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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자 사명의 회복 (딤후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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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 사명의 회복 (딤후 4:1~8)


10년 전에 제가 케나다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캐나다에 가면 록키산을 한 번씩 관광을 하는데 그 록키산을 오르는 길목에 보니 표지판이 곳곳에 붙어 있습니다. ‘짐승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이드에게 왜 짐승에게 먹이를 주면 안 되냐고 물어봤더니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짐승들에게 과자도 던져주고 초콜릿도 던져주고 하니까 이 짐승들이 비만에 걸렸습니다. 또 스스로 먹이를 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던져주는 것만 먹어도 충분하니까 스스로 먹이를 찾아 헤매지 않습니다. 그래서 먹이를 찾지 못해 관광객이 끊기게 되면 굶어죽는 일이 속출합니다. 

산양의 예를 들면 몸이 날씬할 때는 절벽도 잘 뛰어올랐는데 몸이 비둔해지니까 절벽을 오르지 못합니다. 먹이를 구할 수 없고, 다른 짐승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그 짐승들이 점점 멸종되어 가고 쇠퇴하기 때문에 먹이를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짐승의 야성을 생각할 때 기독교의 야성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초대교회의 기독교는 적어도 복음의 야성이 있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인 사도바울이나 베드로는 참으로 복음을 위해서 순교할 각오를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순교는커녕 안일과 나태에 빠지기 쉬운 환경에 처해있습니다. 점점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는 거리가 먼 우리가 돼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주일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평안한 마음을 안고 돌아가면 ‘내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 기독교의 복음의 야성을 잃어갈 때 우리의 사명을 상실해 간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사명이 있습니다.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우리는 사랑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또 한 가지는 전도의 사명이 있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하라”고 우리에게 분명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복음의 사명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아니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전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마음의 부담도 받지 않는다면 이것은 더 큰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위기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생각에 세뇌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생각일까요? ‘굳이 복음을 안 전해도 하나님이 구원하려고 예정한 사람은 반듯이 구원하신다.’ ‘전도 안 해도 어떻게든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원하지 않겠느냐?’하는 생각에 빠져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는 ‘전도보다는 선한 행실이나 착한 인격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 아무리 입으로 복음을 전해도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만 하나님이 복음이 더 증거되지 않느냐?’는 생각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바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을 중단하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닌 것입니다.

‘타종교도 많은데 왜 꼭 기독교만을 강요해야 하느냐?’ 이런 잘못된 생각에 빠져있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아무리 전도해도 나는 전도가 안 되더라.’ 이래서 포기하는 살아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예수님의 피 묻은 복음을 통해서 오늘도 영혼을 구원하고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절 이하에 보니까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사도바울은 담대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못 박힌 그리스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전해야할 복음의 본질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보니까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받을 만한 이름이 없다는데 에 복음 증거의 필연성이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없이는 우리는 한 영혼도 구원할 수 없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은 임종을 앞둔 사도바울이 그의 영적 아들이요, 사랑하는 제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의 한 부분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임종을 앞두고 있다면 허튼 소리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시한 농담은 하지 않겠죠? 정말 자기가 반드시 꼭 해야 하는 가장 뼈있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오늘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2절을 읽어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오늘 바울은 1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 앞과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라고 말합니다. 복음전파에 명령을 오늘 디모데에게 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항상 힘써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전도에 항상 힘써야 할까요?

첫째로 전도는 목숨을 걸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주님의 엄격한 명령입니다.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아니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전도였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0절에 보니까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한가지입니다. 읽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전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성경을 연구해보고 얻은 결론은 하나입니다. 성경은 교양서적도 아니고, 철학서적도 아닙니다. 소설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는 전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이 전도라면 당연히 우리의 사명도 전도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보니까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오늘 사도바울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는 자기의 생명도 언제든지 내어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명이란 무엇입니까? 내 생명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아니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십니까? 무엇을 위해 살아가십니까? 무엇 때문에 직장에 나가십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명령이요, 우리를 보내신 주님의 계획과 섭리가 우리의 사명인 전도입니다.

