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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흔들리지 맙시다 (골 1: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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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로 흔들리지 맙시다 (골 1:21~23) 

  
생각하는 것과 행동의 차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삶의 모든 일은 최종적인 손과 발과 몸이 이루는 일로 결정되고 평가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행동은 생각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하고 계획한다고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과 실행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르고 유익하고 옳은 행동은 바르고 유익하고 옳은 생각이 있어야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르고 유익한 삶의 결과를 이루려면 우선 바른 생각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들에게는 바른 생각, 바른 마음가짐, 바른 생각의 정돈들이 필요합니다. 
실제적인 삶의 행동 하나하나를 이루는 생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 삶에 전체적인 기본이 되는 생각의 틀을 바로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옳지 않은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그 원칙과 기준에서 시작하는 바른 생각이라는 것은 결국 비뚤어진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생을 깊이 묵상하며 생각의 기본의 틀이 되는 몇 가지를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앞으로 8주 동안 우리 인생에 대한 깊은 묵상에 대한 제목으로 한 주씩 말씀을 드릴 텐데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흔들리지 맙시다.’ 하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골로새 교인을 향하여서 간절히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믿음에 굳게 서서 복음의 소망에 흔들리지 말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하면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주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자로 세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에 굳게 서서 소망에 대해 흔들리지 아니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흠없는 믿음의 백성으로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 안에서 자유와 기쁨을 얻은 백성이 또다시 죄와 죄의 습관으로 인해 흔들리는 것에 대해서 안타깝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잡아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든든히 서되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하고자 하는 소망에서의 권면입니다. 다시 말하면, 골로새교인들 중에 복음 안에서 자유를 얻고 행복과 기쁨을 얻었지만 또다시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고 자유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있기에 그들에 대하여 강력한 권고의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주 예수께 대한 믿음과 그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성도의 삶의 각양의 모습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성도들의 삶이 흔들리지 않고 정한 마음으로 정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뚜벅이 갈 수 있다면 그것은 가장 큰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첫 번째 생각합니다. 

인생은 근원적으로 한 번 확신했다 할지라도 쉽게 다시 흔들리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생이 가지는 불행의 원초 원인입니다. 인생의 첫 번째 범죄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심의 약화, 즉 의심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꼬임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습니다. 욕심이 생겨 결국은 선악과를 먹게 되고 낙원의 추방,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영원한 죽음과 고통의 세계로 빠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게 기쁜 일을 주시고 결국 가장 큰 은혜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이 의심될 때 우리는 흔들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의 의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기대와 기쁨과 평안에 대한 의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절대적인 최고최선의 길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에 대한 의심입니다. 이때 우리는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싸움은 결국 눈에 보이는 현실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약속 가운에 어떤 것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느냐에 대한 싸움입니다. 지금의 현실세계를 나의 전부로 보느냐, 아니면 그 현실세계 뒤에 있는 하나님의 천국과 영원한 은혜와 그 세계를 내가 고정시켜 바라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현실의 모든 것에 눈을 맞히면 우리는 가변적입니다. 
현실은 흔들립니다. 흘러갑니다. 변합니다. 현실에 눈을 맞추면 우리 마음은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언제 기쁠 수 있지만 또다시 뒤집어져 슬픔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 뒤에 계시는 하나님, 현실을 섭리하시는 하나님, 변함없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우리의 삶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흔들림은 천국에 대한 깨닫지 못함, 즉 무지와 현실의 세계를 그들의 전부로 보고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섭리와 권세를 믿지 못하는 우리는 현실의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이 됩니다. 마음이 흔들리고 결국은 삶 자체가 흔들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적의 떡을 먹었습니다. 능력과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것을 통해 천국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 사역에 대해서 승리를 바라보지 못하고 무서워 도망쳤던 것입니다. 그들이 기적의 떡을 먹으며 능력과 역사의 장면에 동참하며 그들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면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 앞에 오히려 기대를 가지고 감사한 마음으로 담대히 그 십자가 앞에 다가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적의 떡을 먹고 능력과 역사의 장면에서도 기적과 능력만을 보았지 그 뒤에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기적의 현상이라는 것은 마음에서 씻어지는 것이고 삶의 고통과 십자가의 두려움이 다가왔을 때 그들은 십자가를 부활과 영광과 권세로 바라보지 못하고 슬픔과 위축과 두려움으로만 바라봤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흔들렸던 것이고 결국 그들은 주님 곁에 있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고 도망쳤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충만 사건으로 인하여 다른 세계에 대한 눈을 떴고 그 이상의 현실은 결국 그것을 넘어선 능력의 세계를 체험한 이들에게 큰 어려움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체험하고 나니 눈에 보이는 현실이 그들에게 전부가 아니었던 것을 그들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현실을 넘어선 또 다른 세계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죠. 바람이 불거나 아니면 비가 몰아치거나 폭풍우 치는 것이 그들의 삶을 가로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내가 흔들리기도 하고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보느냐, 그 사람 뒤에 있는 하나님을 보느냐? 
내 앞에 있는 현실을 보느냐, 현실 뒤에 계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보느냐? 

