보세요. 얼마나 몸이 튼튼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절로 몸이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수들은 매일 같이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서 몸을 단련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적으로 강건해지려면 성령의 은혜를 힘입어서 신앙의 연단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 집니다. 몸이 건강하면 감기에 잘 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설령 걸렸더라도 금방 낫듯이,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면 시험에 잘 들지 않을 뿐 아니라 혹 시험에 들었더라도 기어코 시험을 이기고 영적 건강을 회복합니다. 

우리는 담대하게 마귀를 대적해서 승리하기 위해 영적으로 강해져야 합니다. 핍박과 환난을 이기려면 마음이 강해져야 합니다. 약해서 작은 시험 앞에서도 맥없이 넘어지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연약한 자가 아니라 강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그리고 우리가 악의 영들을 상대로 싸워 이기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당시 로마 군사들이 입었던 전신갑주를 생각하면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했습니다. 화살이 빗발치듯하고 어디서 칼이 날아들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투구와 갑옷은 필수적인 장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군인들은 항상 튼튼한 띠로 허리를 졸라맵니다. 허리띠를 띠지 않으면 옷이 흘러내려 민첩하게 행동할 수 없습니다. 또 허리띠를 꼭 졸라매야 힘을 쓸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리 위에 서야 담대하게 불의에맞서 나갈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의의 흉배를 붙이라고 했습니다. 흉배는 가슴을 보호하는 장비인데, 성도들이 하나님의 의로 옷입고 의로운 삶을 살아갈 때 마귀가 감히 참소하지 못합니다. 

그 다음,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했습니다. 군인들은 훈련을 하거나 전쟁을 할 때 발이 편하고 질기고 튼튼한 군화를 신습니다. 고무신이나 멋 내는 구두를 신고서 전쟁하러 나가는 군인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귀와 싸우는 성도들은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어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평안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라고 했습니다. 사도 당시에 로마 군인들은 전쟁에 나갈 때 큰 방패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이 방패는 아교로 나무를 이중으로 붙인 것으로서 이것으로 적이 쏘아대는 불화살을 막아냈습니다. 불화살이 방패에 박히면 불이 꺼졌습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방패는 곧 믿음을 말합니다. 마귀는 성도들을 향하여 불화살을 쏘아 댑니다. 의심의 불화살을 막아내려면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 다음,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합니다. 이는 성도들은 언제나 구원의 소망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생각하는 지체입니다. 구원의 소망을 가진 성도는 어떤 시련이나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칼은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무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검으로 사용해서 마귀의 공격을 막아낼 뿐 아니라 마귀를 공격해서 물리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원저자는 사람이 아니고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검이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할 때 마귀가 패하여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읽고 익혀서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는 기도로써 무장하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라고 했습니다.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기도는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최신 무기로 무장했을지라도 전쟁에 나간 군인이 졸고 잔다면 적을 물리치기는커녕 자기 목숨도 지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대에서는 밤낮으로 보초를 세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파수꾼입니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땀이 핏방울처럼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시는 동안에 제자들은 다 쓰러져서 졸며 잤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주님께서 경고하셨건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 날 밤에 모든 제자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으며, 수제자 시몬 역시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패배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마귀는 깨어 기도하는 성도들을 무서워합니다. 기도하는 성도들은 마귀의 궤계를 알아차릴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먼저,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삶의 모든 것에 대하여 기도로써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쉬운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하지 말고 기도로써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는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기도하되 간절하게,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더불어 씨름했던 야곱처럼 끈기 있고 적극적인 자세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기 않기 때문이요”라는 책망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임할 때까지 기도의 줄을 놓지 말고 끝까지 붙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쉬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은 숨 쉬는 것인데, 성경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할 때,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을 뿐 아니라 쉼없이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누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신앙인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자각하고 충성하는 일꾼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서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믿은 지 얼마 되지 아니한 형제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삶에 어려운 문제를 만난 형제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서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 바울은 자기를 비롯한 복음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에베소서를 쓸 당시에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가 옥에 갇힌 것은 무슨 범법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인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일컬어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와 같이 위대한 사도도 자기를 위해 기도를 부탁했다면, 우리와 같은 범인(凡人)은 더 말할나위가 없습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기도하실 때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와 더불어 교회의 직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역장님들을 위해서, 교회학교 선생님들을 위해서, 성가대 지휘자와 반주자, 대원들을 위해서, 남녀 선교회의 임원들을 위해서, 또 찬양단을 위해서 기도로써 후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뿐 아니라, 주일마다 차량으로 봉사하시는 성도님들과 만나실에서 점심을 만들어 대접하는 분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로써 후원할 때 저들이 지치지 아니하고 기쁨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영적 싸움에 나선 그리스도의 군사들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사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 존재인 마귀와 그에게 속한 악한 영들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성도들을 시험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다가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속사람이 시험을 이기고도 남음이 있도록 주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힘쓰심으로, 날마다 마귀를 대적하여 물리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 자 : 김양인 목사

