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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생 라합의 믿음 (수 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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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라합의 믿음 (수 2:8~14)


금요일 날 성도 가정에 심방을 가는 도중에 차 안에서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감동이 되더라구요. 태안반도가 다시 살아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잠시 2년 전인가요, 그 때가 떠오르더라구요? 당시 날씨도 을씨년스러운데 새벽기도를 마치고 40여명의 교우들과 함께 기름 유출사고로 황폐화된 태안 해변을 달려 가지 않았습니까? 실상은 뉴스를 보면서 안타까움만 있었는데 막상 그 현장을 가보니까 가슴이 매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로마서 8장의 말씀처럼 인간의 잘못 때문에 만물이 탄식하는 것을 실감한 현장이었습니다. 마치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온 인류가 죄의 고통을 짊어졌듯이, 몇 사람들의 부주의로 인하여 천혜의 환경을 자랑하던 자연이 검은 기름을 뒤집어 쓴 채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서식하고 있는 철새들도 영문도 모르는 채 새까만 기름을 뒤집어쓰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야 이유를 알고 당한 일이지만, 조개들이나 굴들, 또 바다의 생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숨을 쉬지 못한 채 대책 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기 오기 전에 기름 유출사고뉴스를 보는 순간?저 미친놈...?하고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안타까운 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으로 보이는 그 사건을 보며 분노하면서 욕하면서도 내가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고집할 수 없는 마음이 문득 들었다.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요?

나비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에드워드 로렌츠라는 미국의 기상학자가 1979년에 발표한 논문?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개 짓이 미국 텍사스 주에 발생한 토네이도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둘이 서로 관련될 수 있다는 엉뚱한 생각에 이번 기름 유출 사건과 나비효과를 한번 연관시켜 보았습니다. 잘못된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의 날개짓이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에 빠지게 했고 그들의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아픔과 상처를 주었는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삶을 다시 돌아봅니다. 나의 삶은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나 중심적인(self-centered) 태도나 모습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가면 갈수록 나 중심적인 사고나 행동이 더 늘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 있는 것일까? 그런 삶은 또한 어떤 열매를 기대할 수 있을까? 나는 또 다른 아담의 날개 짓을 하면서 지금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 한 사람 때문에 아내나 혹은 자녀들에게 주변의 사람들에게 적절하지 못한 충돌과 상처의 파장이 일어나고 있다면 바람직한 날개 짓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 그 현장에서 또 다른 날개 짓을 보았습니다. 하루 종일 수많은 사람들이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해변을 부산에서, 강원도에서, 서울에서, 이곳저곳에서 온 사람들로 꾸역꾸역 해안가를 메꾸고 있었습니다. 새까맣게 덮인 태안반도에 뒤덮인 기름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몸에서 몸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봉사자들을 보며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차라리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있었습니다. 비록 모든 것을 잃어버린 허탈감 때문에 주변 가게마다 우리 가게는 “지금부터 무기한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라는 비통한 프랑카드도 이곳 저것 붙어 있었지만 우리 일행은 이 민족이 또 다시 절망을 딛고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의 날개 짓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현장이 다시 바다가 숨 쉬고 고기가 모이는 살아있는 바다가 된 것입니다.

이 아침!
우리가 여호수아 2장을 보면서 한 사람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한 사람 아담 때문에 온 인류에게 죄가 입장되었고, 한 사람 예수 때문에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한 사람 아간 때문에 아간 식구 전체가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었고, 한 사람 노아 때문에 8식구 전체가 홍수에 멸망되지 않고 구원받았습니다. 한사람 요나 때문에 배가 흔들려 전체 사람이 고생하였고, 한 사람 롯 때문에 롯의 가정이 구원받았습니다.

여기 본문에 보세요. 누가 나옵니까? 라합이라는 한 여인이 나옵니다. 그녀는 창녀였습니다. 여러분! 당시 기생이란 위치가 어떤 것인 줄 아십니까? 기생에도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시와 가무, 서화에 능해 많은 선비들에게 추앙받던 황진이와 같은 기생이 있는가 하면, 그저 타락한 여인으로 천하고 불쌍하게 여겨지던 기생들이 있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여인은 바로 이 천하고 불쌍한 기생에 속했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보잘것없고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아가던 여인입니다. 70인역 성경에는 매춘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그만 디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녀는 드러누워 돈을 버는 직업이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직업중 가장 비참하고 천한 직업이다”

