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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준비한 빈 그릇 (왕하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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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한 빈 그릇 (왕하 4:1~7)


여러분,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여러분들의 건강, 연령, 재정상태, 가족관계, 사업의 모습 등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볼 때 내 향후 10년이 희망적인지 아니면 절망적인지 생각 해 봅시다. 여러분의 앞날이 가정의 여러 가지 문제로 혹은 사업의 어려움으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 같은 어둠과 절망 그 자체 일 수도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미래의 삶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지 말입니다.베스트셀러가 된 공병호 씨가 쓴 “10년 후, 한국“이라는 책에 보면 한국 사회가 변화 없이 이대로 간다면 10년 후에는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미국 라이스대학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은 경제학자입니다. 30여권의 저서 가운데 최근에 펴낸 책이 「10년 후 한국」이라는 책입니다. 100년 후 한국이라고 하지 않고 10년 후 한국이라고 책 제목을 잡은 것부터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역사는 빠른 템포로 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10년 안에 한국이 잘 사느냐 못 사느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짤막짤막하게 구성된 그의 글을 읽으면서 세상 보는 눈이 정확한데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요인 중에 하나가 한국인이 위기를 극복할만한 정신세계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할 방법이 없다는 것은 절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 교회, 가정에도 문제는 없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풀어나갈 사고와 태도가 없을 때 반드시 심각한 문제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풀어갈 방법을 아는 사람들에겐 새로운 변화와 도약의 기회가 됩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를 바꿀만한 그런 원리를 알고 있습니까? 또 정말 여러분이 생각한 자신의 미래모습이 바른 기준에 의해서 세워졌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함께 나누시길 바랍니다.

신학을 공부하던 신학생이 아내와 두 아들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갚기 어려운 거액의 빚도 함께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의 장례를 치루고 얼마 지난 어느 날 빚쟁이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당신 남편이 살아서 진 빚을 갚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어날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빚을 갚을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빚은 갚아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국가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빚이 많으면 헤어나기가 어렵습니다. 둘째는 빚을 갚지 못할 경우 두 아들을 종으로 내줘야했습니다. 그것을 채권자가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법은 빚을 직접 갚지 못하면 빚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내줘야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짐작컨대 남편생전에 이런 일, 저런 일로 빚을 졌고 남편이 세상을 떠난데다 채권자는 두 아들을 빚을 대신해 데려다가 종을 삼겠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문제를 만난 것입니다. 어떻게 문제를 풀었는가?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 엘리사에게 부르짖었습니다. 1절을 보면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라고 했습니다. 남편 죽고 빚만 남고 두 아들을 빼앗기게 된 절박한 상황 앞에서 그녀가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부정적인 태도가 있습니다. 세상을 원망하고 현실을 비관하고 종으로 자식들이 끌려가는 꼴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함께 죽는 게 났다며 집단 자살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악을 쓰고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느냐며 죽어도 빚은 못 갚는다. 

내 자식 빼앗아가려면 나 먼저 죽이라고 시위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어느 날 깊은 밤, 바람과 함께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리는 방법도 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엘리사는 그 당시 신학교 교장이었고 기적과 능력을 행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녀가 엘리사를 찾아간 것은 사람의 방법을 찾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을 찾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이럴 때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방법은 어떤 것인가를 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기도라고 말합니다. 시편 50:15을 보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38:11 이하를 보면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친척들도 멀리 떠나고 앞에는 올무가 가로 놓여있고 나를 해하려는 자들이 하루 종일 나를 괴롭히고 근심과 걱정이 나를 누르고 있다”고 실토했습니다. 

