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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섭리 (룻 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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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 (룻 3:1~18)

룻기 2장은 우연한 일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과 보아스의 인애를 중심으로 전개했습니다. 3장은 계획된 일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과 룻의 인애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나오미는 1장 9절에서 며느리들에게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했었는데, 3장에서는 그 축복의 도구가 됩니다. 즉, 그녀는 딸처럼 사랑하는 며느리가 안식할 보금자리를 얻도록 작전을 계획합니다. 나오미는 보리 수확기에 베들레헴에 돌아왔었는데(1:22), 2절을 보면 타작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은 태양력으로 4월 중순경에 보리를 추수하여 건기가 시작되는 5월말이나 6월에 타작합니다. 그렇다면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친족”임을 인식한 지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지났지요(2:20).

그 기간 동안 나오미는 룻에게 ‘기업 무르는’ 고엘 제도(레 25장)와 수혼 제도(신 25장)에 대해 가르쳤을 것입니다. 고엘 제도란 가난한 친족의 땅을 대신 구입해서 원상태로 회복시켜주는 제도인데,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한 번 베푸신 기업은 영원히 상실될 수는 없음을 상징합니다. 수혼 제도란 자녀 없이 죽은 형의 아내를 동생이 취해서 형의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제도인데, 약속하신 메시아의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려는 구속사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나오미는 그러한 성경의 가르침들을 따라서 룻이 청혼하도록 지시합니다(3-4).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라는 말은 훗날 다윗이 죽은 아들에 대한 애통을 끝내고 일상생활로 돌아올 때 행했던 행동과 똑같습니다(삼하 12:20). 즉, 룻이 ‘과부의 의복’(창 38:14)을 벗고 남편을 얻도록 준비시키는 과정이라 볼 수 있지요.
 “그 발치 이불을 들고”라는 구절은 직역하면 ‘그의 발들을 드러내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발’이 생식기에 대한 완곡한 표현일 때는 항상 레겔(lg<r,)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여기서는 같은 어원이면서도 마르겔라(hl;Ger]m')라는 단어 사용해서 완곡한 의미와 구별시킵니다. 발들을 노출시켜 두면 보아스가 추운 밤중에 자연스럽게 깰 것이고 그러면 룻을 발견해서 그녀가 어떻게 해야 할 지 말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나오미의 의도가 보아스를 유혹하는데 있지 않았다면, 왜 은밀한 야밤에 청혼하게 했을까요? 율법에 따르면 기업 무를 자도 원치 않으면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 신 벗기운 자의 집’(신 25:9-10)이라고 부르는 거절 절차만 감수하면 됩니다. 나오미로서는 자기 가족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베풀어준 보아스에게 당당하게 요구하기보다 겸손히 부탁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또한 보아스가 거절할지라도 공개적인 수치 절차를 당하지 않도록 배려함과 동시에 거절당한 룻의 상처를 최소화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싶었겠지요.

나오미의 계획을 들은 룻은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고 합니다(5). 그리고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시모의 명대로 다” 행했습니다(6). 나오미의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룻의 입장에서는 순종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남성을 유혹하는 부도덕한 여인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시어머니의 청혼 지시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일치했기 때문에 룻은 비난을 각오하고 순종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시모에게 토 달지 않고 순종한 윤리적 모범으로서의 며느리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기꺼이 오해받을 위험을 각오하는 참된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7-8절을 보면, 보아스는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서 가서 노적가리 곁에” 누웠고, 룻은 “가만히 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습니다. 그리고 “밤중에 그 사람이 놀라 몸을 돌이켜” 발치에 누워있는 여인을 발견했습니다. 놀랐다는 말은 ‘두려워 떨다’(출 19:6)는 의미도 있지만 ‘진동하다’(출 19:18)는 의미도 있습니다. 보아스가 두려워서 떨었을 수도 있지만, 그 보다 발들이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 밤의 추위에 떨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떨다가 잠이 살짝 깬 상태에서 몸을 돌이키는 순간 룻을 발견했겠지요.

“네가 누구뇨”라고 묻자 룻은 평소처럼 ‘모압 소녀 룻’이라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체를 보아스와 관련하여 “당신의 시녀 룻”이라 답변합니다.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라는 요청은 성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만, 남자가 옷자락을 여자에게 덮는 것은 당시 근동의 청혼 관습입니다. 즉, ‘결혼해 주세요. 당신은 고엘이니까요’라는 의미지요. 여호와의 날개 아래서 상 받도록 축복했던 보아스에게 그 날개 역할을 해달라는 요청이지요. 보아스도 그 말을 결혼하기 원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룻이 통상적인 방법을 따르는 대신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결혼하려는 것을 보고 보아스는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칭찬합니다.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10). 여기서 ‘헤세드’(인애)라는 말이 다시 등장합니다. 룻의 처음 인애는 텅 빈 시어머니를 따라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로 결정한 것과 관련이 있고, 나중 인애는 자기 뜻대로 결혼할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결혼한 것과 관련됩니다.
 룻은 하나님 백성이라는 이름만 얻는데 만족한 것이 아니라, 손해와 아픔이 따를지라도 철저하게 하나님 백성으로 살려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 신앙이 ‘인애’라는 성품으로 표출되었지요.