그런데 이 아침!
우리가 이 보잘 것 없는 한 여인을 지나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는 가나안 정복을 위해 이제 여리고 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그녀가 행했던 일로 인해 이스라엘의 역사와 여리고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약속의 땅’이었지 ‘고국의 땅’은 아니었습니다. 남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그 가운데 여리고를 반드시 통과해야하는데 이 성이 보통 성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여호수아가 자기 백성 가운데 충성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들여보낸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술집은 정보의 바다가 아닙니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이곳에 가면 다 알 수가 있기에 정탐꾼이 술집에 들어갔다가 어려운 곤경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벌써 이들이 들어 온 소식을 여리고 왕이 안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술집에 숨어있다는 것 까지 알고 3절에 보면 무엇이라 이야기를 합니까?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보세요. 지금 왕이 이들이 있는 것을 다 알고 ‘끌어내라’고 하지 않습니까? 누구의 말이라고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만약 라합이 왕에게 “정탐꾼은 오지 않았고, 저는 그들을 숨겨 주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가 발각되면 죽음을 맞게 되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보호해 준 것은 목숨을 건 행동이었습니다. 그녀는 충분히 이 정탐꾼들을 신고해서 포상금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4-7절을 보세요.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하였으나 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그 사람들은 요단 길로 나루턱까지 따라갔고 그 따르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죽기로 각오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것도 서슬 퍼런 왕이 직접 다그치는데 이런 거짓 보고를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여기에 대해 히11:31절에 그녀가 이렇게 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그녀의 이런 행동을 히브리 기자는 그녀가 가진 믿음 때문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가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라합의 직업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당시 기생이란 위치가 어떤 것인 줄 아십니까? 그녀는 아모리 족속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하고 잘 알려진 기생이었습니다. 당시의 여성들은 남편의 전유물로 여겨졌고, 이 여인은 그러한 시대에 음란을 행하며 삶을 연명해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라합은 자신의 집에 출입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거대한 홍해를 모두 살아서 걸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놀랄만한 소식이었습니다. 또한 요단 동편에 큰 세력을 차지하고 있던 아모리 족속을 진멸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라합에게 들려온 소식들은 한결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승장구했다는 소식들이었습니다. 라합은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시고 인도하신 그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주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권능의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다는 약속의 말씀에 관한 소식을 들은 라합은 마음에 결심을 하게 됩니다. 여리고 성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소식을 들었지만, 그녀만이 구원의 소식에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로마서 10:17에서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다는 것은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주의 구원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믿음이 생겨나며, 그 믿음이 바로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할 것입니다. 라합이 가진 믿음의 본질은 그녀가 들었던 이 모든 정보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지적(知的)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여리고의 모든 사람들은 이방신을 섬겼지만, 라합은 상천(上天)하지(下地)에 진정한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인 것을 듣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여기, 자기 집에 숨은 정탐꾼에게 무엇이라 이야기를 합니까? 8-11절을 보십시오. 라합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두 명의 정탐꾼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라 이야기를 합니까? 8-11절의 내용을 제가 쉽게 표현을 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신 것을 압니다. 우리는 당신들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혀 있고, 이 땅의 주민들은 모두 하나같이 당신들 때문에 간담이 서늘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들 앞에서 홍해를 마르게 하셨으며 요단강 동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어떻게 전멸시켜서 희생제물로 바쳤는가 하는 소식을 우리 사람들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간담이 서늘했고, 당신들 때문에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과연 주 당신들의 하나님만이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 위에서, 참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제안합니까? 12-13절에 보십시오.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무슨 말입니까?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 승리의 하나님이신 줄로 확신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신의 생명과 가족을 구원해 줄 것을 요청하고 정탐꾼과 담판을 지었던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선대하였은즉…모든 자를 살려 주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서 선대란 히브리 원문에서 ‘헤세드’로 표현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무한한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즉 라합은 정탐꾼들을 향해 “내가 목숨을 걸고 자비와 사랑을 베풀었으니 너희도 나와 우리 가족을 향해서 이 무한한 사랑을 베풀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이 라합의 행동을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야고보서 2:22에 보면, “기생 라합이…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행동하는 신앙인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진정 우리의 신앙고백을 따라 행할 때 별처럼 빛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아름답습니다. 모든 세대로부터 라합의 이름이 아름답게 일컬어지듯이, 우리도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삶을 산다면 모든 세대로부터 아름답게 일컬어질 것입니다. 이에 정탐꾼들은 여자에게 약속을 하였고, 자기들의 목숨을 걸고라도 약속한 것은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정탐꾼들이 무사히 갈 때까지 밀고하지 않겠다고 서로가 약속을 했습니다. 기생 라합은 마침 성벽 위에 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정탐꾼은 밧줄을 매고 성벽을 타고 내려왔고, 바로 그 자리에 붉은 줄을 매어 놓으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오늘 기생 라합의 주도면밀한 선택을 보면 얼마나 당차 보이는지 모릅니다. 여리고라는 도시는 다 망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쳐들어올 때 반드시 무너지고, 사기는 땅에 떨어진 나라요, 운명이 끝난 나라였습니다. 기생 라합은 여기서 망하는 조국 여리고와 함께 죽느냐, 아니면 이스라엘에 들어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새롭게 사느냐 하는 기로에 놓였습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여리고가 어떤 성입니까? 난공불락의 막강한 성이었습니다. 이곳은 요단 강을 건너 진입해 들어가는 가나안 땅의 거대한 광야지대 가운데 유일하게 오아시스로 형성된 도시였습니다. 수많은 종려나무가 이 여리고 성에 있었고, 많은 여행자들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머물렀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리고 성은 가나안에 직접 진입해 들어가는 목줄에 해당하는 지역이었으므로 여리고 주민들은 자신들의 성을 지키기 위해 내벽과 외벽을 튼튼히 쌓았습니다. 여리고 성의 내벽은 2m나 되었고, 외벽도 4m에 이르렀습니다. 내벽과 외벽사이에는 5m의 간격이 있었으므로 여리고 성의 성벽은 무려 11m의 두께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리고 주민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당시의 그 어떤 강력한 무기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강한 성벽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리고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자신들의 안전한 도피성인 여리고 성을 하나님보다도 더 강한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에게 다가오는 이스라엘을 별로 두렵게 여기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것이 여리고성이 멸망한 원인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를 보호해 줄 안전한 도피성을 쌓으려고 합니다. 물질의 도피성, 토지의 도피성, 보석의 도피성을 쌓습니다. 그 성이 안전하다며 그 속에서 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쌓는 성은 결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될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마치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함성에 무너져 내린 것처럼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안전지대라고 그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영혼은 결코 무너져 내리지 않습니다. 영원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안전지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과 영혼을 영원히 무너지지 아니할 도성인 전능하신 하나님의 품안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앞에 의탁하시기 바랍니다. 라합은 바로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비록 지금은 풍족한 물과 비옥한 곡창지대를 가지고 있어 안전하고 평화로워 보이며, 든든한 성벽 때문에 어떤 민족도 감히 무너뜨리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그 성을 무너뜨리면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소유하였고, 그 지식으로부터 참된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위대한 특징인 행동하는 결단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의 믿음대로 살지 못합니다. ‘신앙고백 따로, 삶 따로’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라합은 달랐습니다. 라합은 자신의 신앙고백대로 생애를 하나님께 의탁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믿는 자를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라합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 주었던 것입니다.