설 교 일 : 08.02.15 (주일예배)

설교제목 : 성도들의 영적 씨름

성경본문 : 에베소서 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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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세계와 영의 세계

“눈이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사람을 사귀고, 책을 읽고, 과학을 탐구하고, 물건을 만들고, 상품을 고르고, 운전을 하고, 경치를 구경하는 이 모든 일을 하는데 눈의 역할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너무 작아서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립자의 세계가 있는가 하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볼 수 없는 우주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대는 전자현미경을 통해서 세포나 박테리아와 같은 미세한 생물체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전자 천체 망원경을 사용해서 수억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우주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현미경이나 망원경이 우리의 육안이 갖고 있는 한계를 크게 뛰어 넘게 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언급한 것이 세계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물질세계에 불과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전자현미경이나 천체 전자망원경을 가지고도 볼 수 없는 세계가 있는데, 그것은 영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시며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히브리서 3장 4절에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되 영이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영적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영적 존재로 지음 받은 사람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몸은 영혼을 담은 그릇과도 같습니다. 몸은 물질로 되어 있지만, 영혼은 물질이 아닙니다. 영혼이 곧 나 자신입니다. 몸은 영혼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달리 말하면, 영혼은 운전수에, 몸은 자동차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자동차라도 운전수가 시동을 걸고 운전을 해야 움직일 수 있듯이, 몸은 영혼의 지시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짐승들을 보면 단지 본능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배가 고프면 먹이를 찾고, 배가 부르면 놀거나 잠을 잡니다. 번식기가 되면 짝을 찾아 새끼를 낳아 기릅니다. 짐승은 이성이 없으므로 학문이나 예술이나 윤리 도덕을 모릅니다. 짐승은 영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성이 있기 때문에 학문과 예술을 하고, 윤리 도덕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종교는 문명인들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지구상에서 가장 미개한 족속도 나름대로의 신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물질세계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영의 세계에도 속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에게는 목이 마르면 물을 찾듯이 영적인 갈망이 있습니다. 

시편 42편을 지은 성도는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갈망을 느낀다고 해서 누구나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허탄한 우상들을 섬깁니다. 이는 저를 낳아주신 부모를 외면하고 전혀 엉뚱한 사람을 부모로 알고 공경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죄로 인해 그 영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서론에서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되어 있다고 했는데, 영혼은 영과 혼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영은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일을 하고, 혼은 우리의 이성과 감성과 의지 등을 관장합니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으로 사람의 영이 죽었습니다. 그 결과, 학문도 하고, 예술도 하고, 철학도 하고, 법과 도덕도 논하지만, 창조주 하나님께 대해서는 깜깜절벽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3장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 구절은 죄로 인해 영이 죽은 인간들의 실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이 죽은 사람은 영적으로 무감각한 상태에 있으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박사라도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거듭남이란?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려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거듭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한번은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에다 유대 최고 종교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의 의원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대해서 박식한 사람으로서 백성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말하기를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의 칭송에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고상한 예술가라도 육에 불과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 앞에 절합니다(사 2:9). 거듭남은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인간적인 방법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성령께서 인간의 죽은 영을 새롭게 살리십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찾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이같이 말씀합니다.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곧 그를 영접한 사람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거듭난 성도의 삶

