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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힘차게 달리는 사람들 (빌 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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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차게 달리는 사람들  (빌 3:12~16)


1. 달리는 사람들

성도 여러분,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는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축구, 야구, 농구 순이라고 합니다. 물론 프로야구 시즌에는 야구가, 프로농구 시즌에는 농구가 잠시 1위를 차지하기도 하지만, 축구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주 오래 전, 옛날 사람들이 즐겼던 스포츠는 무엇일까요? 우리 조상들은 줄다리기, 널뛰기, 그네타기, 씨름, 제기차기, 공기놀이, 구슬치기, 사냥 등을 즐겼다고 합니다. 반면에 옛날 서양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고, 또 자주 열렸던 스포츠 대회는 달리기였습니다. 고대 올림피아드는 약 192m를 달리는 것이 주 종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4회 때부터 이 길이를 왕복달리기 하는 것이 추가되었고, 18회 때부터 멀리뛰기 창던지기 등이 추가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마라톤은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이 열린 아테네 대회 때부터 정식 종목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옛날 서양에서 운동하면, 그것은 곧 달리기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는 이 달리기와 관련된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인 빌립보서의 기록자인 바울 사도가 달리기와 관련된 표현을 아주 많이 썼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지금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 가면 틀림없이 유대주의자와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될 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말리는 제자와 동료와 성도들에게 마지막 유언처럼 말하기를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했습니다. 즉 바울 사도는 자신은 달리는 사람인데, 아직 목표 지점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자신이 체포되고, 혹 죽을지도 모르는 장애와 난관이 앞에 있어도 멈출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9장 24절 이하에서 바울 사도는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말한 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즉 바울은 자신이 지금 인생 운동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대표선수로 열심히 달리고 있노라고 하면서, 다른 성도들도 자신처럼 그렇게 열심히 달리라고 독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기에 대한 바울 사도의 세 번째 말씀은 오늘 본문입니다. 그리고 달리기와 관련된 바울의 마지막 말씀이 디모데후서에 나옵니다. 바울은 그 생애 마지막 성경 기록인 디모데후서 4장 1절부터 8절에서 자신의 지난 생애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잘 싸웠다. 나는 달려갈 길을 다 달렸다. 그리고 나의 믿음을 지켰다.’ 바울은 말하기를 자신은 평생을 달려왔고, 이제 그 끝이 보이는 자리까지 왔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평생을 달리는 사람, 평생 뛰면서 살아온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성도 여러분, 새벽이나 저녁에 인근 학교나 해안도로 그리고 무학산이나 청량산 자락으로 가 보십시오. 걷고 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디 그 뿐입니까? 헬스클럽에서 뛰고, 집에다 러닝머신을 갖다놓고 거기서 뛰고 …. 뛰는 사람들, 달리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아졌습니다. 저도 요즘 새로운 마음을 먹고 뛰려고 하는데요, 제가 보기엔 여러분 중에도 뛰어야 할 사람들이 많아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도 여러분에게 ‘달리라’고 말합니다. 물론 운동으로 ‘달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달리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2. 달려야 하는 사람들

1) “푯대를 향하여”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다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힘써 왔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명은 복음의 그릇, 특별히 이방인을 위한 복음 전달자로서의 사명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바울은 3차에 걸친 험난하고도 긴 선교 여행을 했고,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했던 그의 소망이 이루어져 비록 죄수의 신분이지만 로마로 왔습니다. 

그는 60세를 넘긴 나이에 로마에서 이 빌립보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로서는 할 만큼 했고, 젊은 시절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어느 정도 완수한 자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때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12).” 무슨 얘기입니까? 자신은 아직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죄수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계속 달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의 목표가 무엇이었기에 그는 아직도 달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일관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냥 막연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전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일평생 자신이 뛰어가야 할 목표를 마음속에 분명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푯대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흐트러지는 일이 생겨도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왔습니다. 그 푯대가 무엇입니까? 

