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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명의 십자가 (막 15: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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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의 십자가 (막 15:16~23)


본문은 주님께서 인류의 죄 값을 치루기 위해 십자가 지실 때 받으신 고난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 온갖 희롱을 다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해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시는 과정에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21절에 보면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라고 했습니다. 시몬은 십자가를 지러 온 사람은 아닙니다. 그냥 구경꾼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경꾼에서 중요한 배역을 맡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억지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구레네 시몬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입니다. 구경하러 왔는데 갑자기 로마 군병들이 자신을 불러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라니... 어쩔 수 없이 지쳐 쓰러지고 넘어지는 예수의 어깨에 걸쳐있던 십자가를 자신의 등에 짊어졌습니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억지로 지고 간 십자가였지만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비록 억지로 였지만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물론 표면적으로 볼 때는 이 사건은 순전히 우연한 사건이었습니다. 시몬은 우연한 기회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계획한 것도 아니고 준비된 일도 아닙니다. 아주 우연히 이뤄진 사건입니다. 그는 그래서 그는 본의 아니게 억지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시몬은 그 날 아침 자신이 십자가를 질것이라는 것은 전혀 상상치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인간은 자기 의지대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계획한 것이 이뤄지지 않고 계획도 없던 일들이 터지고 진행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신앙의 위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불완전성을 전제하고 하나님의 강요에 이끌려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명의 길을 가는 일꾼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요 21:18절에서 베드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우연 같아도 위대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연히 일어난 억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시몬의 편에서는 우연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도 어김없이 진행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사울은 잃어버린 나귀를 찾으러 길 떠났다가 우연히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서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 초대왕이 되었습니다. 바울도 성도들을 핍박하기 위해 열심을 낼때 우연히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우연한 일이 없습니다. 내게 좋은 일이든 싫은 일이든 하나님 편에서 보면 다 뜻이 있고 섭리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구레네 시몬은 시골에서 예루살렘에 왔다가 마침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끌고 가시는 광경을 목격하던 중, 지쳐서 쓰러지는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졌습니다. 

우리는 우연의 옷을 입은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면 안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생의 목적과 비전을 받은 사람들이므로 임의로 목표를 정해놓고선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많은 경우 “개인의 목표” 란 것이 주변 사람들의 기대와 현재 자신의 불리한 여건을 개선하려는 열망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마음을 내려놓고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할 때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우연의 옷을 입은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영어의 '세렌 디피티'(serendipity)는 '우연한 발견' 이란 뜻으로 과학 실험을 하거나 사업을 구상하는 중에 우연히 예상치 못했던 일들로 인해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연히 욕조 속에 몸을 담궈 물이 넘치는 현상을 보고 왕관이 순금인지 아닌지를 알아 내었던 ‘아르키 메데스’ 의 부력의 법칙이나 우연히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모든 물체에는 중력이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된 뉴턴의 중력의 법칙, 그리고 간단히 메모하여 책갈피에 붙였다가 편리하게 다시 뗄 수 있는 포스트잇 역시 tm펜서 실퍼(Spencer Silver)라는 사람이 강력 접착제를 개발하려다 실수로 접착력이 약하고 끈적거리지 않는 이상한 접착제를 만들게 된것을 응용하여 만들어진 발명품입니다. 

우연한 발견이 인류 역사 발전에 엄청나게 기여한 것들이 많습니다. 
‘우연히’ 가 그냥 우연히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역사하시는 한 방법이기도 한것을 알아야 합니다. 
룻기를 읽다 보면 "우연히"와 "마침"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됩니다. 
룻 2:3절을 보면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구절 4절에을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방 여인 룻이 곡식을 주우려고 "우연히" 간 일터가 보아스의 밭이었는데 그 때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그 밭에 온 바람에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룻은 후일 다윗의 증조 할머니입니다. 이방 여인 룻이 다윗의 조상이 되고 그 다윗의 후손의 계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게 됩니다. 이방 여인 룻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오는 과정을 우연히와 마침이라는 두단어로 룻기서는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때 룻이 보아스의 밭에 가지 않았고, 또 보아스가 마침 그 때에 그 장소에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의 만남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그랬더라면 예수님의 계보가 어떻게 변했을까 생각해볼 때 이 두 사람의 만남과 그들을 만나게 해준 “우연히” 와 "마침"이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눈에는 이 일이 그저 "우연히"와 "마침"으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모두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연히"와 "마침"을 통해 그들의 만남을 이끌어 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룻과 보아스의 만남을 통해 사람의 만남과 우리들의 삶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방편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
우연한 일 같으나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이 뜻과 계획이 있다면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어떤 입장 어떤 처신을 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야야 합니다. 