그리고 38:21-22을 보면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윗도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을 향해 기도했고 하나님의 방법을 찾았습니다. 시편55:22을 보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여인은 엘리사를 찾아와 자신이 당한 입장을 다 털어놓고 울부짖었습니다. 소리쳐 일이 해결된다면 소리쳐야 합니다. 울부짖어 문제가 해결된다면 침묵할 이유가 없습니다. 소리 높혀 기도해서 두 아들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세 가지 덫에 걸려 있습니다. 그것은 체면, 자존심, 전통이라는 덫입니다. 그러나 세 가지, 아니라 열 가지라도 팽개치고 문제가 해결된다면 안할 이유가 없습니다. 2.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2절을 보면 울부짖는 그녀에게 엘리사가 물었습니다. “네 집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그녀의 대답은 “기름 한 병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였습니다. 
이 정도면 가난도 상가난입니다. 제아무리 최고급 올리브 기름이라고 해도 요즘 값으로 3만원을 넘지 않습니다. 세 식구가 가진 재산 목록은 기름 한 병이 다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부터입니다. 3-4절을 보면 “밖에 나가 이웃들에게서 빈 그릇을 빌려라 조금 빌리지 말고 많이 빌려라. 그리고 제 두 아들과 함께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름을 부어 빈 그릇을 채워라 그리고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고 했습니다. 얼핏 보면 이 장면은 동네 아이들 소꿉장난과 같습니다. 

그런데 5절을 보면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 아들들은 그릇을 가져오고 그 여인은 기름을 붓기 시작했습니다. 6절을 보면 신기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기름이 그릇마다 가득 찼습니다. 더 이상 부을 그릇이 없게 되자 기름병에서 기름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7절을 보면 “가서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병 속에서 계속 기름이 나올 수 있느냐 그것도 한 두 병도 아니고 수십병, 수백병이 나올 수 있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관사항입니다. 그녀가 걱정하고 염려할 일은 아닙니다. 누가 문제를 풉니까?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우리의 이성의 잣대를 가지고는 이해 안 되는 부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때를 따라 도우시는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의 결핍을 채워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생들이 저 잘났다고 기고만장할 때에 하나님은 잠잠하십니다. 인생들이 저 혼자서도 능히 다 해 갈 것이라고 큰소리 칠 때에 하나님은 조용히 물러서 계십니다. 그러나 인생의 위기에 몰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어 자신들의 재주나 실력을 포기하고, 두 손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 도우심을 구할 때, 하나님은 막다른 골목에서 구원의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언제 홍해가 갈라졌습니까?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왼편에는 국경수비대가 버티고 있고, 오른편에는 가파른 절벽이 그리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던 그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위해 홍해를 가르셨던 것입니다. 언제 반석에서 생수가 터졌습니까? 광야 한복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말라 죽을 수밖에 없다고 포기한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언제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던 절박한 순간이었습니다. 위기가 없으면 기적도 없습니다. 우리 인생들의 위기는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날 기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기를 만날 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을 것 같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해도 낙심하지 말고 너무 쉽게 포기하시도 마십시오. 바로 지금이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날 때임을 기억하고 절박한 순간에 하나님의 사람을 찾았던 여인처럼 항상 여러분을 돕기를 기뻐하시며, 기꺼이 여러분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십시오.

여러분, 이아침!! 묻습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축복하시기 위해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던지시고, 그 피를 쏟고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너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노라. 나는 내 생명보다 너를 더 사랑하노라. 십자가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 없이 너를 사랑하노라." 그리고 그 사랑을 아낌없이 우리 각자에게 쏟아 부어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거나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뉴욕의 유명한 풋볼 팀 중에 뉴욕 자이언츠가 있는데 2001년 슈퍼볼에서 우승했습니다. 그 팀의 감독은 미국에서 잘 알려진 짐 파셀입니다. 어느 날 ,그가 tv에 나와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믿음의 불씨를 던진 것입니다. 짐 파셀은 미국 사람에겐 영웅입니다. 유명한 감독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에게도 아픔이 있었습니다. 1967년, 그가 대학교 1학년 때 지금의 아내 키티를 만납니다. 그리고 둘이 불장난을 저지르고, 그 결과로 2학년 때 아이를 낳게 됩니다. 

