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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는 교회 (히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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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는    
 
 
오늘은 제가 아주, 아주 좋아하는 날입니다. 정식으로 나이를 먹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드이어 오늘 저는 제가 좋아하는 나이를 또 한 살 더 먹게 되었습니다.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이제껏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니 제일 마음에 와 닿는 것이, 목사로서 상투적인 말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라는 말씀이 그렇게 마음에 와 닿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느껴지는 날 제 마음 속에 떠오르는 성경 구절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의 말씀이었습니다. 제 삶을 부요케하고 건강하게 하고 부족하지만 아름답게 한 것은 물질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적인 명예와 자랑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진리였습니다. 살아오면서 깨달았던 진리들이 나의 삶을 복되게 하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인생을 복되게 한 제법 적지 않은 진리들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몇 가지만 예를 든다면,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고백하고 인정하면 천국의 열쇠를 주시고 자녀의 권세를 누리게 해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한 요한복음 1:12-13의 말씀(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과 마태복음 16:13-20의 말씀(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내가 네게 천국 열쇠를 주리니...)과 먼저 할 것과 나중할 것과 같은 삶의 우선순위를 가르쳐 준 마태복음 6:33절(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여 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제 삶의 철학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삶을 살려고 부족하지만 제 자신과 늘 싸우고 있습니다. 돈과 싸우고 자리와 싸웁니다. 패배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싸우려고 애 쓰는 모습만으로 받은 복이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것들을 먼저 하려고 하였습니다. 원죄적인 본능을 거스려 삶의 우선순위와 식을 바꿔보려고 부족하지만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를 이해해 주시는 분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옳던 그르던 간에 제가 나름대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까닭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을 제가 진리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훌륭한 사람을 만나게 하심으로 진리를 깨닫게도 해 주셨습니다. 많은 분들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제게 제일 큰 영향을 끼치신 분은 임택진 목사님이십니다. 목사님을 생각하면 많은 것이 생각나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생각이 많이 나는 것은 ‘나는 소 시장의 소가 아니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큰 교회의 청빙을 받아 교회를 떠나시려는 목사님에게 교회의 장로님이 큰 교회에 가시면 생활비를 더 받으시기 때문에 그러십니까? 우리도 다음 달부터 생활비를 올려 드릴 터이니 가시지 말라고 하셨을 때 그 장로님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소 시장에 묶어 놓은 소는 부르는 사람에 따라 값이 올라도 가고 내려도 가지만 나는 소 시장의 소가 아닙니다.’

저는 돈에 초연한 사람도 아니고, 청빈한 삶에 대한 욕심과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최소한 소 시장의 소 노릇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때 그 말씀을 하시는 목사님께 감동하여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산 것 때문에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양재동 어느 미션스쿨의 중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어느 날 들었던 ‘나는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 되려고 힘씁니다.’는 말씀도 제 삶을 자유케 한 진리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안식년을 가고, 팀목회를 하여 목회적 권한은 분산시키고, 교회를 넷으로 분립하여 후배들에게 교회를 맡기는 일들의 뿌리에는 ‘있으나 마나한 사람’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감동이 있습니다.

청량리 중앙교회에서 헌금을 제일 많이 하시는 장로님에게 들었던 ‘연보를 많이 하든지 말을 많이 하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해야지 둘 다 다 많이 하면 못씁니다.’는 말씀도 저를 자유케 한 기가 막힌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제법 큰 교회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이곳 저곳에 제법 적지 않은 후원금을 보냅니다. 적지 않은 후원금을 보낸 곳에는 가급적인 제가 참여하지 않습니다. 회의에 일부러 참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여해도 가급적 말을 삼갑니다. 흉내만 내며 살아도 그 때문에 누리는 자유함은 말도 못합니다.

