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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사 5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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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사 58:1~14)

   
오늘 읽은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거짓 신앙과 사회의 죄악상을 고발하는 하나님의 책망으로 시작됩니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크게 외치고 아끼지 말며 나의 백성에게 그 허물과 죄를 고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적하고 계시는 이스라엘의 죄악이 무엇일까요? 이사야 58장의 주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거짓 예배를 드리며 세상의 약자들에 대한 폭력과 착취를 일삼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엄한 책망과 심판의 경고입니다. 그리고 죄악이 폭로되었으니 이제 하나님께 돌아와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의를 행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치시고 그들의 조상 야곱에게 주셨던 유산을 받아 살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수요일 성경공부반에서는 지난 수요일과 이번 수요일에 이사야 선지자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에 이스라엘의 정치상황은 부패와 폭력으로 가득하였으며 여호와 신앙은 한 마디로 형식주의와 겉치레였습니다. 경제상황은 그런대로 번영의 길을 달리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부와 풍요는 일부 왕족과 귀족들에게 해당된 것이고 일반 백성들은 절대 빈곤과 압제 속에 한숨을 짓고 있었습니다. 왕과 귀족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힘 없는 백성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도적질하였습니다.  제사장들과 거짓 선지자들은 부패한 권력과 손을 잡고 그들의 악한 행위를 눈 감아주고 아첨하며 거짓 평화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러고도 그들은 천연덕스럽게 안식일과 절기 때마다 수 많은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손에는 무죄한 자들의 피가 가득하면서 얼굴에는 평화를 가장하고 하나님께 나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의 악행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노를 발하셨습니다. 너희가 제물로 드리는 수양과 수송아지와 어린 양의 피를 기뻐하지 않으니 내가 원하지 않는 헛된 제물을 다시는 가져오지 말라 하십니다. 너희의 손에 억울한 자들의 피가 가득하니 너희가 나에게 나와 아무리 많이 기도할지라도 듣지 않을 것이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이스라엘의 악함과 뻔뻔스러움에 진절머리가 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중성을 어떻게 고발하고 계시는지 이사야 29장1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으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다만 사람들에게 배운 관습을 따를 뿐이라’(사29:13) 하고 탄식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 미가 역시 동일한 말씀으로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예배 행위와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을 선포하였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에게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6-8)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무시무시한 심판의 경고와 함께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너희가 스스로 씻으며 깨끗하게 하여 내 눈 앞에서 너희의 악한 일들을 버리고 그치며 선행을 배우고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들을 도와주며 고아들의 억울함을 들어주고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심판으로부터 회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아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사 1장)

오늘 본문 이사야 5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만천하에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고침 받을 수 있는 길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이 얼마나 가증한 위선자들로 살고 있는지 58장 한 장의 내용으로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이나 되듯이 날마다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의 길을 알기 좋아하고 무엇이 의로운 판단인지 나에게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한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면서 금식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주께서 우리의 금식을 알아주지 아니하십니까?  하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거짓된 금식을 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너희의 쾌락을 찾아 얻고 종들에게는 온갖 일로 혹사시키는구나. 금식을 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구나. 너희가 오늘 이런 식으로 금식하면서 어찌 너희 목소리가 나에게 들리도록 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으며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갈대처럼 머리를 숙이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있다고 하여 내가 기뻐하는 금식의 날이라 할 수 있느냐?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금식과 안식일 준수는 경건한 유대인의 최고 기준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바리새인들이 누구보다 더 잘 지키던 습관이 기도와 금식과 구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바리새인들의 거짓 행위를 무참하게 책망하고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외식적인 행위를 본 받지 말라 하셨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경건은 무엇으로 보여질까요?   주일성수와 십일조 생활, 봉사와 구제와  전도, 기도…  그런 것들은 사람들 앞에 내놓고 자랑할만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할 당연한 삶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사야 선지자와 미가 선지자 시대의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엄한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까? 오늘날로 말하자면, 주일 예배에 빠진 것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음도 아니었습니다. 형식은 있지만 그 속 알맹이가 텅 비었던 종교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종교행위는 자기들 좋은 대로,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즐기며 행하였던 일종의 퍼포먼스였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겸손한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예배가 무슨 오락과 공연처럼 자기들의 즐거움과 만족을 가져다 주는 예술행위였고 하나님은 다만 자기들의 공연을 즐기고 그 보상으로 복을 내리는 수호신으로서 존중할 뿐이었습니다. 자기들 생각과 기준으로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리면 할 일을 다했다고 스스로 만족해 하는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에서 금식하고 안식일을 율법대로 지키고 나면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이 자기들을 알아주시고 복을 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어떠하였습니까? 겉으로는 금식하면서 슬픈 얼굴을 하고 괴로운 듯 가장하지만 속으로는 자기 좋은 짓을 골라했습니다. 자기는 율법대로 금식일을 지키며 경건한 척하면서 한 집에 살고 있는 하인들과 종들에게는 금식일에도 과중한 일을 시키면서 초과 이익을 얻어내었습니다. 금식하면서 형제를 판단하고 비난하며 저주하였습니다. 나는 율법을 따라 금식하는데 너는 왜 금식하지 않느냐 비난하고 내가 옳다 네가 옳다 서로 다투며 못된 주먹질까지 하였습니다.   안식일 역시 겉으로는 잘 지키는 듯 했지만 남모르게 자기가 좋아하는 쾌락을 탐하였고 함부로 말하는 것을 예사로 여겼습니다.   