부모님들은 모두 반대를 했고, 주위 시선이 곱지 않았습니다. 건강한 남자 아이를 낳았지만, 3개월 후에 하는 수 없이 입양을 시키고 맙니다. 콜로라도 주에서 입양을 시켰는데, 그 당시 콜로라도 주의 법에 의하면, 친 부모가 아이를 추적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만나보지도 못하고, 정보를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들은 32년 동안의 결혼 생활을 통해 슬하에 네 자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짐은 미국의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 아픔이 있었습니다. 멀리 떠나보냈던 첫 아들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내는 날마다 첫 아이를 생각하며 눈시울을 적십니다. 그 아들이 어디 있을까?

짐 파셀이 스타가 되어서 풋볼을 즐기고 있는 동안,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마음의 허전함을 채우지 못해서 풋볼에 중독된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의 이름은 존 이었습니다. 그는 풋볼에 미쳤어요.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고통을 달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부모는 누구일까?” 자신을 데리고 온 부모가 자신에게 따뜻한 사랑을 주었지만, 마음속에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왜 아버지는 나를 버렸을까? 내 어머니는 누구일까?” 그래서 그는 더욱 스포츠에 집착을 했습니다. 자신이 뉴욕에 태어났기 때문에 뉴욕 자이언츠 팀을 응원했습니다. 미국 아이들은 풋볼에 한 번 빠지면 굉장합니다. 풋볼 한번 관람하는데 200-300불이 보통입니다. 우리 돈으로 30-40만원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1년에 100만달러 우리 돈으로 140억 원을 들여서 가장 좋은 좌석을 차지해서 풋볼 경기를 관람합니다.

이 소년 역시 미쳤습니다. 그러다가 나도 저런 감독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유명한 감독 짐 파셀에게 반해 버립니다. 어째든 짐 파셀은 그에게 영웅이었어요. 2001년도에 이 뉴욕 자이언츠 팀이 예선 성적이 너무 안 좋아서 한 경기만 져도 결승에 진출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렸습니다. 기자들이 인터뷰를 요청하지, 짐 파셀이 나와서 담대하게 “우리는 반드시 결승에 올라갑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거기에 모인 기자들은 아무도 그이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존은 그 인터뷰 장면을 보면서 더욱 파셀 감독을 흠모하게 됩니다. 그의 기대에 보답이라도 하듯 2001년도에 뉴욕 자이언츠가 슈퍼볼에서 우승했습니다.