지금 내 앞에 눈물과 슬픔을 보느냐, 눈물과 슬픔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마음은 흔들리며 갈등하며 살수도 있고 우리 마음은 정한 마음으로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생 서로에 대한 흔들림도 짧게 보고 눈앞의 것만 생각하니 쉽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인간들을 바라볼 때도 현재를 바라보지 말고 그를 섭리하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어떻게 인도하실까? 저를 통해서 이루실 일이 무엇일까? 지금 내게 실망되는 것 같지만 이것은 실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러저러한 과정을 통해서 결국 그에게 갈 길을 가게 하실 것인데 결국 그의 마지막 모습을 무엇일까를 생각하면 우리는 기대하게 됩니다. 자녀들에 대해서도 기대하고 남편에 대해서도 기대하고 아내에 대해서도 기대하고 우리는 모든 주변사람에 대해서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기도해 놓은 것 있으면, 기도의 확신이 있다면 마음 편히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 
내 삶의 상황이 어떻게 바뀔 것인가? 
내 마음이 얼마나 넓어질 것인가? 
우리는 기대해야 합니다. 
짧게 보면 슬픔이라도 그것을 통해 무엇을 이루실까? 생각하면 결국 우리는 과정이 끝이 아니라 그 뒤에 계신 주님의 계획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이라는 것은 누가 더 멀리 보느냐, 누가 더 넓게 보느냐, 누가 더 긴 호흡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승패가 결정됩니다. 우리 삶의 승패라는 것은 결국 눈앞의 전투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이미 알고 있죠? 
눈앞의 전투가 승리나 패배에 별 상관없어요. 그 뒤에 또 다른 전투,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우린 지금 한 번 승리했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하지 못해요. 지금 실패했다고 해서 영원하지 못해요. 안됐다고 실망하지 말고 다만 수많은 것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다음 그 다음 계속해서 가니 우리는 그것이 우리 삶의 기분을 전부 지배하고 좌우할 수 없는 거죠.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흔들리지 않으려면 마음의 호흡을 길게 가져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으면 더 깊은 뜻을 바라봐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으려면 우리 마음을 더 넓게 가져야 합니다. 

두 번째,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삶의 믿음에 관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신뢰에 관한 의심하지 않는 확고한 신뢰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마음가는대로 어떤 결정을 하는데 그 마음가는대로 결정을 해서 잘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우리가 마음가는대로 결정한다는 것은 좋을 리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마음에는 죄악의 심정이 가득 차있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 의와 거룩과 진리라는 성품을 주셨지만 인간이 범죄함으로 그것을 깨뜨렸어요. 

여러분, 다른 사람 마음 보고 싶으세요? 
별로 보고 싶어 하지 마세요. 봐 봤자 다 시커먼 마음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 마음 봐야 다 죄악의 마음뿐이에요. 

