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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회의를 넘어서(1) (왕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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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회의를 넘어서(1) (왕상 19:1~8)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   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어려운 고비를 자주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 찾아오는 것이 회의감이고 좌절감이고 실망감입니다. 우리들이 생활하다 보면 이 같은 순간을 여러 번 만날 수 있습니다. 우선 결혼생활입니다. 결혼 3~4년차가 되면 이 회의감과 좌절감이 찾아오게 됩니다. 상대방의 좋던 모습들이 사라지고 자꾸만 흠이 부각되어 실망감이 찾아옵니다. 그런 실망감들이 모여서 마침내 권태기를 맞게 됩니다. 그때 지혜롭게 극복을 하지 못하면 사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연애할 때에는 상대방이 신선했습니다. 옷차림도 머리모양이나 화장도 세련되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결혼 3년차가 되니까 매일 그 옷이었고 모양에 신경을 안 쓰는 모습들이 지겹게 보였습니다. 연애할 때는 남자가 이해심도 많았습니다. 자상했고 언제나 먼저 와서 기다려주었고 예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자를 잡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살아보니까 엄청난 착각이었습니다. 눈에 콩깍지가 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활 모습입니다.  

이것은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청년은 대학을 졸업하고 큰 포부를 갖고 직장에 갔습니다. 현장에 가보니 평소 생각과 너무 차이가 났습니다. 그래서 꿈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을 했습니다. 현실이 수용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표를 내려고 고민도 했습니다. 오늘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을 것입니까. 물건도 얼마 사용하면 곧 싫증이 납니다. 집도 몇 년 살면 곧 싫증이 납니다. 그래서 가구도 옮겨보고 집을 리모델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다 싫증이 나고 권태기를 거치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신앙생활 하면서 은혜를 체험하였을 때 얼마나 소망이 넘치고 세상이 신선하였습니까. 그때는 신앙생활이 신비하였습니다. 그때는 신앙생활에 늘 영적 은혜를 충전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신선한 영적 삶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수고 없이 몇 년이 지나면 그 충천했던 신앙도 영적으로 바닥이 나니까 권태가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신앙생활에 싫증이 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만둘까, 교회를 옮겨볼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신앙의 회의감은 그렇게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때는 별 생각이 다 들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이 계신 건가, 예수는 과연 실제인물인가, 내가 헛믿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들입니다. 이런 회의감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엘리야는 당시 영적 은혜가 충만하였던 예언자였습니다. 엘리야가 종횡무진 뛰어다녔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에서 보면 엘리야는 이방신과 싸워 통쾌하게 승리했습니다. 성경 전체를 보아도 그렇게 신나게 승리한 적이 없습니다. 문제는 승리 직후입니다. 전쟁에서 가장 위험한 때가 승전 직후입니다. 

승전 직후 모두가 승리에 도취되어 있을 때가 가장 취약한 때입니다. 그 시간은 방심의 시간입니다. 전열을 가다듬은 적이 다시 공격해 올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불을 끄고 나서 하는 말이 “꺼진 불도 다시 보자”입니다. 엘리야가 그렇게 성공하고 승리하였는데 그 승리가 영원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엘리야가 성공에 취해 있을 때 이방선지자들의 후견자인 왕후 이세벨로부터 전갈이 왔습니다. “내일 이맘때에 네 목숨도 저들 중 하나같이 만들어주겠다.” 그 말에 엘리야는 그만 무너집니다. 그리고 도망갔습니다. 나무 그늘아래 누워 넋두리를 했습니다. “이제 나를 죽여주소서.” 이것이 오늘 읽은 본문말씀의 내용입니다. 

본문은 크게 성공했던 사람이 또 크게 좌절하는 상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석자는 그때 엘리야가 탈진한 상태라고 해석을 합니다. 감정이 뒤죽박죽된 상태입니다. 즉 믿음과 기분과 감정이 혼합된 상태입니다. 사람은 성공 시에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실패 때에는 “나도 모르겠다”하는 심정이 발로됩니다. 그것이 “신앙의 회의“입니다. 오스 가니스라는 분이 “회의하는 용기”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신앙 상에는 반드시 회의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회의”를 영어로 “doubt”이라고 합니다. 이는 라틴어 “dubitare”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즉 “한마음이 두마음 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불신은 한 마음이 두마음으로 나뉘는 현상입니다. 그러면 언제 이같이 마음이 두마음이 되는가 하면 몇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믿음 초점 잃을 때 