그런데 2002년 콜로라도 주의 법이 양자로 보낸 아이를 만나 볼 수 있도록 바뀝니다. 2003년 어머니 날, 존은 누군가의 전화를 받게 됩니다. 이때 그의 나이 34살이었습니다. “여보세요? 나 뉴욕 자이언츠의 짐 파셀이요” 그가 느꼈을 감격을 생각해 보세요. 스타가 자기에게 왜 전화를 했을까? “존이 맞나요?” “네, 맞았요.” 그리고 아무 말이 없어요.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미안하다, 내가 바로 네 아버지야.” 이렇게 해서 그들이 상봉을 합니다. 그 상봉 장면을 신문과 tv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그 날 존의 감격이 어떠했을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사 43:1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이 얼마나 섬세하고 또 정확한지 모릅니다. 우리의 문제는 그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어차피 문제는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대하고 해석하고 푸는 방법은 같지 않습니다. 제 신앙과 철학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문제를 문제시하면 문제가 되고 문제를 문제시하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회사가 문을 닫게 되고 사건이 터지기 일보전인데 어떻게 아무문제도 없는 것처럼 문제시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가능합니다. 본문의 그 여인의 위대한 신앙은 자신이 문제를 풀기 위해 고민하고 연구하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밤을 지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처음엔 고민했을 것입니다.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봐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철부지처럼 엘리사를 찾아가 부르짖었고 하라는 대로하기로 태도를 전환한 것입니다. 머리 싸맨다고 해결이 됩니까? 밤새도록 잠 안자고 고민한다고 풀립니까? 마태복음 5:23에서 주님은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 할 수 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문제를 쉽게 풀 수 있습니까? 첫째 사고를 전환해야 합니다. 내 것이다. 내가 지켜야 한다. 내가 하면 된다는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지킬 수 없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다. 하나님 것이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해결하셔야 된다는 사고로 전환해야 합니다. 내것이다라고 생각하면 뜬 눈으로 밤을 지새도 불안합니다. 걱정으로 한숨을 쉬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다라는 사고로 전환을 하면 밤을 새워도 기쁘고 편안해집니다. 왜냐면 걱정대신 기도하며 밤을 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건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내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여인의 경우 빈그 릇을 빌리라고 했을 때 반신반의 하거나 농담으로 받아드려 빈병을 하나정도 빌렸다면 밀가루 떡 몇 개 튀겨 먹을 수 있는 기름만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흐름으로 미루어 볼 때 그녀는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며 빈병이며 빈 그릇을 몽땅 빌린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단순한 순종과 믿음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소리내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십니다. 시편 66:19을 보면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소리에 주의하셨도다”라고 했고, 20절에서는 “저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살이는 이처럼 힘겹고 팍팍하기만 합니다. 한 발자국만 더 나가면 혹시라도 살아날 희망 찾을 수 있을까? 하고 이곳저곳을 두리번 거려보지만 그 한 걸음마저 내딛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주변에 얼마나 장애물이 많은지 모릅니다. 주변 어디를 돌아봐도 절망을 이길 한 줄기 빛은 보이지 않는 듯 삶의 발걸음은 자꾸만 절망의 나락으로 달려갑니다. 그렇게도 우리를 옥죄는 경제가 절망이고, 경제가 메마른 탓인지 사회가 사랑과 용서의 메말라 가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런 환경과 문제 앞에서 너무 쉽게 절망합니다. 우리는 너무 손쉽게 포기합니다.

우리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희망의 불씨를 꺼뜨려 버립니다. 그리고는 길고 긴 변명의 이야기에 자신을 내어맡겨 버립니다. 절망하는 일에 너무 익숙해져 절망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지 않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존 웨슬리가 말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것을,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한 모든 장소에서,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그렇습니다. 할 수 있는 한 해봅시다. 할 수만 있다면 최고는 아니어도 최선의 달음박질은 해봅시다.

여러분, 저 이 집회를 하려고 한 주간, 안성에 있는 사랑의 수양관에 갔습니다. 사실 갈 때는 제가 너무 일에 집중하다 보니 몸에 무리가 왔습니다. 지난 금요일날에 선배 목사님을 찾았는데 저를 보자마자 첫 마디가 "아니 얼굴이 왜 그렇게 되었느냐"고 합니다. 5년 만에 만난 선배인데 저의 이야기를 듣자, "그렇게 목회하면, 자네 병들면 누가 챙겨 주겠냐?" 는 것입니다.

오면서 마음이 무겁더라구요. 그래서 한 주간 가서 짐이나 푹 자고 잘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화요일부터 하나님이 금식을 시킵니다. 여러분도 저를 잘 알잖아요. 저 금식 못합니다. 제가 어떤 사람이냐면, 소화가 안 되면, 소화제를 먹는 게 아니라 라면을 끓여 밥 한사발 먹으면 그 순간 따 뚫립니다. 그런 나에게 금식은 죽는 것 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힘은 들지만, 엘리야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여기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오늘 저녁부터 우리는 부흥회를 합니다. 부흥이란 말을 사전에서는 "쇠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남, 또는 다시 일어나게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흥이란 "다시 일어난다"는 뜻으로 침체되었던 것들이 새롭게 살아나고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영어의 revival이란 말도 '다시'라는 말과 '산다'는 말이 합쳐져서 '다시 살아나다' '소생한다' '활기를 되찾는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나는 이번 부흥회가 여러분의 삶이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무엇보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또 그 분 앞에 나의 인생을 어떻게 드려야하는가 하는 사명의 회복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도록 여러분의 마음의 빈 그릇을 가지고 나와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시간, 시간 마다 여러분의 그릇에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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