부자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는 것을 종교적인 경건 생활로 여기고 기꺼이 할 수 있지만, 하루 한 끼를 겨우 먹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금식을 밥 먹듯 해야 하는 가련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부자는 곡간에 곡식을 쌓아두고 종교적인 관습을 따라 금식을 해도 하나도 슬프지 않지만, 하루 먹을 양식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금식을 위한 금식이 아니라 먹을 것이 없어 별 수 없이 굶는 날이 태반이었습니다. 집과 땅을 저당 잡히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어린 자식들에게 나누어 줄 양식이 없어서 매일매일이 금식의 날이고 괴로움의 날이었습니다. 이처럼 둘 다 음식을 먹지 않고 있지만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그 형편이 같을 수 없었습니다.   

거짓 금식과 거짓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진정 올바른 금식을 하려고 한다면 네 악한 손에 의해 묶인 불쌍한 자들을 풀어주고, 종들에게 짐 지운 무거운 멍에를 끌러주고, 너에게 압제 당하는 자에게 자유를 주며 모든 얽매인 것들 – 그것이 저당 잡힌 토지와 노예 계약서일 수도 있습니다 - 을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굶주린 자들에게 너의 식물을 나누어 주고 집이 없어 떠도는 자들을 너의 집으로 데려오고 헐벗은 자들을 보면 네 옷을 입히고 가난한 너의 친척이 찾아오면 혹시라도 너에게 손을 벌릴까 두려워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하는 것이 내가 진정으로 기뻐하는 너희의 금식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네가 만일 이렇게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면 어두움으로 가리워진 너의 빛이 아침 빛같이 비췰 것이며, 너희의 병든 삶이 급속히 회복되고, 너를 의롭다 인정하실 분이 네 앞서 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그때에 네가 나를 부르면 내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 내가 여기 있다 할 것이다. 네가 만일 다른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고, 남을 향한 손가락질을 거두고 거친 말을 그치며, 굶주린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빛나며, 너의 어두움이 대낮처럼 될 것이다. 내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땅에서도 너희를 만족시키고 너의 뼈에 힘을 줄 것이다. 너희는 마치 물이 넉넉한 동산처럼 되고 마르지 않는 샘이 될 것이다. 너희의 후손들이 폐허가 된 성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파괴된 기초를 다시 세울 것이니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다시 세우는 사람이라, 길을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든 사람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사랑과 긍휼이 넘치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두 목회자가 크고 작은 사회 문제에 대하여 반응하는 서로 다른 행동 방식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관여하는 분야는 전혀 다른 일이지만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려 한다는 사명감에서는 서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재해가 발생한 곳에 어김 없이 나타나 앞장 서 재해복구작업을 돕고 물질로 후원하는 등 어려움을 만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또 한 사람은 각종 사회 분규 현장에 빠짐 없이 나타나 약자 편에 서서 투쟁하는 일에 앞장을 서 매스컴에 얼굴이 자주 비치는 사람입니다.   