도덕경이라고 하는 책을 통하여 만난 노자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 중 가장 제게 감동을 주고 영향을 끼친 말 중에 하나는 ‘공을 세웠다고 내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내 것이라고 하지 않음으로 구태여 머물려 하지 않는다. 구태여 머물려 하지 않음으로 구태여 떠나려 하지도 않는다.’입니다. 부족하지만 높은 뜻 숭의교회를 해체하고 담임목사 자리에서 별로 어렵지 않게 내려올 수 있었던 까닭은 ‘공을 세웠다고 내 것이라 하지 않는다. 내 것이라 하지 않음으로 구태여 머물려 하지 않는다.’는 도덕경의 글을 제가 정말로 좋아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내려왔으면 네 교회도 순회하지 말고 완전히 교회를 떠나야지 구질구질하게 그게 뭐냐고 뭐라고 그러는 분들도 있지만 제가 높은 뜻 교회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까닭은 무슨 자리에 욕심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구태여 머물려하지 않음으로 구태여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을 제가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제 삶에 큰 영향을 끼쳤던 글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20대 초반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읽었던 짧은 글입니다. 수천 마리 씩 떼를 지어 다니다가 이유 없는 달리기를 시작하고 결국은 벼랑에 떨어져 몰사를 한다는 스프링 폭스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수 천 마리가 이동을 하니 뒤에 있는 양이 먹을 풀이 없어서 본능적으로 앞으로 가려고 한답니다. 그러다보니 앞의 양을 자꾸 밀게 되고 앞의 양은 뒤의 양에게 밀리다가 어느 순간 뛰게 된다는 것입니다. 양은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본능이 있는 동물입니다. 앞의 양이 뛰게 되면 뒤의 양은 덩달아 뜁니다. 떼에서 이탈되지 않으려는 본능 때문입니다. 앞의 양은 뒤의 양이 미니까 뛰고 뒤의 양은 앞의 양이 뛰니까 따라 뛰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지만 양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러다가 벼랑을 만나면 모두가 떨어져 몰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청년 때 그 글을 읽으면서 스프링 폭스 양의 모습이 우리 인간의 모습과 꼭 닮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어디로 뛰는지도 모르고, 왜 뛰는지도 모르고 그냥 사람들이 뛰니까 따라 뛰는 동물적인 본능이 우리 인간에게도 강합니다. 

어느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아파트 7채 장만한 직장인, 내 집 마련 노하우’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습니다. 열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틀림없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제목을 보고 그 글을 열어 보았을 것입니다. 저는 그 제목을 보면서 ‘아파트를 왜 7채나 장만해?’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몇 년 전 10억 모으기 열풍이 불었었습니다. 텔레비전에 10억 모으기에 도전한 30대 초반의 주부가 소개되었습니다. 얼마나 억척스럽게 돈을 절약하고 모으는지 정말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였습니다. 한 달에 7천 원 정도 들어가는 쓰레기 봉투를 사지 않고 그 돈을 절약하려고 쓰레기를 들고 나가 다 차지 않은 쓰레기 봉투를 찾아 거기에 자기 쓰레기를 버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저 여자는 10억 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텔레비전 아나운서가 왜 10 억 원을 모으려고 하는가를 물었습니다. 정원 딸린 집을 사려고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여자가 결국 그 소원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소원은 이루어도 정원 딸린 10억 짜리 집에서 행복하게 살겠다는 소원은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집에 살아도 그 사람은 행복하지 못할 겁니다. 정원 딸린 집이 우리를 무한정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고 10억 원을 모으기 위하여 극단적으로 왜곡된 삶의 자세가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집을 산 후에도 쓰레기를 들고 남의 쓰레기 봉투를 평생 뒤지며 살 것이 거의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아파트, 아파트 하고 정원 딸린 집, 정원 딸린 집 하니까 그래야만 되는 줄 알고 스프링 폭스 양과 같이 그냥 뛰는 것입니다. 그 끝이 행복인지 불행인지 묻지도 않고, 생명인지 사망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따라 뛰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일생은 그냥 죽어라고 뛰는 삶 같아 보입니다. 죽어라 공부하고, 죽어라 경쟁하고, 죽어라고 돈을 법니다. 죽어라고 공부하고 돈을 벌고 죽기 살기로 경쟁을 하는 이유를 종합해 보면 결국 아파는 7채 장만과 정원 딸린 집 장만입니다. 아파트와 정원 딸린 집이 필요 없는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지만 제 이야기는 그것이 과연 그렇게 평생 우리가 목숨을 걸고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3절의 말씀이 좋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욕심을 내고 열광을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것을 있게 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았던 믿음의 선진들은 우리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만 연연하여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있게 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믿는 믿음에 욕심을 내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중에 정말 기가 막힌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1절의 말씀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을 욕심내어 그것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들은 말씀과 그 말씀에 대한 믿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 세상에만 욕심이 있어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우습게 여기며 삽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에게 ‘실상’은 없습니다. ‘증거’는 없습니다. 저들의 삶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시편 1편) 저들의 삶은 풀과 같습니다. (시편 92편) 모양은 같으나 속은 텅빈 겨와 같고 자라기는 빨리 잘 자라는 것 같으나 얼마가지 않아 시들어 버리는 풀과 같아 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조차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을 좇아 사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아서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상과 증거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성공적으로 산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좇아 산 다윗은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관심은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깊이 숨어있는 욕심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궁극적인 관심과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욕심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의 관심과 욕심도 정리하자면 아파트 7채와 정원 딸린 집인 것입니까?