여러분, 우리 자매들 다 화장하셨죠? 그 화장 파내고 볼 생각하지 마세요. 아름답게 꾸몄으면 그 꾸민 것 보고 아름답다 느끼면 되지 뭐 이렇게 파내면 어떤 모습이 될까 생각해서 뭐해요? 그렇죠? 
그냥 아름답구나! 참 예쁘구나! 그렇게 생각하시고 보시면 돼요.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예요. 그 마음 들춰서 내가 저 사람의 속마음을 알고 싶다 
‘나는 너의 진심을 알고 싶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지 몰라요. 그 진심이야 죄악된 마음밖에 더 있겠어요? 그런데 그 진심 알아서 뭐해요? 그냥 대하면 ‘아, 고맙다. 감사하다. 당신 마음은 검지만 그래도 나에게 희게 대하려고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라고 생각하고 기쁘게 대하면 돼요. 

우리 마음의 본심은 죄악의 본성밖에 없어요.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마음을 덧입고 덧씌우고 우리는 날마다 씻어내고 하루하루 하나님 앞에 바동거리며 믿음으로 살기위해서 애쓰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그냥두면 선을 행하지 못해요. 그냥두면 우리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그냥두면 우리는 흔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냥두면 흔들려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냥 자연스럽게 안 되는 것을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로 해야 될 때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결단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에 대한 최선의 결단을 해야 돼요.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 가는대로 안 되니 마음에 결심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나 상황이나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기에 내 앞의 모든 상황과 사람과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며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그러죠. '모든 일을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하듯 하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을 대할 때도 그를 사람 대하듯 하지 말고 그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심상을 보고 대하는 거예요. 내가 사람에게 대하는 듯 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듯 내 앞에 있는 모든 일도 하나님 앞에 이루심을 믿어야 합니다. 

흔들리는 순간에 하나님과 나 자신을 보고 어떤 것이 옳은가 생각해야 돼요. 
하나님이 흔들리는가, 내가 흔들리는가?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아요. 내가 흔들리는 겁니다. 그러면 나 자신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깨지는 순간이 있죠?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 내가 그를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내 기준에 맞춰서 남을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내 기준은 시간 지나면 또 달라질 텐데요. 그 때는 이전에 판단해놓은 것 어떻게 하실 겁니까?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신뢰에 대한 결단이 있어야 돼요. 
상황이 나를 믿게 해서가 아니에요. 그 사람이 나를 믿게 해서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사랑하시고 기쁨주실 것을 믿기에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가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 사람 믿지 못하겠지만 하나님이 그를 언젠가 바로 세울 거예요. 그러니까 그에게 기대하는 겁니다. 삶의 상황은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내 앞에 흔들려도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에게 이것을 통해서 기쁨을 주시리라고 생각하니 나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인간이나 상황을 바라본 사람보다 하나님을 바라본 사람이 승리할 수밖에 없어요. 인간들은 늘 흔들려요. 삶의 상황도 늘 흔들려요. 그러나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으니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승리하게 되는 거죠. 

제가 늘 말씀드리잖아요. 큰 나무가 왜 큰 나무가 됐을까요? 
아무 이유 없이 그 자리에 오래 있었더니 큰 나무가 된 거예요. 
큰 나무가 그냥 큰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력하게 그 자리에 오래 있었더니 큰 나무가 된 거예요. 
정말 무엇인가 능력 있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이리저리 자리 바꾸고 이리저리 하는 게 큰 나무가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 오래 있었더니 큰 나무가 된 거예요. 벼락 맞아도, 가지 꺾여도, 이리저리 사람들이 상처를 줘도 그래도 그 자리에 오래 있었더니 큰 나무가 된 겁니다. 특별한 능력보다 마음 흔들리지 않고 그 자리에 오래 있는 사람, 마음 흔들리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길을 끝까지 뚜벅뚜벅 걷는 사람. 

