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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이 육신이 되심 (요 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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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심  (요 1:14~18)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심’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이것을 ‘도성인신(道成人身)’이라고 하는데 신이 인간의 몸을 입었다는 말로 영어로 인카네이션(Incarnation)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신이 인간이고 인간이 신인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존재를 그렇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믿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 하나님이 하나님됨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인간가운데 계셨다, 하나님은 창조자인신데 창조자가 피조물가운데, 역사의 주인이신 이가 역사가운데 그가 만드신 시간과 피조물가운데 자신이 계시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말을 믿지 못하거든 내가 행하는 것을 보고 나를 믿으라’하셨습니다. 주님이 바다를 명하여 바람을 꾸짖으시고 죽은 나사로를 일으키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무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들을 치료하시고 그들을 먹이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치료하기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나사로를 살리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나사로는 죽었지만 메시야 그가 생명의 근원이시고 만물의 주인이심을 증거함이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그러면서도 주님은 심히 통곡하시고 피곤하시고 주리셨으며 우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감정을 가지시고 우리와 같이 되셨으되 인간의 연약함을 비웃지 아니하시고 그는 죄가 없으셨더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정의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뜻입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은,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택하시고 나를 부르시고 내게 은혜를 주시어서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내가 하나님을 택하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손을 놓습니다. 세상의 재미를 즐기고 다른 생각하느라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놓지 않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망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잡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은혜의 진리입니다. 

 ‘야곱아 그러므로 네 원통한 것이 하나님께 상달되지 아니하고 왜 네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응답되지 않았다고 말하느냐 너는 듣지 못하느냐 보지 못하느냐 내가 너를 택하였고 너를 불렀다 나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는 전능하신 자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이 이곳에 나온 것은 종교예식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잘 살고 복 받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택하시고 여러분을 사랑하시기에 그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려고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을 기쁘게 부르고, 기도가 진실하고 간절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축제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올 때 깨끗한 옷을 입고 즐거운 마음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카네이션을 설명하는 귀한 예화가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작품가운데 한 이야기입니다. 한 임금의 아들이 백마를 타고 그의 아버지가 통치하는 나라를 이모저모 살피려 나가 보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작은 마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더러운 옷을 입고 신발도 신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런데서도 사람이 살고 있구나 생각하면서 말을 몰고 가다보니 모양이 꾀죄죄하고 머리는 흐트러지고 옷은 남루하지만 얼마나 예쁘게 생겼는지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한 처녀를 보고 그만 왕자님은 마음이 홀딱 반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말에 태우고 올 수도 없어 왕궁에 돌아와서는 그 처녀가 마음에 가득차서, 들을 보아도 그 처녀가 걸어다니고 방에 들어와도 그 처녀의 모습이 보여, 앓아 눕게 되었습니다. 많은 의원들이 와서 진단을 해보았지만 아무 약도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의원이 그의 맥을 진단하고는 마음의 병이라고 말합니다. 숨겨놓았던 마음을 듵킨 것 같이 부끄러웠던 왕자가 그의 얘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사실인즉 내가 얼마 전에 어는 한 마을에 갔다가 너무 예쁜 처녀를 보았는데 그 처녀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내가 온통 거기에 마음이 빠져 있습니다’. ‘왕자님 진작 말씀하시지요, 어느 마을입니까, 내가 가서 데리고 올까요’ ‘당신이 그 처자를 데리고 올 수는 있어도 그 마음까지 가져올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왕자님이 그 마을에 가서 그를 만나면 되지 않습니까’ ‘내가 왕자의 신분으로 가면 그가 나를 사랑하기 전에 내 권좌와 다른 것을 사랑할지도 모르니 그것은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왕자는 고민한 끝에 왕자의 옷을 벗고 신을 벗어버리고 남루한 옷으로 갈아입고 그 처녀집 옆에 조그만 집을 하나 샀습니다. 
그리고 이사를 갔습니다. 그의 온 정성을 다하여 마을사람들과 사귀고 먹고 마시고 같이 지내게 됩니다. 그것은 왕자에게 고통스럽고 불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처녀를 볼 수 있고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왕자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동안에 서로가 사귀고 사랑하게 되어 서로가 마음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때 왕자가 처녀에게 그의 심정과 신분을 토로했습니다.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나의 신분은 왕자요’ 그 처녀는 너무 놀랐습니다. 얼마나 감격하고 얼마나 고맙고 기뻤겠습니까? 이것이 성육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연구의 대상, 깨달음의 대상으로 또는 종교적 이야기로 듣기 쉽습니다. 기독교는 왕자님과 사귀는 처녀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 같고 내가 죄인의 괴수라 그러나 내가 오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고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큰 은혜를 경험하고 이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기쁨과 감동, 감격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누굴까 어떻게 믿어야 할까 그것은 연구입니다. 그것은 학문이 되기 쉽습니다. 신앙이 삶이 되고 내 가슴에 감동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성육신, 그것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찾아오심입니다. 
   왕자가 그 마을을 찾아간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임마누엘, 내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니라’ 
   하나님이 몸을 입고 땅에 오셨으므로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에 대한 축제입니다. 교회가 왜 거룩해집니까? 성도들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서 교회가 거룩한 것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을 왜 의인이라고 합니까? 우리가 세상사람보다 정직해서입니까, 진실해서입니까? ‘내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그들가운데 함께 있으리라’ 교회가 거룩해지고 그리스도인들이 의로워지는 것은 우리의 의와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의 권위요, 하나님을 믿는 의인줄 믿습니다. 우리가 어찌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로울 수 있습니까?  그들은 한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세 번씩 손을 들어 기도하고, 받은 것의 십일조를 바치고 죄를 짓지 아니하고 안식일에는 천미터 이상을 걸어가지 아니했습니다.

