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5) (창 24:34~49)

  • 잡초 잡초
  • 299
  • 0

첨부 1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5) (창 24:34~49)


유명한 빅터 프랭클린의 단편 소설 '곡예사의 헌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난쟁이 곡예사가 있었습니다. 이 난쟁이는 거꾸로 서서 공을 돌리고 접시를 돌리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돈을 던져 주어서 그것으로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그나마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불쌍히 여긴 신부님이 성당에 데려다가 심부름하며 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난쟁이가 성당에 온 뒤로부터 차츰 차츰 얼굴에 생기를 잃어가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미사를 드리면서 이런 얘기를 듣습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가진 재능을 가지고 주님께 드리는 자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다.” 

그때 난쟁이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가진 재능은 거꾸로 서서 공 굴리는 것과 접시 돌리는 것 밖에 없는데 이것이라도 주님께 드리자.’ 그래서 밝은 낮에 드리자니 창피해서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지 않는 새벽에 일어나서 성모 마리아상 앞에 가서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발가락으로 접시를 돌리고 자기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재주를 부렸습니다. 난쟁이는 최선을 다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주를 다 부렸습니다. 이 일을 매일 매일 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난쟁이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삶에 보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청소부가 성당에 가서 청소를 하려고 하는데 난쟁이가 거룩한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재주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서 신부님에게 달려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청소부의 얘기를 듣고 신부님이 사실을 확인하려고 새벽에 숨어서 지켜보았습니다. 난쟁이가 무릎을 꿇고 “성모 마리아님, 제가 가진 재주는 이것뿐입니다.” 하면서 온갖 재주를 다 부리며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쇼를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신부님이 혼을 내려고 가는 순간 성모 마리아가 내려오더니 무릎을 굽혀 한쪽 손으로 그 곡예사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대가 나를 기쁘게 했노라 그대 땀을 내가 받았노라. 그대 눈물을 받았노라 그대의 재능을 내가 받았노라.”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신부님이 무릎을 꿇고 “오, 주여, 나도 저 난쟁이와 같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땀을 쏟아 주께 드릴 수 있는 종이 되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했다는 내용이 있는 책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자기만의 재능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평생을 그 재능을 사명으로 여겨서 하나님께 돌려드리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이는 죽을 때까지 그 재능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지고 죽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전자를 사명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불행한 사람이라는 말 외에 더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유명한 아브라함의 종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평생 아브라함의 종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한 번도 역사의 주인이 되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종으로 살다가 종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창15장에 보면 그 사람의 이름이 엘리에셀이라고 밝히고 있기는 합니다만 정작 오늘 같은 중요한 일을 하는 시점에서 그의 이름은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아니 자기 스스로의 이야기입니다만 자기 스스로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고 해야 옳습니다. 

원래 중요한 일이나 규모가 큰 일에는 보통 사람들의 이름이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아니 빠지면 큰일 납니다. 굉장한 실수로 여겨지는 일입니다. 그에 비하면 오늘 이 사람은 정말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그 이름은 나타나지 않고 단지자신을 “종” 이라고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신은 단역배우처럼 한 번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인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할 일을 완전히 이룬 사람입니다. 주인인 아브라함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꾼의 역할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에게 주어진 일은 한 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결혼 상대자를 찾아오는 일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실고 있는 가까운 동네에서가 아니라 800km나 떨어진 곳, 주인 아브라함의 고향인 하란에까지 가서 찾아와야하는 어렵고 막중한 임무였습니다. 800km면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요즈음은 하루만에도 가능한 거리지만 당시로는 10개월은 족히 걸려야 가능한 거리였습니다. 아주 멀고도 험한 여행길이었습니다. 그가 자기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얼마나 충성스러운지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많은 교훈과 도전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 일꾼이란 그 일을 시킨 주인을 생각해야합니다. 내가 일을 맡아서 그 일을 하는 동안 누구의 일꾼이냐 하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이 늙은 종을 보면 사사건건 무슨 일을 하든지 꼭“내 주인”이라는 말을 앞에 붙입니다. 항상 주인을 앞세우고 주인의 명예를 앞세우고 기회 있을 때마다 주인을 전면에 내세우고 자기는 뒤에 있는 존재임을 인정합니다. 