초점이 참 중요합니다. 렌즈를 초점을 맞춰 햇빛을 한곳으로 모으면 그곳에서 불이 납니다. 초점이 정확하게 맞추어지니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운동하는 사람은 온 몸의 힘을 한곳으로 모아서 힘을 발휘합니다. 그때 더 큰 힘이 발생합니다. 사람이 건강을 잃으면 먼저 눈의 초점부터 흐려집니다. 건강을 잃었기 때입니다. 삶에서 초점을 잃게 되면 방탕하게 됩니다. 생각의 초점을 잃으면 횡설수설 합니다. 초점이 흐려져서 그렇습니다. 치매가 무서운 것은 생각의 초점이 상실되고 기억이 흐려져서 언어가 중심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서 초점을 잃으면 먼저 신관부터 흔들립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상실됩니다. 믿음의 강도가 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상이 하나님 보다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두마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따라 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왜 발생하는가 하면 믿음의 초점이 흐려지거나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초점을 잃으면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사탄의 공격입니다. 사탄은 허점을 노립니다. 빈틈을 노립니다. 초점이 확고한 사람에게는 사탄은 오지 않습니다. 와도 이깁니다. 축대가 무너지고 둑이 붕괴되고 집이 무너지는 것은 틈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이단도 신앙에 초점을 잃은 사람에게 다가옵니다. 그때 쉽게 유혹을 받습니다. 신앙에도 틈이 발생하면 반드시 사탄이 찾아오고 회의감이 찾아옵니다. 그 때는 마음에도 없던 온갖 잡념들이 솟아나고 유혹들이 찾아오고 시험들과 의심들이 솟아납니다. 시험이나 회의감은 중심에서 이탈하거나 초점이 흐려질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기초 빈약시 

살아가는데 기초는 참 중요합니다. 집을 짓는데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기초를 다지는 일입니다. 기초가 약하면 집은 곧 무너집니다. 어린아이들이 학교에 처음 가면 먼저 하는 일이 기초공부인 한글공부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가, 앞으로 나란히”부터 배웁니다. 군인이 처음 입대하면 제식 훈련부터 배웁니다. 줄 맞추는 것부터, 질서부터, 앞으로 가, 뒤로 가, 열중쉬어부터 배웁니다.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처음 시작하면 기초 공부부터 합니다. 주기도부터, 사도신경부터, 십계명부터 배우고 내가 왜 믿어야 하는지부터 배웁니다. 왜냐하면 기초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뜨겁지만 기초가 부실하면 쉽게 회의감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기초가 부실하면 “내가 왜 믿어야 하는지,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주님은 나에게 누구인지“ 확실하게 납득이 안 됩니다. 믿음의 기초가 부실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쉽게 무너지고 회의감이 찾아오고 유혹을 받게 됩니다. 

며느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버지“하고 기도했습니다. 시어머니도 며느리에게 기도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며느리의 친정아버지시여”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기도에 초점이 맞추어지겠습니까. 그러니까 초등학생 믿음자가 대학생 수준의 고난을 만나면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의 기초가 부실한 사람이 열심 있는 신앙인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신앙자로 포장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수준은 겉에서 보면 모릅니다. 그런데 그의 실력을 시험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에 부딪치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왜냐하면 기초가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기초가 부실한 건물은 밖에서 보면 그럴듯하지만 약간의 지진이 지나가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그래서 기초가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너무 쉽게 주는 것도 문제입니다. 신앙의 기초는 초등학생인데 어느 날 믿음이 좋은 줄 알고 대학생 수준의 직분을 주면 안 됩니다. 감당을 못합니다. 모양은 그럴듯한데 내용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넘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오랜 신앙자도 이단으로 빠지기도 하고 조금 신비적인 내용이 있다 하면 찾아가는 것도 그런 이치 때문입니다. 회의감은 기초가 부실할 때 찾아옵니다. 먼저 믿음의 기초를 다져야 합니다. 훈련되어야 합니다. 성장기간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 후에 직분을 줄때 그 직분을 선용할 수 있게 됩니다. 

이웃 관계에서 

신앙상의 회의감이 오거나 실패하는 원인을 보면 일차적으로 자신의 내부에서 기인될 수 있습니다. 내 믿음이 기초가 약하고 성숙하지 못해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회의감이나 실패는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찾아오게 됩니다. 시편73편을 보면 악인이 형통하는 모습을 보고 미끄러질 뻔 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왜 악인이 죽을 때도 곤히 죽고 평소 건강하고 고난도 없고 재앙도 없고 형통하는가.” 그런 모습을 보고 넘어질 뻔 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말은 악한 사람이 벌을 받지 않고 형통하는 모습을 보고 이해가 안 되어 신앙에 회의가 오고 시험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저렇게 악한 사람은 잘 살면 안 되는데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은근히 신앙에 회의감이 찾아 올 수 있습니다. 또 내 가까운 사람들이 신앙인으로서는 그럴 수 없는 행동을 할 때 그 모습을 보고 스스로에게 시험되고 신앙생활 그만두고 싶은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사람이 중요합니다. 어떤 이웃은 나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아주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하고 나쁜 악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어떤 이웃은 나에게 신앙적으로 상당히 도전을 주고 모험심과 신앙심을 주고 정도를 걷게 하고 신앙을 바로잡게도 해 주는 이웃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어떤 이웃은 잘 가던 길도 못 가게 하는 이웃이 있고 시험 들게 하고 용기를 잃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이웃도 있습니다. 이것을 “이웃효과”라고 말합니다. 자동차 없이 멀쩡하게 잘 지내던 사람이 이웃집이 새 차를 사면 조만간 나도 사야 합니다. 이웃집이 소형차를 몰다 어느 날 중형차로 바꾸면 나도 바꾸어야 합니다. 이를 경제학에서 “이웃효과”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이웃을 보면서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웃은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하고 나쁜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웃 때문에 큰 감동을 받기도 하지만 큰 시험을 받기도 합니다. 엘리야가 그래서 큰 회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는 강력한 상대방이 없을 때는 당당했습니다. 승리에 도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강적 이세벨이 등장하자 순간 풀이 죽어버렸습니다. 지레 겁먹고 멀리 도망갔습니다. 날 죽여 달라고 넋두리를 했습니다. 이렇게 상대를 통해서 회의감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먼저 믿은 분들의 모습이 참 중요합니다. 


