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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회의가 오는 통로 (요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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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회의가 오는 통로 (요 21:3~6)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 배 오른 편에 던지라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더라.   

지난주일 신앙의 회의감과 삶에서 주어지는 권태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분이 전화를 해서 “권태기는 누구에게나 다 오나요, 우리 부부는 없이 살아왔어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삶의 권태기는 서로 노력하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권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도 별로 권태기나 침체기 그리고 신앙의 회의를 느끼지 않고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저도 신앙의 권태기를 별로 느끼지 않고 오늘까지 왔습니다. 그 공로는 우리 부모에게 있습니다. 내 부모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신앙의 길로 인도해 주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별로 고민 없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별 과정을 다 거치고 몇 번이나 그만 두었다가 다시 돌아오고 왔다가 또 나가고 그렇게 이 길을 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때로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다져지기도 하고 굳어지기도 하고 결국에는 좋은 신앙의 길을 가게 됩니다.  

신앙의 회의는 대략 이런 것입니다. 하나는 감기와 같은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 신앙의 회의는 환경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찾아오고 문제에 봉착하였을 때 찾아오고 실망이 클 때에도 찾아올 수 있습니다. 또 신앙의 회의는 태풍과 같은 것입니다. 

태풍은 연중 몇 차례 옵니다. 그때는 겁이 납니다. 나무가 다 쓰러지고 둑이 터지고 다 익은 과일이 떨어지고 야단입니다. 그래도 태풍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떨어질 과일은 다 떨어져야 합니다. 터질 것은 다 터져야 하고 무너질 것은 다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야 견고해집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그런 회의하는 과정을 거쳐서 견고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닷가에 사는 사람은 언제나 태풍을 대비하듯이 신앙인은 이 신앙의 회의를 대비해야 합니다. 그래야 유사시 견고하게 신앙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본문은 베드로가 신앙의 회의에 빠진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엘리야처럼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흥분했습니다. 앞서 갔습니다. 맹세도 장담도 잘 했습니다. 성격이 화끈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 열정, 단호한 결단력, 물 위로 뛰어내리는 열정은 누구도 흉내를 낼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성격 때문에 성공도 했지만 또 실패도, 시행착오도, 후회도, 눈물도, 반성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어이없게도 여자 아이 앞에서 실수를 하고 예수를 부정하는데도 베드로는 아주 쉽게 맹세하면서 부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곧 뉘우치고 밖에 나가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많은 시간 그는 무료하게 보냈습니다. 실패 감의 늪에 깊이 빠졌습니다. 큰 충격에 헤맸습니다. 그리고 무료함을 달래던 차에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간다”하고 그물을 들고 호수로 향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고기를 잡으려고 마음먹고 간 것은 아닙니다. 가라앉은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서 무료해서 갔습니다. 

그러자 나머지 제자들도 따라나섰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기가 잡히겠습니까. 밤새워 그물을 던져보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고기들도 사람의 마음을 잘 압니다. 사람이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면 고기도, 일도, 성과도, 성공도 없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할 때 먼저 마음을 잡는 것이 우선입니다. 마음의 초점이, 중심이, 기초가 든든해야 합니다. 그것이 안 되니까 고기 한 마리 잡지를 못한 것입니다. 마음이 정돈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고기나 잡으러 가야지”, “기도나 해 볼까”, “신학교나 가라”, “다른 일 다 실패했으니 목회나 해 볼까”, 그렇게 해서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마음이 그 상태이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이 마침내 마음을 잡고 고기를 잡게 되는 계기가 주어졌습니다. 그곳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고기 많이 잡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배 오른 편에 던져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른 편에 던져보니 그물 가득히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 아침 제자들은 예수는 죽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는데 오늘 제자들은 죽으셨던 예수님이 살아 부활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제자들이 잃어버렸던 그리고 흔들렸던 신앙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중심을 회복했고 신앙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니까 빈 그물에 고기가 채워진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회의감이나 신앙회복의 패턴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그리고 자주 찾아옵니다. 지난 주일에 신앙의 회의는 신앙의 초점이 흐려질 때, 신앙의 기초가 빈약할 때, 이웃을 통해서도, 그리고 감정의 기복에서도 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생각해 보면 신앙의 회의가 오는 통로가 그 이유뿐이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몇 가지 더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헌신 부족 