여러분, 왜 한 번 약속했으면 30년 못 지킵니까? 
왜 한 번 결정했으면 30년 못 갑니까? 
왜 한 번 마음에 계획했으면 그 일을 중도에 포기하십니까? 
우리는 종이 짝처럼 가벼운 사람들이 아니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고 바람 불면 흔들리고 말 한마디에 흔들리고 내가 눈에 보이는 것 한 가지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삶에 있어서 분명히 이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결정했으면 하나님 앞에 그것을 끝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요 큰 나무가 되는 겁니다. 
나무가 커지면 그 그늘에 쉬어가는 사람이 많고, 그 나무를 보고 추억을 가진 사람이 많아지고 많은 사람에게 훈훈한 이와 같은 모든 일들을 제공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 사람에게 대한 신뢰, 내 삶에 대한 신뢰에 대해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쉽게 결정하고 쉽게 마음 변하지 말고 언제나 결심한 것 약속하고 정한 것에 대해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쉽게 변하면 또다시 변해요. 
내가 어떤 사람을 참 좋아했어요. 그러다 실망했어요. 어떤 행동보고 실망했어요. 그러면 조금 더 지나면 또다시 그 마음 바뀔 거예요. 그 때 결정해버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 번 변하면 두 번도 변하고 세 번도 변하는데요. 

우리 선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택한 것 바꾸고 약속한 것 번복하고 하는 것은 성향이고 습성이에요. 제가 요즘 이런 생각하는데요, 우리가 어떤 판단을 하잖아요, 줄을 하나 쫙 그어요. 선을 쫙 긋습니다. 이쪽은 합격, 이쪽은 불합격. 당신 좋아, 당신 나빠. 

이게 얼마나 어리석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점점 느끼는 것 같아요. 우리가 판단의 선을 한 번 넓혀보자구요. 여러분, 금을 그을 때 연필을 가지고 쭉 금을 그을 수도 있고 굵은 롤러를 가지고도 금을 그을 수도 있어요. 아마 이 예배당만한 큰 롤러를 가지고 금을 긋는다고 합시다. 그 금에서 벗어난 사람은 불합격-이쪽은 불합격, 이쪽은 합격이라고 하면 대부분 이쪽에 있는 사람이 가도 그 넓은 금 안에 올 겁니다. 그리고 점점 사람들이 밖으로 퍼져갈 것 같으면 그 금을 점점 넓히자구요. 폭을 넓히자구요. 이게 뭡니까? 마음을 넓힘입니다. 내 마음을 넓힙니다. 내 마음을 넓히면 내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점점 없어져요. 전에는 선으로 딱 그어버리니까 거기서 이쪽으로 넘어간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 사람도 마음에 안 들고 이 사람도 속상하고 이 사람도 슬픔 끼치고 이 사람도 눈물이에요. 