감정의 기복 

신앙생활에는 두 가지 자질이 중요합니다. 하나는 이성적 자질입니다. 신앙의 길에는 이론적이고 이성적이고 신학적인 기초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마치 집을 지을 때 뼈대와 같은 것입니다. 집을 지을 때 뼈대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신앙생활에서 신학적 기초는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또 신앙생활에는 감정적 자질도 중요합니다. 이성적 기초가 신앙생활의 뼈대라면 감정은 신앙생활에서 영적 자질에 해당합니다. 집을 짓는데 뼈대가 있어야 하고 벽돌이 있어야 하듯이 신앙생활에도 이성적 이론과 감정적 기초가 있어야 합니다. 

신학적 기초를 너무 중요시 하면 뼈대만 세워놓은 집 같아서 보기도 좋지 않지만 그 신앙이 메마를 수 있습니다. 그 신앙이 이론적입니다. 힘이 없습니다. 구체적이질 못합니다. 또 신앙에서 영성만 강조하면 뼈대 없는 집처럼 그리고 벽돌만 쌓아놓은 집처럼 무너지기가 쉽습니다. 감정은 기복이 심합니다. 때로 뜨겁기도 하지만 회의감이 속히 찾아오고 실망도 빨리 옵니다. 사람들에게 실망도 빨리하고 신앙에도 큰 시험이 되기도 합니다.

 엘리야는 이성적 뼈대 있는 신앙보다 감정적 영성이 더 컸던 사람입니다. 그는 혈기가 있었고 다혈질이었고 감정의 기복이 더 심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승리했을 때는 감정적 승리감에 다른 사람보다 더 도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무너질 때는 더 크게 무너질 수 있고 신앙의 회의감도 더 크게 올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베드로와 유사한 성격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열정과 열심도 있었지만 그는 이성적 기초가 아주 부실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누구보다 앞서 갔지만 또 누구보다 넘어지기도 잘 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감정적 기질 때문입니다. 흥분도 잘하고 그 흥분이 또 다른 실수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신앙고백도 잘하고 맹세도 잘했습니다. 그 결과 칭찬도 받았지만 그것 때문에 또 실패도 많이 했습니다. 엘리야가 바로 그런 스타일입니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싸워서 얼마나 통쾌하게 승리했습니까. 그래서 승리감에 도취해 있었습니다. 그때 이세벨의 무서운 도전이 오자 그는 순간 감정에 휘말리게 되고 그 길로 멀리 도망가서 어제의 승리는 다 잊어버리고 날 죽여 달라고 넋두리를 하는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감정이 풍성한 사람은 평소 열정이 있습니다. 누구도 그 열정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눈물도 많습니다. 아골 골짝이라도 갈 것처럼 각오가 대단합니다. 그런데 그 감정은 언제나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엘리야도 실패 하였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시종 여일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사람의 마음은 더 그렇습니다. 기복이 아주 심합니다. 너무 사랑해서 헤어지면 못살 것 같던 사람도 한동안 지나면 다 잊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살아갑니다. 사고로 남편이 죽은 곳에서 죽을 것 같이 절규하며 몸부림치는 아낙 내들을 보면 저 여인이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몇 달만 지나면 또 잊고 살아갑니다. 잊는 것도 은혜입니다. 사람은 그것이 실력입니다. 그 실력이 우리의 신앙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기복이 심한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에녹이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했는데 그 삶이 참 대단한 삶입니다. 우리는 삶에 기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에도 기복이 발생합니다. 어제 우리의 믿음이 아주 좋았는가 하면 오늘 큰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의기소침하기도 하고 신앙에 흥미를 잃기도 하고 신앙생활 그만 하고 싶다는 생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실력입니다. 

우리는 그것 밖에 실력이 못 됩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라고 했습니다. 나의 신앙의 모습이 건실하고 중심 있고 내용 있는 신앙인으로 살게 해 달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신앙의 회의를 극복하고 향기 나는 신앙고백을 드리며 주님 앞으로 날마다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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