쉽게 말하면 훈련부족에서 신앙의 회의가 올 수 있습니다. 머리로는 많이 알지만 헌신과 행함이 부족할 때 신앙의 회의가 올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헌신은 구체적인 신앙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한 번도 헌신생활을 안한 사람은 신앙이 구체적일 수가 없습니다. 헌신은 신앙생활의 훈련입니다. 현장학습입니다. 임상실험입니다. 많은 사람과 부딪치며 연마하는 동안 신앙이 구체화됩니다. 그리고 신앙은 그때 강화됩니다. 이 헌신의 삶이 없으면 실전에 약해서 쉽게 무너지고 회의감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결혼해서 잘 사는 사람은 서비스업에 종사한 경험자라고 합니다. 인생에서 산전수전을 많이 경험한 사람은 좀처럼 실망하거나 포기하거나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결혼해서도 잘 살아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삶에 경험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은 결혼 후 크고 작은 문제들을 만나도 문제를 거뜬히 극복합니다. 그런 경험이 없이 고이 살아가다가 결혼한 남성은 결혼 후 매사 아내가 다 해 주기만을 기다립니다. 

또 그렇게 자란 아내는 남편이 조금만 거스르면 그것을 참아내지를 못합니다. 시댁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혼생활이 힘들고 고되고 고민이 많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나이 들고 인생경험이 쌓인 후 뒤를 돌아보면 그때 내가 참 철이 없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경험하고 보니까 그런 아량이 너그러운 마음이 모든 것을 웃어넘길 수 있는 도량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성숙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도 헌신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헌신생활을 하는 동안 신앙의 깊이를 체험하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 신앙이 실제적인 신앙으로 성장하고 기도하며 적응하게 됩니다. 형제애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헌신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생명력 없는 믿음 

신앙은 영적 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 영적 체험은 우리의 신앙을 구체적으로 이끌어 줍니다. 신앙의 영적체험은 신앙의 생명력을 더해 줍니다. 구체적 체험이 부족하면 명목상의 믿음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성장이 없고 발전이 없고 내면에 말씀에서 주어지는 힘이나 확신이 없습니다. 성령의 감화에서 오는 능력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구체적인 회심의 역사가 없으면 용기도 헌신도 수고도 결단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어려서부터 경건한 신앙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엄격한 신앙의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웨슬리는 그런 생활에서 얻은 경건이 신앙인 줄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큰 뜻을 품고 미국 조지아주로 가서 원주민들을 모두 주께로 이끌어 내겠다고 떠났습니다. 포부는 컸는데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우선 그는 대서양을 건너는 도중 테스트를 거치게 됩니다. 배를 타고 가는 도중 웨슬리는 큰 풍랑을 만나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수없이 말 했으면서도 오늘 나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을 그는 잊었습니다. 그러니 선교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실패하고 다시 돌아와 고민하다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영적 회심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나서 웨슬리는 그때 만난 영적 체험의 힘으로 그 후 50년이 넘는 기간을 전도하는 일에 전념합니다. 웨슬리는 그때 성령이 주시는 힘에 사로잡히고 그 힘에 사로잡혀 살아갔습니다. 신앙은 주체되시는 성령을 만나는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성령의 체험의 신앙이 평생 나 자신을 지켜줍니다. 때로 회의도 실패도 좌절도 나타나지만 그런 것은 잠시 과정으로 올뿐 나에게 대수롭지 않게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은 나의 지성과 이성과 마음과 생각과 판단을 주관하십니다.  


의심에서 옴 

우리는 늘 마음에 의심의 보따리를 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의심합니다. 잘 신앙생활 하고 기도생활 하다가도 어느 순간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내 기도는 과연 누가 듣고 있는가”라는 의문에 빠지게 됩니다. 그때 내 마음에서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충분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것은 열쇠구멍으로 전체 보지 못한 상태에서 전체를 이해하려 하기 때문에 오는 한계입니다. 그래서 매사 의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읽고 분석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미 성령의 감화로 쓰인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는 먼저 “이 말씀은 성령의 감화로 주어진 말씀이다”라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고 다가가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적으로 분석하고 쪼개려고 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영적으로 주어진 말씀으로 믿고 다가가야 합니다. 이 책에 기록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다가가야 합니다. 이조실록을 읽을 때는 그 내용이 역사 속에 있었던 사실로 믿고 읽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고 분석하고 쪼개면 그 책은 팩트가 아니고 픽션입니다. 의심은 매사를 불신하게 만듭니다.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고 역사를 믿지 못하게 되고 성경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사탄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 신앙인들의 마음에 이 의심의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을 앞에 놓고도 믿지 못하고 끝내는 신앙의 회의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신앙의 길에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조급증 