매스컴의 생리가 그렇듯 재해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선행은 어지간한 일 아니면 기사거리가 되지 않지만 굵직한 분규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투쟁과 진압 과정은 세상에 신속히 보도가 되고 거기에 단골로 등장하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 미국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시청 앞 촛불 시위에 한국 기독교계를 대변하는 듯 앞장 서 몸을 던지며 항의하던 그 분이 진압 경찰에 맞서 몸싸움을 하다가 부상도 당하고 경찰차에 실려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유치장에 갇힌 소감을 사진과 함께 교계 신문에 올리는 등 자신의 활약상을 세상에 알리는 일도 잊지 않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이번 용산 철거민 진압 사건에도 등장하여 경찰의 과잉 진압에 대하여 당국에 항의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대체 그 분은 시간이 얼마나 많고 또 행동이 재빠른지 신출귀몰하는 홍길동처럼 국내에서 일어나는 사회문제에 여기저기 자주 등장하여 얼굴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마치 우리 나라의 정의사회 구현을 자기 홀로 책임지고 해결하려는 투사인 듯, 그리하여 이 시대의 의로운 선지자가 된 듯 여기저기 굵직한 사건 현장에 빠짐 없이 얼굴을 보입니다. 제발 그 사람의 의도가 목회자로서 개인의 정치적 종교적 입지를 다지기 위한 것이 아니고 정말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편에 계신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확신하며 이사야 선지자처럼 순전한 마음에서 그 일을 하고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용산의 재개발 지역 철거민 충돌사건이나, 이스라엘 군이 무차별 폭격을 가하는 팔레스타인 분쟁 등은 힘 있는 사람들이 약한 자들에 대한 이해와 긍휼이 부족함에서 나온 참상들이 아닐까요?  거기에 하나님 신앙을 운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용산 참사를 가져오게 된 사건의 책임자를 정부 당국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장로 대통령이 이끌어가는 정부가 힘 없는 백성들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힘으로 해결하려는 데서 발생한 오만과 범죄행위라고 규탄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교회 장로이다 보니 대통령 개인의 신앙과 용산참사 같은 현 사태를 연관 짓지 않으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형편입니다.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보겠다는 경제제일주의를 공약으로 내건 장로 대통령이 선출되었을 때 충분히 예상했던 현상이기도 합니다. 일 잘하면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고 잘못하면 기독교인들이 표를 준 장로가 잘못한다고 기독교와 하나님을 비난할 것이라는 예상입니다.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말로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면 모든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잘 사는 것을 언제나 경제적인 여유로 해석하려 드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잘 살게 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기 마련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보다 잘 살아보겠다는 기대 속에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사는 사람들이 나보다 더 쉬운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동안 나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더 어려운 형편으로 떨어지니 허탈감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겨우 목숨 부지할 정도 밖에 안 되는 생활터전 마저 개발의 바람으로 날아갈 형편이니 가난한 사람들로서는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교회 장로인 것처럼 가진 자들 중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고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소망 중에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번에 발생한 용산 참사에서 철거 반대 주민과 진압경찰이 물리적 충돌로 화재가 발생하여 여러 명이 생명을 잃고 부상을 당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습니다. 자기 재산을 지키겠다고 화염병에 신나 통으로 무장하고 투쟁하다 불에 타 죽은 사람들이나 그들을 진압하다가 함께 불에 타 숨진 진압 경찰관이나 모두 기가 막히게 가엾은 백성들입니다.    그 소중한 생명을 세상의 그 무엇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이런 슬픈 현실에서 과연 하나님의 눈이 어떤 사람들에게 머물러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첨단 무기와 상대가 안 되는 재래식 무기를 들고 이스라엘 군과 맞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마치 골리앗 앞에 선 목동 다윗처럼 싸움 상대가 안 되는 약자들입니다. 옛날에는 이스라엘의 다윗이 물맷돌을 들고 골리앗 앞에 섰는데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 팔레스타인 소년들이 물맷돌을 들고 골리앗처럼 거대한 이스라엘 군대의 탱크 앞에 서있습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양민들 속에 숨어 로켓탄을 날리는 하마스 무장 세력들의 야비함은 그렇다 치더라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할 줄도 모르는 채 폭격을 당하여 죽어가고 부상당하는 어린이들과 시민들은 지금 가장 연약한 사람들 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 대부분은 아직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교인들이니다.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내세우고 사명감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응징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힘을 과시하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대부분 회교도들입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구주로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힘 없는 그들이 무차별 퍼부어지는 이스라엘의 공습 속에서 두려움에 떨면서 얼마나 급하고 간절하게 하나님께 부르짖었을지 생각해 봅니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서 과연 하나님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을까요?    

한국 교회가 세계 어느 나라 교회 못지 않게 모이기를 힘쓰고 전도의 열정이 뜨거우며 겉으로 보기에도 교회 성장의 기록은 가히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 급성장의 길을 걸었습니다. 비록 그 성장률이 후퇴하고 있다고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한국교회는 여전히 화려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주일마다 예배당으로 물밀듯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예배자들로 대형 교회 예배당 주변은 교통혼잡을 가져올 정도입니다. 한국교회 하면 잘 모이고 열심히 기도하는 교회라고 떠올릴 만큼 열정이 있는 교회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상위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더 이상 약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숫자와 기능 면에서 얼마든지 힘을 과시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있는 기관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들의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가진 자로서 갖지 못한 자들에 대한 마음, 있는 자로서 없는 자들에 대한 마음, 큰 자로서 작은 자들에 대한 넉넉하고 여유 있는 마음이 한국 교회와 우리 교회 그리고 교우 각자에게 있는지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는 교회와 기독인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예배와 경건생활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살아 있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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