이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아가되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에 속한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처럼 욕심을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일을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영광을 바라고 살지 말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고전 10:31). 이 같은 삶은 거듭나기 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거듭난 지금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잘 섬기려는 마음의 갈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범죄하고 요나처럼 불순종하는 자신을 봅니다.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시험에 들 때도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한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분도 한 때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고 탄식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패배에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고 드디어 영적 승리를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말하기를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고 했습니다. 사도는 더 이상 욕심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고,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사랑하지도 않았으며,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영적 승리의 비결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기가 경험한 영적 승리의 비결을 성도들에게 말씀해 주었는데, 오늘 봉독한 말씀이 그것입니다. 

“10)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19)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적 씨름이라고 했습니다. ‘씨름’으로 번역한 단어는 실제로는 레슬링을 의미합니다. 레슬링 경기를 보면, 두 선수가 맞붙어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엎치락뒤치락 싸웁니다. 레슬링 경기에서는 순간의 방심이라도 허용했다가는 상대방에게 역습을 당합니다. 힘과 기술과 정신력을 다 갖추어야지 어느 것 하나라도 부족하면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적수는 사람이 아니라 마귀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혈과 육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대적해야 할 적수는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와 그의 수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정세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은 모두 다 악령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천사들 가운데도 천사장을 비롯해서 여러 계급이 있듯이, 마귀의 수하에 있는 악령들도 높고 낮음이 있습니다. 마귀와 악의 영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끼칩니다. 오늘날 인간 세상이 타락하고 죄와 불의가 가득한 것은 이 세상이 마귀의 지배 아래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일컬어 ‘이 세상 임금’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2:31). 

마귀가 임금이 되어서 이 세상을 다스리기 때문에 세상은 점점 더 타락하고 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가 가장 큰 관심을 갖고 힘쓰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마귀는 구원 받은 성도들을 노리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차피 마귀의 백성이므로 가만히 두어도 멸망 길로 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므로 원수로 알고 덤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영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면, 마음에 시험이 다가올 때, 단순하게 아무개 때문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악령이 역사하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궤계

마귀는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기를 좋아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가 끝나갈 무렵에 제자들을 데리시고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여행을 가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하니, 다시 물으시기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시몬 베드로의 대답이 얼마나 예수님의 마음에 들었으면 이처럼 파격적인 축복을 하셨을까요? 그 때로부터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만류하기를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위해서 그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사단 곧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그 순간 사단으로 변했다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배후에서 사단이 역사하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귀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수제자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을 시험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시험했던 사단이 지금도 변함없이 그리스도인들을 시험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기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귀한 권면을 줍니다. “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8-9) 먹잇감을 보고 으르렁 거리는 사자,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마귀를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우리에게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 마귀는 겁을 먹고 물러갑니다. 

 

마귀를 대적하려면 속사람이 강해져야

그러나 우리가 이 같은 권세를 가지고 실제로 악의 영들을 대적하려면, 먼저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합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하신 에베소서 6장 10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레슬링 선수들을 보세요. 얼마나 몸이 튼튼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절로 몸이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수들은 매일 같이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서 몸을 단련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적으로 강건해지려면 성령의 은혜를 힘입어서 신앙의 연단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 집니다. 몸이 건강하면 감기에 잘 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설령 걸렸더라도 금방 낫듯이,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면 시험에 잘 들지 않을 뿐 아니라 혹 시험에 들었더라도 기어코 시험을 이기고 영적 건강을 회복합니다. 