그런데 마음의 폭을 넓혀버리니까 다 그 선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괜찮아!’ 
욕해도 ‘속상한 일 있겠지.’ 
좀 싫은 소리해도 ‘또 마음상해서 그렇지. 조금 지나면 괜찮아. 사람이 언제나 저러나?’ 
사람 안 그래요. 여러분, 욕하는 사람이 하루 종일 욕합니까? 일 년 내내 욕해요? 
그렇게 못해요. 어쩌다 한 번 욕하는 거라니까요. 아니면 해도 일 년에 몇 번 욕하는 거라니까요. 왜 그걸 가지고 그 사람의 삶의 전부를 판단해요? 
우리의 삶에 있어서 마음 불편하게 살 필요가 없어요. 
그저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지면 우리 삶의 폭을 넓혀보죠, 우리 마음의 폭을 넓혀보죠. 
전에는 싫었어요. ‘이제 뭐 별로 괜찮네.’ 
전에는 미웠어요. ‘괜찮아. 그럴 수도 있겠지. 속상해서 그렇겠지. 에이 어려서 그래. 믿음이 적으니까 그렇지 뭐. 내가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지 못했으니까 그렇지.’ 라고 생각하면 우리 삶은 얼마든지 여유로워질 수 있겠죠?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삶에 대한 이해가 커진다는 것 아닙니까? 전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이해하고 전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고 전에는 내 마음을 열수 없는 것을 열어주고 그리고 전에는 배려할 수 없는 일을 배려해주고 전에는 정말 격려할 수없는 일을 격려해주고... 살아가면서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판단의 선을 넓혀보세요. 
판단의 선을 넓혀보자구요. 그러면 우리 마음에 평안이 올 거예요. 
늘 마음에서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너무 많았는데 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의 폭을 넓혀보세요. 그러면 우리 인생이 달라지는 거예요. 
속이려고 해요. 
‘얼마나 어려우면 나를 속이려고 할까? 내가 그냥 모르는 척 속아주자.’ 라고 생각하면 우리 마음에 기쁨이 있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그 사람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고 싶어지면 우리 마음에 얼마나 기쁨이 있겠습니까? 
의심해서 얻는 유익보다는 신뢰함으로 얻는 유익이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의심하고 신뢰없이 사물과 사람들을 바라보면 우리 삶은 늘 불신의 아픔 속에 불행하게 살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이 불신의 아픔이에요. 
믿지 못하니 마음이 편할 수가 없어요. 
신뢰하지 못하니 마음에 기쁨이 없어요. 
우리는 늘 그 사람은 못 믿겠으나 그 사람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삶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래서 사람을 믿고 상황을 기대하게 되고 더 큰 틀의 삶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상대로 살아가다보니까 큰 확신과 기쁨에 거하는 겁니다. 

여러분, 내 마음에 안 드는 게 뭡니까? 
내 마음이 요만한데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내 마음에서 벗어나는 거잖아요. 마음에 안 드는 게 많으니까 괴롭잖아요. 
그러지 말고 내 마음에 안 드는 다른 삐져나가는 것이지만 내 마음의 틀을 더 크게 보자는 겁니다. 다 내 마음에 들잖아요. 이해가 안 되세요? 
내 마음에 안 들어요. 바깥에 있어요. 그러면 내 마음의 틀을 더 크게 만들어보자구요. 그러면 다 내 마음에 드는 거잖아요. 모든 게 내 마음에 드는 데 왜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행복하게 사는 것도 습성이요, 성향이더라고요. 불행하게 사는 것도 습성이요, 성향이더라고요. 결국 인생의 행복은 내 마음에 있는 의심과 불행에 대한 상상을 깨뜨리고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소망, 우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소망, 그와 같은 것을 우리 마음속에 품고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삶에 대해서 생각하면 달라지죠. 인생에 대한 이해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이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인간들을 믿어주니까요. 
우리의 삶 가운데 무한한 이해가 있을 때 삶의 반경이 얼마나 넓어지는지 몰라요.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보다 깊게 생각하고 보다 멀리 바라보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생각하며 기쁨을 소유하는 영적인 습관을 가져야 돼요. 

여러분, 기쁨을 소유하는 것도 영적인 습관이더라고요. 기뻐하는 사람은 늘 기뻐해요. 슬퍼하는 사람은 늘 슬퍼해요. 
뭐, 오늘 잘못했다고 합시다.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생각하면 돼요. 
그런데 오늘 잘못했는데 그것을 가지고 뇌심을 하게 되면 점점 우리 삶이 누추해진다고요. 하나님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신 것이 아니에요. 너희를 위한 내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내게 어려움이나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요? 

이 의미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기쁨 주신다고 했는데 지금은 슬픔덩어리야. 기쁨을 주신다고 했는데 왜 슬픔을 주셨을까?’ 
그 때 우리 마음에 다가오는 생각이 무엇일까요? 해석이지요. 
‘아, 내 눈에 슬픔으로 보였는데 하나님이 기쁨을 주셨다면 그러면 그 슬픔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일까를 해석해 보세요. 거기서 기쁨을 찾아가기 시작하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 인생에는 해석이 필요해요. 우리 삶의 기쁨은 해석에 의해서 주어진다고요.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해석을 잘못해서 나쁜 것으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고통스러울 뿐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파악할 수 있는 해석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게 하셨어요. 
'에이, 오늘 기분 나빠.' 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나를 걸려 넘어뜨리셨으면 무슨 또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하고 엎드려진 상태에서 무엇인가 찾아보세요. '혹시 내가 넘어져서 꼭 찾아야 될 것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내 주변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해요. 