아주 돈 많은 백만장자 사업가가 아프리카를 여행하다가 여자선교사를 한 사람 만났습니다. 아주 호리호리한 선교사님이 어딘가를 가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디를 가고 있습니까?” 그랬더니 그는 말합니다. “예, 이 아프리카 나환자촌에 복음을 증거하러 가고 있습니다.” 부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나 같으면 백만 불을 준다고 해도 그런 곳에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여자 선교사가 또 말합니다. “저 역시 그 정도의 돈을 받고는 가지 않습니다.” 이 부자가 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그래요? 그럼 선교사님은 얼마나 많이 받고 나환자촌에 가시는 거예요?” 선교사님이 십자가 목걸이를 보여주면서 “돈을 받고 가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 분이 제게 가라고 명령을 해서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나환자촌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기에 나는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여자선교사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이 땅에 교회가 있어야할 이유는 바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성도됨은 복음 증거에 있는 것입니다. 불은 타야 불인 것입니다. 타지 않는 불이 뭐에 쓰겠습니까? 교회는 복음을 증거할 때 교회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상대성의 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노벨상도 받았습니다만 그는 원래 유태인입니다. 1952년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놀라운 제의를 받았습니다. 우리 이스라엘 구회는 만장일치로 당신을 이스라엘 대통령으로 추대했습니다. 오셔서 우리의 대통령이 되어 주십시오. 과학자 아인슈타인에게 이런 공문을 보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대통령을 하겠다는 세상에 많지만, 물리학을 가리킬 사람은 적습니다. 그는 그것을 사명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어떤 제물이나 명예나 어떤 가치 있는 것들로도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는 전도의 사명이 주어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왜 전도에 항상 힘써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보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영혼이 구원받는 것을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십니다. 70인의 제자들을 훈련하셔서 그들을 파송하셨는데 그들이 돌아와서 많은 영혼을 구워했다고 보고할 때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영혼이 구원받을 때 주님의 기쁨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에게 기쁨을 드리려면 우리가 오늘도 한 영혼에게 복음을 증거할 때 주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큰 건물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수많은 악기를 동원해서 하나님 앞에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늘도 그것이 초라한 교회이든, 화려한 교회이든 영혼이 구원받는데 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관심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심방을 구역별로 하는데 교인들의 관심은 어디 있었을까요? 목사님의 젓가락이 어떤 음식에 가는가? 1구역을 심방해서 점심때가 되어서 점심을 먹는데 목사님의 젓가락이 꽁치에 많이 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주에 2구역에 심방을 갔는데 여지없이 생선이 가득히 나왔습니다. “목사님이 꽁치를 좋아하신다면서요?” 교인들의 관심은 목사님의 젓가락이 어떤 음식에 가느냐에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젓가락이 어디에 있느냐를 알아봐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을까?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 사무실에 전화가 한 통 걸려왔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이 사무원이 전화를 받으니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기 어느 교회이죠? 우두머리 돼지 좀 바꿔주세요.” 사무원이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바꿔드릴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을 바꿔주세요.’라고 겸손히 말씀하시지 않으면 제가 바꿔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상관없어요. 나는 지금 그 교회에 만 불을 헌금하려고 하는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무원이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네! 돼지가 이제 막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우리의 관심이 서로 다르다면 이것은 비극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영원히 구원받는 데에 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은 돈에 있고, 물질에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타이타닉호가 그 차가운 바다에서 침몰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4년 후에 그 타이타닉 호에서 침몰될 때 빠졌지만 구사일생 살았던 젊은이기 간증을 했습니다. 그는 이런 간증을 했답니다. 제가 그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뭇조각 하나를 붙들고 겨우 표류하고 있을 때 제 옆에 유명한 존 하퍼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죽음의 순간에 저를 향해 물으셨습니다. 
“젊은이! 자네 예수를 믿는가?” 
“아니, 안 믿는데요.” 
“안 돼. 예수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어.” 

그러고서 존 하퍼드 목사님은 견디지 못하고 물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그 분은 고개를 내 밀더니 “여보게!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나?” 소리쳤습니다. 그리곤 물속으로 들어갔는데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구사일생 구출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목사님의 마지막 말이 뇌리에 떠나지 않아서 예수를 믿고 지금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존 하퍼드 목사님의 마지막 전도 받은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여러분! 존 하퍼드 목사님의 생애는 전도하는 생애였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을 그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그의 사명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어른들에게 꼭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자녀들 가운데, 친척들 가운데, 형제들 가운데 예수 믿지 않는 분들 있으면 여러분 마지막 임종 순간에 꼭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저희 교회 집사님 부부가 있는데 부인은 교회를 나오고 남편은 안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이 돌아가시면서 아들 손을 꼭 잡고 
“얘야! 내 마지막 소원 꼭 들어줘야 한다.” 
“뭔데요?” 
“네가 예수 잘 믿고 봉사하는 거야.” 