바울의 푯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었습니다. 그의 인생 푯대는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기 때문에 온 천하만국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 15장에서 당시 세상의 끝으로 여겨지던 스페인으로 가기를 소망했습니다. 즉 ‘아직 주님의 복음을 듣지 못한 민족과 나라가 남아 있는 이상은, 나는 아직 푯대를 붙잡지 못했다, 나는 골인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본문에서 60이 넘은 나이에, 로마의 죄수로 있으면서도 달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목표를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까? 아님 멈추어 서 있거나 혹 쉬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달려야 할 이유를 모르거나, 목표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유명한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 박사가 뉴욕에서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던 중, 승무원이 검표를 시작했습니다. 승무원이 다가오자 아인슈타인 박사는 표를 찾았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 승무원은 “아인슈타인 박사님, 저는 당신을 잘 압니다. 차표 없이 기차를 타실 분이 아니시니 제가 믿고 그냥 가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승무원이 기차 제일 마지막 칸까지 검표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에 보니까 아인슈타인이 그때까지 표를 찾고 있었습니다. 승무원은 “표를 확인한 것으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더 이상 찾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그게 아닙니다. 표에 내가 내릴 역이 기록되어 있는데 내가 어느 역에서 내리는지 알 수가 없어 표를 찾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기차를 타기는 탔는데 어느 역에 내려야하는지를 잊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표 없는 인생이 이와 같습니다. 자신이 어디로 가며,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 인생은 이렇게 방황하고 그러다가 실패하는 인생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일본 작가 미네노 다쓰히로가 쓴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한 고등학생이 아주 우수한 성적을 받아 원하던 대학에 들어간 후 돌연 자살을 했습니다. 비통하게 여긴 부모가 그 아들의 장례를 치른 후, 아들의 일기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일기장에는 유서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저는 오로지 대학입시만을 위해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합격한 지금 그 모든 것이 헛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또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모르고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람은 저마다 어떤 가치와 목적을 향해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과, 그리고 그 목표가 분명하지 못할 때는 사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가치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前) 행정자치부 장관 박명재 씨는 경북 포항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얼룩진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였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에게 무관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밥을 지어야 했으며 우물까지 밥 지을 물을 길으러 다녀야 했습니다. 너무 어려서 물동이를 이는 것조차 어려워 동네 아주머니들이 이워줄 때까지 기다려야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 지독한 가난과 질병이 그를 교회에 나가게 하고 신앙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가난과 질병을 몰아내는 길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렵게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장로님인 면장이 친척이 서울에서 운영하는 약국에 점원으로 취직을 시켜주었습니다. 낮에는 약국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약국 골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서울의 한 약국의 뒷방살이를 하던 그의 유일한 기쁨은 성경을 읽고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신앙 때문에 외로움을 참아낼 수 있었고 믿음 때문에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약국 주인의 배려로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거기서 열심히 공부하여 중동고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그 후 그는 연세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군 제대 후, 그는 스스로 삶의 목표를 정했습니다. 고시공부를 하기로 한 것인데요. 그런데 고시 공부에 매달리자니 학비도 생활비도 아무 것도 없었고 도와줄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총장을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겁도 없이 막무가내로 총장을 찾아갔습니다. “총장님, 이제부터 고시공부를 시작할 것입니다. 제게 장학금을 주십시오.” 이 당돌한 학생을 한참 지켜보던 총장은 “좋다, 장학금을 줄 테니 열심히 하거라.” 하면서 허락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심치선 교수와 새문안 교회 장로인 노정현 교수를 찾아갔습니다. “고시 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제 생활비를 도와주십시오.” 그들 역시 무턱대고 찾아 온 이 당돌한 학생의 모습에서 진심을 읽고서는 “생활비를 줄 테니 공부에만 전념해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그는 행정고시에 도전했는데요, 합격하기까지 한 번도 잠을 제대로 자지 않았으며, 먹는 것, 쉬는 것, 노는 것조차도 잊어가면서 오로지 고시 공부에만 전념했습니다. 
한 마디로 사투를 벌인 것이죠.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행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총무처 근무를 시작으로 청와대 행정 비서관 등을 거쳐 행정자치부 장관까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가정을 책임져야 했던 한 아이, 그러나 주님을 믿는 신앙이 배짱이 되어 고시에 도전했고, 그는 장관직에까지 올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목표,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이 되고 싶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옷 갈아입고 밥 먹고 직장에 나가는 등 매일 매일의 생활을 합니다. 그렇게 모두가 거의 똑 같은 삶을 살지만, 그렇다고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사는 그 생활 전체를 꿰뚫는 삶의 목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죠.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주신 바로 그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삶이어야 하는 것이죠. 

여러분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렇다고 바울처럼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목표로 삼으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가정과 고향과 조국을 떠나 복음을 전하는 것을 여러분의 목표로 삼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으로서, 주부로서, 아버지로서, 엄마로서, 학생으로서, 하나님께서 여러분 자신과 처지에 맞추어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삶, 바로 그것이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푯대, 여러분의 목표는 무엇이며 어디입니까?

2) “달려가노라”