보아스의 인애가 가진 자의 인애였다면, 룻의 인애는 가진 것 없는 자의 인애입니다. 룻은 자기도 몹시 어려운 처지에 있었지만, 자기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시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시어머니에게 뭔가 보답 받고자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든 이해관계를 초탈해서 다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인애의 삶을 살았습니다.
 룻의 인애는 나보다 타인을 복되게 하려는 모습으로, 할 도리와 의무를 넘어서서 자원하여 섬기는 모습으로, 그러한 삶을 위해서 자기희생과 아픔을 각오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 백성다운 인애의 삶을 살아왔던 보아스조차 룻이 참으로 하나님 백성의 성숙한 모습을 가졌음을 발견하고 축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보아스는 먼저 “내 딸”이라 부르면서 룻의 행동을 성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룻을 구혼이 거절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행여나 부도덕한 여인으로 오해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도록 “두려워 말라”고 합니다(11a). 그리고 룻의 인애에 감동하여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11b)고 청혼을 수락합니다. 룻이 ‘당신의 시녀’라 소개했던 것처럼 보아스는 ‘그녀의 시종’이 되어 그녀의 말대로 행하려 합니다. 인애의 성품이 서로에게 종이 되어 섬기는 모습으로 드러났지요.

사실 나오미의 계획은 일종의 모험이었습니다. 종이 주인에게, 이방인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가난한 자가 유력한 자에게 구혼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거의 성사되기 불가능한 혼사였습니다. 그들은 ‘나는 말씀대로 행하지만 그 사람도 말씀대로 반응할까?’라는 의혹의 장벽을 극복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어떻게 반응하든 나는 말씀대로 행한다’는 각오가 있어야만 넘어 설 수 있는 장벽이었지요. 나오미와 룻은 ‘거절당하면 거절당하고 수치를 당하면 수치를 당하리라’는 각오 가운데 말씀대로 계획하고 실행합니다. ‘우연’ 속에 작용했던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의 손길은 말씀에 순종하려는 이들의 ‘계획’ 속에서도 작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아스의 반응까지도 주관하셔서 혼사가 형통하게 진행되도록 하셨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행동을 부도덕하게 해석하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냅니다.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11c)고 칭송하지요. 2장 1절에서 보아스는 ‘유력한 자’(lyIx;ê rABæGI 깁보르 하일)로 소개되었는데 여기서 룻은 ‘현숙한 자’(lyIx:ß tv,ae 에쉐트 하일)라 칭해집니다. 직역하면 ‘강한 용사’ ‘강한 여자’로 의미가 같습니다. 룻기 기자가 보아스와 룻을 같은 수준의 사람으로 기술한 셈이지요. 마지막으로 보아스는 한 가지 불편한 진실을 밝힙니다.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12)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요.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의 ‘유일한’ 구속자가 아니라 ‘한’ 구속자일 따름이었습니다. 구속의 우선순위는 더 가까운 다른 친족에게 있었고, 그가 구속하기 원하면 룻은 그의 아내가 되겠지요. 보아스가 원했다면 그런 불편한 사실쯤은 무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연로한 나이에 현숙한 여인에게 청혼을 받았으니,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사천리로 결혼을 추진할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보아스는 불편한 진실을 감춘 채 조급하게 지름길로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빨리 해결하기보다 바르게 해결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일이 성공하기보다 성경이 가르치는 ‘정도’를 걷고자 했습니다. 우선권을 가진 친족이 고엘의 의무를 감당하지 않을 때, 그 때는 그가 반드시 구속하겠다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13).

이제 보아스는 사람이 피차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룻이 타작마당을 떠나도록 돕습니다(14). 불필요한 오해를 예방하고 행여나 가까운 친족이 룻을 구속하려 할 경우 서로에게 불편한 일을 피하는 등의 이유가 있었겠지요. 물론 말씀에 분명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는 오해를 받을지라도 감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오해받아도 나만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면 된다는 자세보다 오해 받을 만한 상황조차 예방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보다 성숙한 태도이지요. 그 후 “빈손으로 네 시모에게 가지말라”는 의미로 보리를 룻에게 줍니다(15, 17). 룻은 이 모든 일을 시어머니에게 보고했고, 나오미는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18)고 말합니다. 일차적으로는 보아스를 신뢰하는 말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이면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밀한 손길을 신뢰하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은밀한 손길을 믿는 사람은 인애의 삶을 삽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든 나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겠다는 자세로 인애의 삶을 드러나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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