여러분 그렇게 살면 바보 됩니다. 그렇게 살면 죽습니다. 망합니다. 행복할 수 없습니다. 스프링 폭스처럼 그냥 죽을 때까지 달리다가 벼랑에 떨어져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공부하는 목적, 돈 버는 목적, 성공하려고 하는 목적을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그 목적을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욕심을 채우기 위함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과 믿음에 대한 욕심을 채우기 위함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욕심을 채워 드리기 위하여 공부하면 어떻겠습니까? 돈을 벌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정말 그렇게 살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삶의 아름다운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히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삶이 아름다워지지 않겠습니까? 행복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려고 고집하다가 교회가 분립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좀 힘들어도 좋다. 손해를 좀 보아도 좋다. 우리는 우리 교회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더 먼저이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눅 9:62)

그 원칙을 따라 고집을 부리고 교회까지 분립하였습니다. 손해 볼 줄 알았는데, 힘들어질 줄 알았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오히려 더 부흥하고 성장하게 되었고, 교회는 더 건강하고 은혜스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숨어 있는 사탄의 함정이 있습니다. 교회가 은혜스러워지다 보니 교인들이 우리 본래의 목적이었던 보이지 않는 성전을 점점 잊는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바꾸는 것입니다.

높은 뜻 광성교회, 높은 뜻 푸른 교회, 높은 뜻 하늘 교회, 높은 뜻 푸른 교회를 세워가는 일이 너무 재미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을 잠시 잊고 뒤로 미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벨은 믿음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다가 죽었습니다. 우리도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만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을 고집하다가 죽을 수도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먼저여서는 안 됩니다. 탈북자가 먼저이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섬기려고 하는 가난한 이웃들이 먼저이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쓰고 남은 돈으로 저들을 섬기면 안 됩니다. 저들을 먼저 섬기고 남은 돈으로 우리가 쓰는 것이 옳습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우리 후손들에게 믿음의 선진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높은 뜻 푸른 교회가 정식으로 분립감사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높은 뜻 푸른 교회의 독립기념일이 되는 날입니다. 높은 뜻 푸른 교회를 정식으로 시작하는 이 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높은 뜻 푸른 교회를 잊으시기 바랍니다. 보다 큰, 너무 커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를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높은 뜻 푸른 교회의 제 일 가는 사명이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는 것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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