내가 큰 실패를 겪었어요. 하나님이 나를 큰 실패의 장면에 놓아서 나에게 뭔가 주시려는 것이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실패의 순간에 뭔가를 습득하셔야 돼요. 그 실패의 장면이 아니면 여러분들에게 습득하지 못할 것들이 있단 말이에요. 그 장소에서 꼭 습득해야 될 것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실패의 자리에도 놓아주시고 기쁨의 자리에도 놓아주시는 것이란 말입니다. 다 필요해서 놓아주신 거예요. 그런데 왜 그것을 벗어나기만을 원하십니까?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것을 습득해야 되지 않습니까? 
서서는 볼 수 없는 것이 있기에 넘어뜨려서 엎드려서 볼 수 있게 하시는 것이겠죠. 그러니 넘어져 엎드려져 있는 것을 고통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그 의미와 뜻을 파악하고 그 가운데 이룰 수 있는 것을 이루어야 해요. 우리는 어떤 순간, 어떤 여건, 어떤 상황, 어떤 사람에게도 이룰 수 있는 것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 하나님의 최고의 것을 누려야 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어떤 마음과 기준과 원칙 속에서 살아야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돼요. 원칙이 없으면 늘 가변적이에요. 그 원칙이 내게 근거하는 것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에 근거해야 합니다. 

말씀드렸잖아요. 우리 마음을 넓혀야 돼요. 
실금 긋고 판단하지 말고 우리 마음의 폭을 넓혀야 된단 말이죠. 그러면 우리 속상한 것도 적어지고 아무리 나쁜 얘기 들어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편안해져요. 
우리 기도응답 중 어떤 것이 더 큰가 봅시다. 
여기 어려운 일이 있어요. 
“하나님, 정말 이 어려운 일이 나에게서 물러가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것과 “하나님, 이 어려운 일이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도록 내 마음을 크게 해 주십시오.” 어떤 것이 더 큰 응답일까요? 
어려움이 하나 물러갔으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느끼지 않을 정도로 내 마음이 커져버렸다면 우린 다음에 그런 것 보고 별로 기도하지 않게 되요. 

저는 기도하면서 꼭 한 가지 굳히는 말이 있어요. 
“하나님, 이런 내용가지고 다시는 기도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게 해달라고 이 문제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있는 큰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하잖아요. 
“하나님, 정말 이 문제 가지고 제가 어려워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이런 문제 가지고 다시는 기도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 삶에는 극복이 필요하잖아요. 
우리 삶에는 극복이 필요해요. 
내 모든 상태 그냥 있어도 그거 별것 아닌 것으로 느낄 수 있는 마음 가지면 그것 가지고 우리는 유족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믿음과 신뢰라는 원칙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아봅시다. 

여러분, 가정에서 보면 아내와 남편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갈등도 제일 많잖아요. 길거리 지나가는 사람하고 다투는 사람 아무도 없다구요. 제가 보니까 남편이 아내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면 그 가정은 행복해요. 
남편이 아내에게 이렇게 마음에 결심하고 말하면 돼요. 
“여보, 당신이 하는 말은 다 옳아. 내 기준은 당신이야.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나는 그대로 따를게.” 이렇게 생각하면 그 가정에 평화가 오더라고요. 

우리 남자들만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여보, 당신 말이 다 옳아. 당신이 내 삶의 기준이야. 당신이 말하면 나는 뭐든지 다 들어. 나는 당신을 100% 지지하기로 결심했어.” 