신앙생활 하면서 한 가지 꼭 알아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고 기다리는 인내입니다. 지연됨에서 오는 시험이 가장 큰 시험입니다. 이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기다림뿐입니다. 오늘 기도해 놓고 내일 당장 어떤 응답이 주어지기를 기대하면 시험이 됩니다. 신앙에서 빨리 결말을 기대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내가 오늘 다급해서 기도했더니 가부간 금방 응답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은 내 생각입니다. 내가 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나의 생각과 다릅니다. 

조지 물러 목사님이 절친한 친구 세 명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중 한 친구는 얼마 후 회심했습니다. 또 한 친구는 10년 후에 회심했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친구는 물러 목사가 죽은 후에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절규하며 죽어갈 때 하나님이 금방 개입하여 액션을 취하셨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사람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은 끝내 예수를 죽게 하셨습니다. 그 깊은 뜻과 이유를 모르면 시험이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나치는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서 십대 청소년을 처형하였습니다. 아주 고통스럽게, 서서히 죽어가도록 죽였습니다. 그 소년들이 죽어가면서 절규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 사람이 외쳤습니다. “오 주여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의 외침에도 하나님은 무응답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또 한 소년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습니다. 그래서 또 외쳤습니다. “오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때 곁에 서 있던 위체라는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그가 어디 계시냐고, 그는 지금 바로 여기에, 저 소년과 함께 교수대에 매달려 있다.” 이 단계를 이해할 수 있어야 그 때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이해는 인내에서 터득됩니다. 때로 시험은 우리들이 깊이 그리고 지긋이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지 못하는 안달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사탄 유혹 

사탄은 늘 시험하려고 누군가를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험을 대비해야 합니다. 본문 보십시오. 베드로가 여지없이 그 강했던 사람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이 너를 밀 까부르듯이 할 것” 이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밀 까부르듯이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밀 까부르듯이”란 무슨 말입니까. 키에 밀을 넣고 까불면 쭉정이는 날아가고 알곡만 남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밀 까부르듯이 할 것이라는 말은 시험 때 쭉정이 신앙은 다 날아가고 알곡 신앙자는 하나님 앞으로 모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속에 쭉정이 본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은 죄이고 자만심이고 욕망입니다. 다윗에게도 이 본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신선하였지만 후에 성적 탐욕이 그를 넘어지게 하였습니다.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 열정의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도 이 쭉정이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우월감입니다. 그래서 그는 누가 높으냐 하고 따졌습니다. 사람마다 이 쭉정이가 속에 남아 있습니다. 보통 때에는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사시에는 이 쭉정이가 고개를 들고 일어납니다. 사람의 몸도 취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폐, 간, 정신, 심장, 기관지 중에서 특별히 사람마다 약한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유사시에는 그 약한 부분이 문제가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돈에, 명예에, 성에, 이간질에 능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약점이라 그 약점을 가지고 사탄은 접근해서 넘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에게는 두 가지 무기를 지녀야 합니다. 하나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힘과 충만한 영감을 부여합니다. 우리는 그 힘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사탄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내 안에는 죄의 근원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내 안에서 쭉정이 노릇을 합니다. 그 쭉정이는 내 안에서 깊이 뿌리를 뻗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 기회가 되면 고개를 들고 일어납니다. 

술을 끊은 사람도 그 안에는 술의 뿌리가 계속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술을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속에서 이 뿌리가 꿈틀 거립니다. 노름을 해본 경험자는 노름판에 가면 안 됩니다. 도둑질의 근성을 가진 사람은 가능성이 있는 환경을 피하여야 합니다. 물론 오늘 나는 손을 씻었지만 내 안에는 아직 죄의 근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사탄은 그 근성을 가지고 유혹합니다. 그것은 말씀과 기도의 힘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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