우리는 담대하게 마귀를 대적해서 승리하기 위해 영적으로 강해져야 합니다. 핍박과 환난을 이기려면 마음이 강해져야 합니다. 약해서 작은 시험 앞에서도 맥없이 넘어지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연약한 자가 아니라 강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그리고 우리가 악의 영들을 상대로 싸워 이기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당시 로마 군사들이 입었던 전신갑주를 생각하면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했습니다. 화살이 빗발치듯하고 어디서 칼이 날아들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투구와 갑옷은 필수적인 장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군인들은 항상 튼튼한 띠로 허리를 졸라맵니다. 허리띠를 띠지 않으면 옷이 흘러내려 민첩하게 행동할 수 없습니다. 또 허리띠를 꼭 졸라매야 힘을 쓸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리 위에 서야 담대하게 불의에맞서 나갈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의의 흉배를 붙이라고 했습니다. 흉배는 가슴을 보호하는 장비인데, 성도들이 하나님의 의로 옷입고 의로운 삶을 살아갈 때 마귀가 감히 참소하지 못합니다. 

그 다음,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했습니다. 군인들은 훈련을 하거나 전쟁을 할 때 발이 편하고 질기고 튼튼한 군화를 신습니다. 고무신이나 멋 내는 구두를 신고서 전쟁하러 나가는 군인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귀와 싸우는 성도들은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어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평안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라고 했습니다. 사도 당시에 로마 군인들은 전쟁에 나갈 때 큰 방패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이 방패는 아교로 나무를 이중으로 붙인 것으로서 이것으로 적이 쏘아대는 불화살을 막아냈습니다. 불화살이 방패에 박히면 불이 꺼졌습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방패는 곧 믿음을 말합니다. 마귀는 성도들을 향하여 불화살을 쏘아 댑니다. 의심의 불화살을 막아내려면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 다음,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합니다. 이는 성도들은 언제나 구원의 소망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생각하는 지체입니다. 구원의 소망을 가진 성도는 어떤 시련이나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칼은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무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검으로 사용해서 마귀의 공격을 막아낼 뿐 아니라 마귀를 공격해서 물리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원저자는 사람이 아니고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검이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할 때 마귀가 패하여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읽고 익혀서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는 기도로써 무장하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라고 했습니다.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기도는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최신 무기로 무장했을지라도 전쟁에 나간 군인이 졸고 잔다면 적을 물리치기는커녕 자기 목숨도 지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대에서는 밤낮으로 보초를 세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파수꾼입니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땀이 핏방울처럼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시는 동안에 제자들은 다 쓰러져서 졸며 잤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주님께서 경고하셨건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 날 밤에 모든 제자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으며, 수제자 시몬 역시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패배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마귀는 깨어 기도하는 성도들을 무서워합니다. 기도하는 성도들은 마귀의 궤계를 알아차릴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먼저,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삶의 모든 것에 대하여 기도로써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쉬운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하지 말고 기도로써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는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기도하되 간절하게,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더불어 씨름했던 야곱처럼 끈기 있고 적극적인 자세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기 않기 때문이요”라는 책망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임할 때까지 기도의 줄을 놓지 말고 끝까지 붙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쉬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은 숨 쉬는 것인데, 성경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할 때,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을 뿐 아니라 쉼없이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누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신앙인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자각하고 충성하는 일꾼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서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믿은 지 얼마 되지 아니한 형제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삶에 어려운 문제를 만난 형제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서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 바울은 자기를 비롯한 복음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에베소서를 쓸 당시에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가 옥에 갇힌 것은 무슨 범법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인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일컬어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와 같이 위대한 사도도 자기를 위해 기도를 부탁했다면, 우리와 같은 범인(凡人)은 더 말할나위가 없습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기도하실 때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와 더불어 교회의 직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역장님들을 위해서, 교회학교 선생님들을 위해서, 성가대 지휘자와 반주자, 대원들을 위해서, 남녀 선교회의 임원들을 위해서, 또 찬양단을 위해서 기도로써 후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뿐 아니라, 주일마다 차량으로 봉사하시는 성도님들과 만나실에서 점심을 만들어 대접하는 분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로써 후원할 때 저들이 지치지 아니하고 기쁨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영적 싸움에 나선 그리스도의 군사들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사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 존재인 마귀와 그에게 속한 악한 영들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성도들을 시험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다가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속사람이 시험을 이기고도 남음이 있도록 주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힘쓰심으로, 날마다 마귀를 대적하여 물리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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