시몬은 억지로 였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비록 억지로 졌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교회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몬은 비롯 억지로였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 길을 비아돌로로사 (수난의 길) 이라고 합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까지 좁은 언덕길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다 지쳐 쓰려졌거나 넘어져 멈추었던 곳 마다 14개의 기념 교회를 짓고 기념하고 있습니다. 시몬이 십자가를 진 것은 제 5지점입니다. 그곳에서부터 골고다 까지 무거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감으로 예수님의 고난의 일부분을 나누어졌습니다. 인류의 죄값을 대신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한 이 사건은 예수님에게 큰 위로를 드렸을 것이며 자신은 예수님이 고난에 동참했다는 최고의 영광과 보람을 얻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인 복음전파와 그 몸의 상징인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진 십자가, 그것은 온 가족에게 미치는 축복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사람들에게 영광과 축복을 약속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4:13절에 의하면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라고 했습니다. 
마 10:40-42절에 기록되어있는 하나님의 보상 원리를 살펴봅시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행한 대로 반드시 상 주신 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록 억지로 십자가를 졌다고 하더라도 구레네 시몬이 상을 받기에 충분한 일을 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그날 아침 잘못 걸려들어 십자가를 지는 수고를 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 자신의 영예로운 이름과 후손들에게 영원한 축복을 남기는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 시몬이 어떤 축복을 받았습니까?

① 본인은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와 교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 시몬은 신자가 되었고 나중에 안디옥 교회의 교사가 되었습니다. 
행 13:1절에 보면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사람은 바로 ‘니게르라는 시므온’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흑인이었습니다. 왜냐면 시므온에게는 니게르라는 별명이 붙어있는 것으로 봐서 그가 흑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최초로 바울과 바나바 선교사를 파송한 안디옥 교회의 교사였습니다. 

② 아들들도 초대 교회의 유명한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막 15:21절에서는 두 아들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막 15: 21)
아들을 소개할 때 아버지의 이름을 말하면서 누구의 아들 아무개 라고 소개하는 것이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왜냐면 아버지가 더 많이 알려졌을 때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시몬을 소개하면서 두 아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은 두 아들의 이름이 초대교회에 이미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③ 아내는 바울의 영적 어머니의 역할을 했습니다. 

두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이기도 한 시몬(시므온) 부부는 안디옥 교회에서 사도 바울을 열심히 도와주어, 나중에 사도 바울이 루포의 어머니가 곧 자신의 어머니이기도 하다며 꼭 문안하라는 부탁을 합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롬 16: 13)

시몬 한 사람이 억지로 졌던 십자가가 자신에게는 물론 아들들과 부인에게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온 가족이 모범적으로 주님을 섬기며 온 가족이 초대 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억지로 라도 십자가를 집시다. 
억지로라도 순종하고 복종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굴복해야 하고, 자신의 경험을 포기해야 하고, 하기 싫은 것을 해야 할 수도 있고, 희생과 고난의 길을 가야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주님의 말씀에 억지로라도 순종하면 놀라운 복이 있습니다. 
이해가 온전히 되지 않아도 순종하면 기적과 복을 받고 또한 온전히 마음에 맞지 않아도 순종하면 기적과 역사가 일어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빌2:13절에 보면 우리의 마음에 소원을 두고 우리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연약한 본성을 가졌기에 항상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만 해야 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수많은 대부분에 일에 불순종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삼상 6장에 나와 있는 벧세메스로 향하는 암소 두 마리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 암소들은 뒤에서 젖 먹는 새끼 송아지들이 울며 따라오는 상황이며 또한 자신들이 벧세메스에 도착하면 죽임을 당하고 제물로 드려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뒤로 돌아보지도 않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법궤를 싣고 곧장 벧세메스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 암소들이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새끼 송아지를 떼어놓고도 즐거워하며 그렇게 벧세메스로 향하였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울면서 울면서 나아갔습니다. 새끼 송아지의 정을 끊는 아픔을 마음속으로 삼키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시 126:5-6절에 보면 눈물을 흘리며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어 가지고 돌아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러 나아가는 농부가 항상 즐거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영적인 씨, 말씀의 씨를 뿌리러 가는 자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마21장에 보면 두 아들 비유가 기록되어있습니다. 
큰 아들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긍정적으로 대답했지만 결국 가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싫다고 했지만 결국 가서 일을 했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는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마 21:31)라고 물으셨습니다. 물론 대답도 긍정적으로 하고 순종도 하면 좋겠지만 마음에 맞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거부했다가도 순종한다면 그것이 대답은 기쁘게 하고 불순종하는 것 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억지로라도 순종하는 사람을 주님은 기뻐하신 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고 십자가를 지면 좋지만 그렇지 못할때는 억지로라도 순종하고 주님이 주신 사명의 십자가를 감당해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 시몬에게 하나님이 복주신 것 처럼 주님오실 때까지 억지로라도 말씀을 순종하며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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