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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중심의 신앙 생활 (행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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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중심의 신앙 생활 (행 2:42)


오그만 디노라는 세계적인 세일즈맨의 성공비결을 소개합니다. 그는 벽에다가 “슬플 때는 큰 소리로 웃어버리자. 열등감을 느낄 때는 새 옷으로 갈아입자. 무능을 느낄 때는 과거의 성공을 생각하자. 내가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될 때는 나의 인생의 목적을 생각하자”라는 글귀를 써놓고 매일 하루 한 번씩 큰소리로 읽었답니다. 그것이 성공 비결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공비결은 십자가입니다. 저는 오그만 디노의 성공비결을 좀 바꿔봤습니다. “슬플 때는 십자가를 생각하자. 열등감을 느낄 때도 십자가를 생각하자. 무능을 느낄 때도 십자가를 생각하자. 내가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될 때도 십자가를 생각하자”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주님이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확신하면 십자가 때문에 슬픔도 기쁨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열등감을 느낄 때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의 가치를 발견하면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무능을 느낄 때에도 나를 전능하신 주님과 결합시켜주는 십자가를 생각하면 성공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변화되었습니다. 금년에는 나를 구원하고 나를 변화시킨 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합시다. 전하는 일은 우리가 하지만 역사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특히 금년에는 전도 대상자를 정하고 1년 동안 천번 기도하고, 백번 전화하고, 열 번 만나서 복음을 전합시다. 그래서 년 말에는 하나님 앞에 풍성한 열매로 영광 돌립시다. 

우리는 4주째 행 2:42의 말씀을 통해서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 모델이 되고 있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떡을 떼며”라는 부분을 통해서 십자가를 의지하는 신앙생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트리니티 말씀대전에 보면 교제와 기도의 두 가지 중요한 신앙 용어 사이에 “떡을 떼며”를 삽입한 것으로 보아 이 말은 단순한 친교적 식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만찬 예식의 원형으로 간주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을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는 행 2:42에서 성찬식을 포함시켰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의 중심에 무엇이 있었는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찬식에서 나누는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떡은 그리스도의 살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눅 22:19에서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서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이면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할 수 있는 성찬식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성찬식을 통해서 자신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기억하고, 회상했습니다. 그 결과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중심에 십자가가 놓이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에 대한 확신이 충만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중심에 십자가가 확고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몇 가지 결과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말했습니다. 

둘째는 십자가의 확신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고 말했습니다. 

셋째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다양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43절에 보면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넷째는 십자가에 대한 확신으로 죽음을 불사하는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무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롬 1장과 고전 15장에 보면 복음은 주님입니다. 특히 주님의 고난과 주님의 부활은 복음의 핵심 중에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모른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주님을 존경하고 주님의 가르침에서 좋은 교훈을 얻는다 할지라도 십자가를 모른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또 십자가의 도를 이해해도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십자가가 이해 된 사람이며,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이 짊어지신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복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기 때문에 이 시간 다 언급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갈 3:13,14에 나오는 십자가를 통해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만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1.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저주 받지 않고 풍성한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복이 넘치시고, 여러분의 범사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을 잘 모릅니다. 알고 보면 쉬운데 몰라서 저주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지식적으로는 알기는 하지만 너무나 단순한 방법이기 때문에 무시해버려서 율법의 저주 가운데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다양한 율법의 저주들이 있습니다. 율법의 저주를 요약하면 첫째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둘째는 육체의 질병입니다. 셋째는 환경적인 고통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저주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이 세 가지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저주는 죄로 인하여 찾아 온 것입니다. 신 28장에 보면 다양한 율법의 저주들이 나오는데 그 저주들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찾아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면 율법의 저주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고 말하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말합니다. 아담 이후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 중에 자신의 능력으로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목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찰스 스윈돌이라는 미국의 목사님은 점잖고 멋있고 말씀이 귀하여 온 교인들의 사랑을 받는데, 하루는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 보다 법과 규례를 더 잘 지켜야 되고 특별히 교통 법규를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그날 예배 후 목사님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떤 깊은 생각을 하다가 빨간 신호등을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 양옆을 보니 교인들이 좍 깔려 있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우들이 만나기를 원합니다." 