그래서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그 아드님이 얼마나 교회를 잘 나오고 집사님이 되고, 얼마나 찬양도 열심히 하는지 모릅니다. 마지막 어머님이 주신 그 유언 한마디가 아들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영원구원이며 전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언제 갑자기 돌아가실지 모르면 미리 유언을 녹음해 두세요. “혹 내가 갑자기 가면 이것을 틀어서 자녀들에게 들려주어라.” 그 마지막 유언이 무엇입니까? “예수 잘 믿고 훌륭한 충성된 일꾼들 되어라. 그리고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이런 말을 하셔야지, 숨이 가뿐데 “저기 있는 시골 땅은 누가 갖냐? 집은 또 누가 갖냐? 싸우지 말고 잘 나눠가져라!” 이런 말 하시겠습니까? 그런 것은 미리 다 정리해 놓으시고 “예수 잘 믿고 멋지게 살다가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이야기 하십시오. 얼마나 멋있습니까? 영혼 구원 받는 것을 주님은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왜 전도에 우리는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할까요? 전도는 타인을 유익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웃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바로 전도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물질도 줄 수 있고, 사랑도 나눠줄 수 있고, 그를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최고의 선물은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지옥 갈 영혼을 천국으로 옮겨놓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면 우린 심판의 자리에 서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보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그는 심판이 없습니다. 그는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아닙니까? 이 땅에서 좀 도와줘봐야 잘 살다가 죽으면 끝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사는 천국의 삶을 선물할 수 있다면 그것처럼 귀한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그랬답니다. 충청도 분을 만났습니다. 충청도분들은 말도 느리고 행동도 느리니까 천국 가는 것이나 죽는 것도 느리겠다고 했더니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충청도 사람들이 죽는 것이 제일 빠르다고 합니다. 왜냐고 물었더니 우리가 죽었다는 표현으로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경상도 사람들은 “운명하셨다 아입니꺼.” 이렇게 길게 표현합니다. 전라도 분들은 “이 세상 버렸으라우. 버렸당께.” 깁니다. 그런데 충청도 분들은 간단합니다. “갔시유.” 끝난 것입니다. 제일 빨리 죽는 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빨리 죽던 늦게 죽던 천국에 가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어머님이 마지막 임종 전에 아들 셋을 불러놓았습니다.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은 예수를 잘 믿고, 셋째 아들은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그녀는 큰 아들과 둘째 아들에게 인사했습니다. “굿 나잇!” 굿나잇은 좋은 밤 되라는 인사로 내일 아침에 만나자는 뜻입니다. 그런데 셋째 아들에게는 “굿 바이”라고 인사했습니다. 이상합니다. 셋째 아들이 이상해서 “아니 어머님! 형들에게는 굿나잇이라고 하고 나한테는 굿바이라고 합니까?” 어머니가 설명해 주었습니다. “첫째, 둘째는 예수 잘 믿으니까 이제 부활의 새벽에 다시 만날 것 아니니. 그래서 굿나잇이라고 인사했지. 그러나 너는 예수를 믿지 않으니까 너와는 영원한 이별 아니니? 다시는 만날 수 없으니 그래서 굿바이라고 인사했단다.” 여러분! 전도는 굿바이할 인생에게 굿나잇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잠자는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죽은 자도, 살아있는 자도 다 신령한 불멸의 몸을 입고 다 부활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는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고, 타인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전도는 주님의 칭찬과 면류관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 오늘 본문 말씀 7절과 8절을 읽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오늘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임종을 앞두고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 그가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전도하다가 탈락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내게는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었다. 전도자에게는 주님의 칭찬과 면류관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구원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좀 죄송한 이야기입니다만 우리가 그저 주일에 와서 예수 믿고 예배 한 번 드리고 아무 봉사도 하지 않고 돌아간다면, 일생에 전도라곤 한 번 하지 않고, 그저 교회 와서 마음 편하게 예배만 드리고 돌아간다면 물론 구원은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 어찌 보면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칭찬과 면류관을 받을 수 있다면, 상급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다니엘 12장 3절에 보니까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궁창의 별과 같이 빛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생명의 면류관을 줄 것이다.”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엄히 명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입니까? 전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2009년 새해에는 꼭 여러분 태신자를 작정하시고 그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서 주님 앞에 기쁨을 드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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