목표가 분명했던 바울의 삶은 “달려가노라”는 이 한 마디로 그 설명이 충분합니다. 12절에서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다”, 즉 ‘아직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13절에서도 “형제들이여, 나는 나 자신이 그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직 한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내가 어떻게 했느냐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목표를 향하여 오직 달리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도 관심도 없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학자들이 12절을 해석하면서 12절에서 볼 수 있는 바울의 모습을 다음처럼 말했습니다. “아테네에 있던 육상경기 트렉은 192미터 길이였다. 출발선에는 돌로 된 발판이 있었다. 선수들은 손을 발판에 대고 몸을 앞으로 약간 숙여 최대한 빨리 출발하도록 긴장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자신을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선수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죽도록, 아니 죽을 고비를 맞아가면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현재 로마 감옥의 죄수 신분입니다. 언제, 어떻게 자유의 몸이 될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왕 이렇게 된 것, 좀 쉬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출발 신호가 울리면 바로 내달리려고 출발선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출발신호가 “탕”라고 울리면 바울은 죽을힘을 다해 다시 달릴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대단하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100m를 달리는 선수들의 표정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요즘은 카메라의 성능과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카메라가 선수들의 동작 하나 하나, 얼굴 표정 하나 하나까지를 자세하게 보여줍니다. 전력 질주하는 선수들의 얼굴 표정, 그들의 눈빛, 그리고 그들의 얼굴 근육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다 보여줍니다. 온갖 표정을 다 지으면서, 얼굴 살이 씰룩씰룩 하면서, 정말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그들의 모습은 애처롭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마지막 골인지점까지 죽어라고 달립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바울 사도는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이러한 달리기 선수들처럼, 바울 자신처럼 달리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24절,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 신앙생활, 즉 성도의 삶은 달음질과 같고, 달음질 하듯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달리기 선수라는 말이며, 그렇게 달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푯대, 즉 목표가 분명한 사람들은 달려야 합니다. 그가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직 목표점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우리 주님이 주실 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상은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서거나 아님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생명의 관을 얻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달려야 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주님을 믿은 뒤에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모든 축복과 약속들을 아직 다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완전’ 혹은 ‘온전함’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나라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주님의 복음을 아직 듣지 못한 부족과 민족들이 많기 때문이고, 주님의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너무나 많기 때문에 달려야 합니다. 

운동선수들은 결국에는 썩고 말 승리의 관을 얻기 위해 그렇게 죽자고 달립니다. 하지만 성도는 영원히 썩지 않고 없어지거나 지워지지 않을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운동선수들보다 더한 자세로 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기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걸어가듯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에서 죽어라고 달렸으니 신앙생활은 좀 여유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달음질로서의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주님을 믿고 그 은혜를 입은 이상 여러분은 달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요! 

3. “상을 위하여”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피곤하시죠? 제 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직장인들은 일주일 내내 종일토록 일과 사람에 시달리다가 이레 만에 교회 오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일주일에 겨우 하루 쉼을 얻어 교회 오는 것이 너무나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교회 와서 예배 시간에 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진심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지난 한 주간을 죽자고 달려오신 여러분을 향해서 “달려라” “아직 쉬거나 멈출 때가 아니다”라고 명령합니다. 평생을 복음을 위하여 살아온 바울, 이미 60이 넘었고, 로마에 있는 죄수의 신분인 그가 말하는 것을 들으십시오. ‘나는 지금 출발하기 위해 출발선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 달리기 선수처럼 달릴 준비를 하고 있소. 나는 절대로 쉬거나 멈추지 않고 내 인생 달리기를 계속 할 것이오.’ 

무라카미 하루키는 현대 일본 최고의 소설가입니다. 일본 소설가 중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으며, 세 번이나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라는 것과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작가입니다. 그의 일, 그의 업은 소설가와 달리기 두 가지라고 스스로 말합니다. 달릴 때 그는 자신이 누군지,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글을 쓸 것인지를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달리기와 소설쓰기가 자신을 지탱하는 두 축이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나는 달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30년 전부터 현재까지 그는 매일 조깅을 하고, 매년 한 번 이상은 마라톤 풀코스를 달렸는데 지금까지 30번 가까이 완주했습니다. 

“달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저는 이 말이 바로 바울 사도의 말처럼 들립니다. 바울이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사명을 위하여 달리는 것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알았기 때문이지요. 그런 바울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모든 성도 역시 <달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그것도 이 땅에서 천국까지 이어지는 장거리 경주를 쉬지 않고 달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골인지점은 천국입니다.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달려야 하는 것이죠.

사도 바울은 육상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힘들게 훈련을 하고 경기에 임하지만 상을 얻는 자는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을 지켜보면서, 또 우승한 자가 누리는 화려한 명예와 영광을 보면서, 장차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될 상은 얼마나 찬란할까 하고 상상했습니다. 그리고 달리기 경기를 지켜보던 바울은 거기서 아주 소중한 진리를 깨닫고 각오를 새롭게 다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이 시간 한 번 상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운동경기를 하고서 시상대에 오르는 사람들을 보셨습니까? 팡파르가 울려 퍼지고 상을 받을 선수의 이름이 불립니다. 그러면 선수는 상을 받기 위해 시상대로 나옵니다. 모든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에게 상이 주어집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날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머잖아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관중석에는 먼저 간 성도들이 축하의 박수를 치고 있는 가운데, 여러분이 시상대에 올라서서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될 것입니다.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을 다 이루기까지, 여러분이 천국의 시상대에 서는 그날까지 힘차게 달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사명을 이루는 것만, 오직 여러분이 주님 앞에서 상받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실 것이고, 여러분의 삶에 필요한 은혜들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까지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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