 우리의 의는 행하는 윤리, 도덕의 행위의 의가 아니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의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이 자리에 그의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교통하십니다. 두 세 사람이 모여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셔야 교회요, 많은 사람이 모여도 인간의 집단은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 그것이 우리의 위대한 축복이요, 감격이며 자랑이고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를 향하여 올 때에 기쁜 마음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성육신은 곧 하나님의 성품, 그 자신을 드러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그의 의지와 성품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곧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왕자가 그 마을에 가서 처녀를 찾게 된 것은 왕자의 성품과 의지의 결단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이 땅에 십자가로 자신이 오지 않고서도 인간을 구원할 여러 방법이 있을지라도, 직접 오심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길입니다. 우리는 끝없는 호기심을 갖고 물을 수 있으나 대답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십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어서 그를 나타내보이시니 곧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빌립아, 네가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선하고 의로운 의지와 그의 거룩하심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님은 못 믿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나 이 땅위에 역사속에 오셨던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바로 그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역사의 사건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끝없는 사랑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이렇게 바꿔 읽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예수그리스도를 주셨으니 내가 저를 믿음으로 멸망치 아니하고 영생을 얻었느니라.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살아야 할 보람이고 가치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부족하고 연약하고 보잘것 없고 남들이 나를 조롱해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가정이 안식처가 되고 식구들이 우리의 희망과 힘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이러쿵저러쿵 말해도 가족만은 나를 인정하고, 가정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랑의 보금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가정마저 비판의 자리 투기와 시기와 냉소의 자리로 변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자는 절망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자는 곧 새 힘과 용기를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이 말은 형용할 수 없는 거룩한 말씀입니다. ‘나를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곧 그 사랑안에서 우리의 영원한 가치를 발견합니다. 변치 않는 영원을 우리는 느낍니다. ‘예수그리스도안에 독생자의 영광이, 은혜와 진리가 그 안에 충만하더라’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인카네이션 ‘도성인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삶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땅에 오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고 헐벗은 처녀가 왕궁의 왕자의 생각과 삶과 수준에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왕자가 내려온 것이 십자가이고 희생입니다.
    오늘 우리의 아픔과 갈등이 무엇입니까?  ‘네가 나같이 되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왜 너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의 원리는 눈높이입니다. 내가 너의 수준에 내려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너는 나같이 되어라’ 거기에 내 욕심과 지배욕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와 대화가 안된다고 합니다. 나는 ‘너만할 때 안그랬어’하니까 대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왜 그러는가하며 아픔을 같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나와 당신은 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연약과 부족의 아픔이 있습니다. 그 아픔을 함께하는 것이 도성인신입니다. 그것이 나를 변화시키는 모습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로 모여들어야 합니다. 주께서 오라하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야 합니다. 빛은 빛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둠속에서만 이 빛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소금을 위하여 소금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맛이 없는 곳에, 썩어가는 곳에 뿌려지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교회는 교회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영이 계신 곳, 그 어디나 천국입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인가는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찾아가기 위해서입니다. 더 낮아지기 위해서입니다. 거기에 내 희생과 섬김의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어떻게 닮겠습니까? 넥타이를 풀고 망토를 걸치고 광야에 뛰어 나가야겠습니까? 어떻게 주를 닮겠습니까? 마음을 낮추고 겸손한 사랑으로 베푸는 자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원리는,
    첫째, 섬김이라 하였습니다. 갈 5장 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름심을 받았다 그러나 너희 자유로 말미암아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던 이유입니다.
    내가 원하는 상품은 아무리 개발해도 안 팔리게 되어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상품을 만들어야 잘 팔리게 되어 있습니다. 내 고상한 아이디어가 청중과 거리를 갖게 되어지면 팔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천재는 100년후에야 알아줍니다. 그러니 여러분, 눈높이를 맞추어 내려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입니다. 가장 위대한 진리이고 삶의 놀라운 원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무심코 내뱉는 말이, 많은 행동이, 약하고 연약한 사람들에게는 때로는 치명적인 상처가 되고 절망과 아픔이 됩니다.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지 아니하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 우리의 모든 삶의 원리입니다. 바로 성육신에서 나옵니다.
   
    둘째, 마 20장 28절에 ‘내가 온 것은 섬기려 할 뿐만아니라 대속물로 주려함이니 ’ 
    예수믿고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것은 가치관을 바꾸는 일입니다. 정말 위대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멋진 것인지를 아는 지혜가 신앙입니다. 아직도 세상적인 것이 멋진 것이라고 갈등이 많습니다. 예수믿는 재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기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때문에 내가 오늘 낮아졌다, 그 때에 하나님이 나를 높이시는 기쁨의 영광이 가슴에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일은 멋진 일입니다. 매력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진리는 성육신에서 통합니다. 우리교회가 낮아져야하고 세상으로 가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선교, 섬김 봉사라고 합니다. 종은 주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지, 종이 주인을 좌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다가 더워 시원한 물을 찾는 주인이 거기 누구 있느냐 시원한 물을 좀 가져오너라, 예, 그러나 지금은 밤입니다. 찬물은 좋지 않으니 더운 물을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이놈아, 안그래도 더운데 더운물 먹겠느냐 찬물을 가져오너라. 아닙니다, 주인님. 그것이 종입니까? 누가 주인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늘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큰 역사를 이루어내거나 위대한 일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너를 위하여 내가 얼마나 희생되고 깨어질 수 있는가가 위대한 일입니다. ‘주님을 닮았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속에서 이런 모습이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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