다음 날 어느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목사님은 교통 법규를 잘 지키자고 설교를 해 놓고 바로 뒤에 자신이 법규를 어겼으니 무슨 말로 답변해야 할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교인들은 목사님을 사랑해서 그것을 핑계 삼아 식사를 대접하려는 것이었지만, 목사님은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났습니다. 목사님은 팻말을 목에 걸고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목사님을 골려 주기 위해 식당에서 목사님을 기다리던 교우들은 목사님이 들어서는 순간 박수를 치며 막 웃었습니다. 목사님의 목에 걸린 팻말에 '나는 죄인이오.'라는 글이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우들이 그것을 보며 막 웃고 있는데 목사님이 뒤 돌아 섰습니다. 등에도 팻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있으면 돌로 치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교우들이 또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죄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주님은 사람들이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주님을 보자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세례요한은 주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신 하나님이 보내신 어린양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7장에서 죄의 문제로 탄식합니다.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은 자기가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면서 탄식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능력으로 죄에서 빠져나오기를 원했지만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우리가 그 말씀만 보면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처럼 위대한 사도도 자신의 능력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는데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계속된 사도 바울의 고백은 우리들에게 소망을 던져줍니다. 그는 롬 7장 마지막 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해결하지 못했던 죄의 문제에서 구원해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롬 8:1,2에서 곧 바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바울의 감사를 가져야 합니다. 함께 해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믿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 고난당하신 것을 믿습니다. 주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주님은 나의 죄를 대신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속량이라는 말은 값을 지불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죄를 범한 내가 당해야 할 영적인 죽음, 육체의 질병, 환경적인 고통의 모든 값을 십자가에서 지불하신 것입니다. 

갈 3:14에 보면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주시는 복 중에서 세 번째 복을 말하면서한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 받는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으면 받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못 받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의 저주에 대한 속량을 믿으면 모든 율법의 저주를 속량 받는 것이고, 일부 율법의 저주에서만 속량 받는다고 믿으면 믿는 만큼만 속량 받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기 때문에 모든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된 참된 자유인입니다. 영적인 죽음도, 육체의 질병도, 환경적인 저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2. 아브라함의 복을 받음

갈 3:14에 보면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공로로 주어지는 두 번째 복은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인 우리들이 받는 것입니다. 갈 3:9에서는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다양합니다. 그는 영적인 복, 건강의 복, 장수의 복, 자식의 복, 아내의 복, 물질의 복 등 수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복이 영적인 복 즉 믿음의 복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다양한 복 가운데 오늘 언급하고 싶은 복은 자식의 복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자식의 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자식이 많은 것도 복이지만 자식이 많지 않아도 그 자식이 하나님 잘 섬기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교회에 충성하고 사회에 꼭 필요한 자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영적인 복을 받아서 아브라함처럼 믿음이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삭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 응답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삭은 결혼도 잘했습니다. 이삭의 부인 리브가는 외모도 아름다웠고, 믿음도 좋았습니다. 그는 경제적인 복도 받아서 가뭄 중에도 농사를 지어서 100배를 거두었습니다. 이삭은 왕에게도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대통령 앞에도 서고 대통령에게 인정받는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삭은 효자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자기를 제물로 드리려고 할 때도 죽기까지 순종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처럼 효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무슨 말을 하든지 “아니요”가 없고 “네”하고 순종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잘 되고 장수하는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엡 6:1-3에 보면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부모가 믿음으로 잘 살아야 자녀가 복을 받습니다. 부모가 믿음으로 살지 못하면 자녀가 저주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신 28:32에 보면 “네 자녀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고 종일 생각하고 찾음으로 눈이 피곤하여지나 네 손에 힘이 없을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41절에 보면 “네가 자녀를 낳을지라도 그들이 포로가 되므로 너와 함께 있지 못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자녀가 원수의 포로가 되고, 사단의 포로가 되고, 물질의 포로가 되고, 질병의 포로가 되면 안 됩니다. 46절에 보면 여러 가지 저주를 말한 후에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라고 말씀합니다. 

부모가 잘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가 잘됩니다.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자녀가 잘됩니다. 부모가 잘 못 믿으면 자녀가 잘 못됩니다. 부모가 순종하면 자녀에게 복이 됩니다. 여러분 때문에 자녀들이 저주 받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대문에 자자손손 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3. 성령의 약속을 받음