어떤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경쟁자들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러한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한 청년이 아주 작은 차를 타고서 시골 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몹시 나빴습니다. 비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차를 몰고 가다가 어느 시골 동네 어귀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그곳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는 세 사람이 비를 맞고서 초조한 모습으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자신의 차에 한 사람을 더 태울 수 있었기 때문에 차를 멈추었습니다.

청년은 차를 세우고서 그 세 사람을 가만히 눈여겨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병들어 신음하고 있는 할머니였습니다. 또 한 사람은 의사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의사는 과거에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자기를 살려준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 다른 한 사람은 묘령의 아가씨였습니다. 그 청년이 지금껏 찾아오던 이상형의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의 차는 너무 작아서 단 한 사람만 태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설명이 주어진 후에 드디어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러한 경우를 만났다면 당신은 세 사람 중에서 누구를 태우겠습니까?"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우수한 성적으로 입사한 어떤 사원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저는 제 자동차의 열쇠를 의사 선생님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의사 선생님이 그 병든 할머니를 얼른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잘 치료해 드릴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저는 제가 찾던 이상형의 여인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대답입니까? 소위 말하는 win-win입니다. 다 이기는 것입니다. 나도 좋고, 너도 좋고, 다 함께 좋은 것입니다. 다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은 회사뿐만 아니고 어떠한 단체든지 큰 유익을 줄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생 라합의 믿음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그의 믿음으로 인해서 두 정탐꾼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으로 인해서 자신만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마1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 46명중에 라합의 이름이 등장합니다(마 1:5). 그 중에 5명이 여자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거룩한 여자가 아니라 창녀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데 공헌한 5대 여걸 중에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저히 일어설 것 같지 않는 한 인생이 이처럼 오고 오는 세대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약 그녀가 자신만을 위해 계속 살았다면 그녀의 인생은 창녀로 비참하게 썩어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찮은 여인이 주님의 도구로 자신을 온전히 바쳤을 때 그는 자신과 가족과 더 나아가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기생 라합을 통해 아무리 하찮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 인생을 주님의 도구로 바칠 때 그 삶의 가치가 얼마나 영원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증명해 준 위대한 증인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라합이란 이 이름은 더 이상 비천한 창녀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녀야말로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위대한 신앙의 영원한 표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현재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우리를 판단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과거에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그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학벌과 가문을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의 학벌과 가문이 미천하다 할지라도 행동하는 믿음을 보시고 우리의 삶을 바꾸어 주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과거를 불태워 버리는 분이십니다. 과거의 수치와 죄와, 그리고 연약함을 모두 태워 버리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온전히 서게 될 때 우리의 인생을 새것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라합의 가문과 다윗의 가문을 일으키셨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일으켜 가십니다.

우리 역시 바른 신앙고백을 하고, 그 고백에 따른 삶을 살아갈 때 여러분의 인생이 새로워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시대를 새롭게 바꾸어 가는 믿음의 용장으로 여러분의 생애와 후손의 생애를 주님께서 세워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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