아니, 행복하게 살기 싫으세요? 
행복하게 살기 싫으시냐고요? 
제가 보니까 그렇게 사는 게 남편의 행복이더라고요. 
그러니까 아내가 하면 “잘했군, 잘했군.” 
그런 노래 있었잖아요. 그렇죠?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편해요. 
내 기준은 당신이야. 
언제까지 갈등하며 다툼 속에 살겠어요? 

제가 어떤 분보고 깜짝 놀랐어요. 70대 되신 분인데 부부가 다투시더라고요. 평생 살았으면서 아직까지도 다툴게 있나? 그런데 70세 되신 분인데도 의견차이가 있더라고요. 너무 신기하게 생각했어요. 
아내도 마찬가지잖아요. 남편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기대를 가지고 ‘우리 남편 얼마나 힘들까? 그래 당신이 말하는 게 다 맞아. 나는 당신이 말하는 대로 다 할 거야. 변덕스러운 나를 함께 살아 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마음대로 당신 다 이해할 테니까 그저 날아다니세요.’라고 생각하면 우리 마음 편한 거예요. 문제는 상대를 내 마음에 맞추려니까 그게 되겠어요? 

제가 결혼식 주례할 때마다 늘 얘기해요. 
아니, 얼굴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마음이 같겠어요. 얼굴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마음이 같을 수 있겠느냐고요. 마음이 얼마나 복잡한 건데 얼굴이 다른 사람이 얼굴 아무리 뜯어 고친다고 해도 두 사람 똑같이 맞출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우리 마음이 같아주길 바라겠어요. 그러니 우리는 이해하기로 결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 우리 옆에 있는 사람한테 인사 한 번 합시다. 
“당신 말이 다 맞아. 나는 당신 하자는 대로 할 거야. 나는 당신이 말만하면 너무나 기뻐.” 
그래요. 믿어주는 겁니다. 
믿기로 결심하는 겁니다. 이해하기로 결심하고 신뢰하기로 결심하는 겁니다. 

우리 삶에 마음 넓히면 못 받아들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미운 게 뭐 있겠어요? 싫은 게 뭐 있겠어요? 그저 더 잘해 주지 못해서 가슴 아픈 것뿐이고 정말 내가 더 잘 기쁘게 해주지 못해서 가슴 아픈 것뿐인데 왜 상대에 대해서 정말 이러저러한 잘못을 지적하고 이러저러한 어려움 끼치고 마음 상해하겠어요. 정말 우리 사는데 너무 짧은 삶이잖아요. 제가 요새 자꾸 얘기하는 게 있잖아요.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과연 의미 있는 날의 수가 며칠이나 있겠습니까? 
의미 있는 날이 며칠이 되겠습니까? 
의미 있는 시간이 며칠 되겠습니까?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를 기쁘게 해주고 살아야 돼요. 
모두에게 감사함으로 살아야 돼요. 

자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어주고 신뢰하고 기다리고 보다 호흡 길게 가지고 아이들은 평가하는 대로 된다고 얘기하죠. 
'정말 훌륭해' 라고 평가하면 훌륭해지는 겁니다. 
'얘는 안 되겠어' 하고 생각하면 정말 그렇게 안 되는 겁니다. 

부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요. 
보다 관대하게 생각하고 감사하며 고마움으로 생각하며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고 감사함이죠. 우리 마음에 흔들리지 말아야 해요. 
내 마음에 안 들기 때문에 흔들리면 안돼요. 내 마음에 안 들면 내가 정말 이런 것 하나 품지 못하고 이런 정도 하나 품지 못하면 내가 정말 속 좁은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마음 흔들릴 리 없어요. 화가 난다고요? 내가 어리석은 거잖아요. 내 속이 좁은 거잖아요. 그 정도를 이해 못하고 화가 나다니 생각하면 우리자신이 너무 누추해지잖아요. 