여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자기 존재에 대해서 잊지 않으려는 스스로의 노력입니다. 자기 사명을 잠시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결의입니다. 이 막중한 일을 나에게 맡겨준 주인에게 절대로 실망을 안겨 주어서는 안 된다는 자기의 결단이 나타나 있습니다. 대부분이 일을 시작할 때는 야심차게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그 일을 이루는 사람이 드뭅니다. 인간의 의지란 이렇게 약합니다. 그런데 오늘 엘리에셀은 이것을 아는 사람처럼 철저하게 자신의 주인에게 속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엿보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누구냐의 문제에 대한 확실한 정의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일꾼 된 우리들입니다. 부디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내주인”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의미는 이 일의 주체기 어디까지나 내가 아니라 주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하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는 혹시라도 이 일이 잘 돼서 성공하더라도“영광 또한 마땅히 주인의 것입니다.”라는 고백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뜻을 내세워서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대체로 이런 식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성공하면 자기공로로 돌리고 실패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신앙생활 한 것을 후회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언제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성공의 주인도 하나님이시오, 실패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내 삶의 주관자는 전적으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종, 즉 일꾼 일 뿐입니다. 주인이 되려고 하지 말아야합니다. 어불성설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종으로서의 그 최상의 가치가 있는 종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가치를 발견할 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그 가치에 만족하고 그 존재감에 행복해 할 줄도 알아야 됩니다. 과연 어떤 종이 그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일꾼은 그래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래야 됩니다. 

여러분, 일꾼이 보여 줄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충성입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창세기24장 전체를 읽어보면 엘리에셀이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길을 떠나 나홀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리브가라 하는 아리따운 여인을 만나게 하셔서 그 여인으로부터 허락을 받고 자기 주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아내로 점찍어 놓은 그 집으로 갑니다. 

사실 여기까지 거의 성사가 된 것입니다. 이만하면 한숨을 돌릴만하지 않습니까? 걱정했던 가장 큰일, 목적했던 그 일이 어느 정도 해결 되었습니다. 만약에 마지막까지 신중하지 못한 우리들이라면 이쯤에서 마음이 해이해질만합니다. 누구든지 이 상황쯤이면“좀 쉬자. 웬만큼 성사 되었으니 누가 뭐라고 하겠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800km나 되는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얼마나 피곤하고 고달픈 형편이겠습니까? 편안한 아랫목에 좀 쉬고 볼 일입니다.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만 24장31절 이하에 보면 이 늙은 종을 맞이한 사람이 리브가의 오라버니 라반이었습니다. 

우물가에 낙타와 함께 서있는 엘리에셀을 본 라반이 자기 집으로 정중히 초대하면서 낙타에 싣고 온 짐도 손수 부리고 낙타에게 사료도 주고 늙은 종 뿐만 아니라 동행한 사람들까지 발을 다 씻어 줍니다. 그리고 음식을 차려놓고 먹으라고 극진히 대접합니다. 이 정도면 여러분, 상황 끝입니다. 다 이루어진 것 아닙니까? 충분히 마음 놓을만합니다. 

그러나 이 종이 하는 것을 보세요. 33절에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겠나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보통 손님은 주인이 제공한 식사를 다 마친 다음에 방문 목적을 밝히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여행에 지친 엘리에셀이 자기가 이곳까지 오게 된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는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사양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결례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 순간도 자기의 직무를 망각하지 않고 완전히 이룰 때까지 방심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확고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인 아브라함의 종으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분명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과 그 일을 감당하는 엘리에셀의 의지가 확실하게 묻어 있는 분분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34절부터 49절까지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생각할 부분이 많습니다. 지금 이 종을 감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인 아브라함은 800km나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사람의 악한 모습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남이 보지 않을 때는 성실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얼마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진실하고 성실한 일꾼인가 아닌가를 볼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면 됩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열심히 하는척하기는 쉽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고 칭찬해 줄 때는 신이 나서하고 자기를 크게 드러 내기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인정해주지도 않고 사람의 눈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대충 대충하기가 쉬운 법입니다.

미국에 있는 교회 중에 유명한 윌로우 크릭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너는 누구냐?(Who you are when no one is looking)>라는 책을 썼습니다. 제목 그대로가 깊이 생각해야 할 도전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나는 그리스도인인가?’,‘과연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눈가림만 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의 유익보다 나 자신의 유익만 생각하고 살지는 않는가?’를 생각해 보게 합니다. 

오늘 최선을 다하여 자기의 사명을 감당한 한 사람의 종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가정은 마침내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나 하나로 인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나 한사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고민하고 아파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고 일꾼 된 자로서의 마땅한 충성이 있어서 교회가 성숙되어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하나님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일꾼 일뿐입니다. 마치 엘리에셀이 주인 될 수 없고 마지막까지 아브라함의 종으로서 충성되게 살다가 충성되게 죽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죽으면 그것이 가장 큰 영광입니다. 다만 인정받는 일꾼이 되어야합니다.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에게 신뢰를 얻어 인륜지 대사에 대한 일을 맡을 만큼의 인정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일꾼이 되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앞장서고 하나님의 교회를 일구는데 일등공신이 되는 영광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