갈 3:14에 보면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공로로 주어지는 세 번째 복은 성령의 약속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소유하게 되는 어떤 것보다 성령을 받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마 7:7-11에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주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동일한 내용인 눅 11:9-13에 보면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합니다. 성령님을 받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주십니다. 롬 8:26에서는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입니다. 요 14:26에 보면 성령님은 보혜사이십니다.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믿는 자와 함께 계시며 믿는 자 속에 계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자신감 있게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 있고 성령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전 2장과 3장에 보면 초대교회 성도를 두 종류로 나눕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신령한 사람들과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육신적인 사람들입니다. 신령한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의 도움 속에서 풍성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육신적인 사람들은 육신이 원하는 대로 행하여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면 여러분 안에도 성령님이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믿는 자들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입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자기 속에 계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를 무시하고 육신이 원하는 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사는 방법은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인류 역사상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행 13:22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고 하나님의 뜻이 다윗을 통하여 다 이루어진 비결이 무엇입니까? 행 13:36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었습니다. 그는 평생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방법은 성령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 까지 통달하신 분이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가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성령님이 거하십니다. 이제 성령을 따라 행합시다. 그래서 다윗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삽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육신이 원하는 일을 하지 말고 내 속에서 나를 이끄시는 성령께 집중하고 그분이 주시는 감동을 따라 행합시다. 

성령은 생수 같이 역사하십니다. 이번 겨울에는 겨울 가뭄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농촌이 많습니다. 며칠 전에 TV를 보니까 대파 농사를 짓는데 가뭄이 들어서 파가 많이 죽었습니다. 살아있는 것도 색깔이 변해서 상품 가치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농부들은 그 대파를 묶고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건져보려는 심정일 것입니다. 또 딸기 농사를 짓는데 가뭄 때문에 하루에 몇 십 kg씩 떨어져서 못 쓰게 되고 있었습니다. 물만 충분히 공급 되었으면 열매가 풍성 할 텐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생수가 충분히 공급된 사람은 시 1편의 말씀처럼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그 행사가 다 형통할 것입니다. 성령의 생수가 고갈된 사람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환경적으로 점점 피폐해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결혼 생활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에 달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방이동에서 전도사생활을 할 때 김00집사가 신혼초에 자기 부인을 휘어잡은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첫 날 밤에 요강에 자기오줌을 받아서 아내의 옷과 이불에 붓고는 아내를 깨워서 기를 팍 죽였답니다. 그리고 한 번은 의견 충돌이 있었는데 창문에 담요를 붙여서 밖으로 소리가 나가지 않게 해놓고 거반 죽을 정도로 두들겨 팼답니다. 그래서 자기는 결혼생활을 편하게 한답니다. 그분은 자랑스럽게 말하는데 저는 그분이 한심스럽게 보였습니다. 

한 장군이 군에서는 늘 호령을 하며 모든 장병들을 다스리는데, 집에만 가면 아내의 잔소리나 듣고 눈치나 보니 ‘사는 게 이게 뭔가?’하며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하루는 연병장에 장교들을 모아 놓고 줄을 그은 다음 말했습니다. “솔직히 행동해라. 아내의 눈치를 보고 사는 사람은 이쪽으로 모이고 아내의 말에 상관없이 자기 주관대로 사는 사람은 저쪽으로 모여라.” 모든 장교들이 아내의 눈치를 보며 아내의 말을 들으며 산다는 쪽으로 우루루 모였는데, 단 한 사람만 자기 주관대로 산다는 쪽으로 갔습니다. 그것을 보며 장군이 ‘세상 사람들이 거의 다 나처럼 살구나.’하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주관대로 산다는 그 사람이 얼마나 존경스러웠던지 그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참 위대한 남자다. 어찌 이렇게 자기 주관대로 사는가?” “장군님, 사실은 오늘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집사람이 ‘사람들이 우루루 모인다고 덩달아 그곳으로 가지 말고  깊이 생각해서 줏대 있게 사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집사람의 말이 생각나서 저쪽으로 가지 않고 이쪽으로 온 것입니다.” 결국 모든 남편이 아내의 말을 듣고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누가 주도권을 잡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주도권을 잡으면 망합니다. 성령님이 주도권을 잡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이 가능합니다. 흰말과 검은말이 함께 마차를 끕니다. 흰말은 오른쪽으로, 검은말은 왼쪽으로 가려고 합니다. 마차가 어느 쪽으로 갈까요. 주도권을 잡은 말 이 가고자 하는 쪽으로 갈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잘 받는 사람이 성령께 주도권을 넘겨드린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는 사람이 성령께 주도권을 넘겨드린 사람입니다. 따라 합시다. “성령께 주도권을 넘겨드리자”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면 행복합니다.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면 승리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일 대마다 성만찬을 하며 주님을 기념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묵상했습니다. 기억하고 회상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의 중심에 십자가가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십자가에 대한 묵상이 풍성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 되었으며,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고, 성령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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