인생을 보다 길게 보면 과정을 과정으로 볼 수 있고 과정을 통해서 주시는 큰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은 결국 행복의 습관, 기쁨의 습관, 그리고 그와 같은 것을 어떻게 유지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늘 말씀드리잖아요. 
마음이 바뀌면 가장 먼저 바뀌는 것이 말이 바뀌어요. 말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쌓이면 습관이 바뀌고 인생의 변화는 습관의 변화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습성을 가지느냐? 
행복의 습성을 가지면 행복해져요. 기쁨의 습성을 가지면 기뻐져요. 그런데 판단의 습성을 가지면 늘 판단하고 지적하고 타박한단 말이에요. 
내가 어떤 습성을 가지고 있는 지 한 번 곰곰이 살펴보세요. 
내가 언제 마음이 흔들리는지 곰곰이 살펴보세요. 

이제 우리가 그와 같은 수준을 넘어서야 되지 않겠습니까? 
늘 말씀드리죠. 
'한 수준 높아지자' 
늘 말씀드리잖아요. 
'한 단계 높아지자.' 
말씀드리잖아요. 
그러면 전에 이렇게 오욕 속에 살아가던 모든 것, 전에 꼬불거리던 마음의 생각들, 그런 것들이 너무 우스워지잖아요. 

여러분, 비행기 타고 아래 내려다보세요. 
여러분, 아래 내려다보면 아래 산들이 있잖아요. 
우리 중학교 때 지리숙제로 지점토 가지고 산 만들고 산맥 만들어서 입체 지도 만들어서 제출했던 적 있잖아요. 그거하고 똑같아요. 
여러분 참 신기해요. 가까이서 보는 것 하고 멀리서 보는 것하고 더 멀리서 보는 것 하고 전혀 의미가 틀려진단 말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늘 미시적인 삶의 관찰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멀리 거시적으로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큰 뜻 가운데 우리 마음을 맡기면 의외로 마음 흔들리지 않고 갈 수 있는 거지요. 
가까이서 보면 의외로 흔들림이 많아요. 
멀리서 보면 그 흔들리는 것들도 평평하게 보이는 것이죠. 
하나님께 대한 믿음 가지고 그 믿음을 사람에 대한 믿음으로 바꾸며 그 믿음을 삶의 상황에 대한 믿음으로 바꾸며 마침내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모든 것으로 바꾸면 우리 삶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대한 깊은 묵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흔들리지 않으면 아니에요. 
깊이 생각할수록 인생을 이해하게 되고 우리 인간들을 이해하게 되고 깊이 생각할수록 우리 삶을 이해하고 삶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구라도 잘될 수도 있고 누구라도 안 될 수 있어요. 
항상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면 우리 삶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어요.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지만 그는 그 마음 전혀 흔들리지 않았어요.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사도바울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고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쫒아주는 기적을 행했어요.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오히려 무고함을 받아서 감옥에 갔어요. 그래도 그 마음 흔들지 않았어요. 흔들리지 않고 그 가운데 간청하고 기도했더니 옥문이 열려지고 그것도 간수가 구원받고 빌립보 성에 첫 번째 교회가 이루어지는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이죠. 

긴 호흡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보다 멀리보고 결정하고 마음가짐을 정합시다. 
눈앞의 것만 보지 말고 그 뒤에 일어날 일들을 바라보고 기대합시다. 
사람의 생각과 내 마음의 생각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바라봐야 합니다. 기도해놓았으면 그저 여유 있게 기다리셔야 됩니다. 어떻게 이루어질까하고 조마조마하지 말고 그저 여유 있게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기대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 가지고 흔들리지 말고 기대하며 기다리며 그것을 기쁨으로 삼을 때 우리는 아름다운 꽃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옆에 있는 사람 인사합시다. 
"마음 흔들리지 맙시다." 
자, 다시 한 번 인사합시다. 
"저는 마음 흔들리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인사합시다.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은 언제나 같습니다." 
자, 한번만 더 인사합시다. 
"당신 마음 편하게 사세요. 제가 다 이해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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