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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에 합당한 생활 (빌 1: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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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합당한 생활 (빌 1:27~30)


복음에 합당한 생활

남자들이 모이면 주로 군대 이야기들을 합니다. 군대 시절이 그만큼 자기 인생에서 특별한 경험이었고 할 말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해병대 출신들은 여전히 자기 내 군복을 입고 기수까지 따집니다. 군 장성들도 그렇습니다. 여전히 군복을 소중한 곳에 모셔놓고 프라이드도 강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빌립보가 그런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는 제대한 로마 군인들이 주로 정착하는 도시입니다. 이들은 퇴직 후 이곳에 땅과 직위를 받아 정착합니다. 대부분의 제대 군인들이 그렇듯이 그들은 전쟁의 무용담과 군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나 빌립보 위쪽에는 야만족들이 살고 있으며 빌립보는 다른 곳과는 달리 직접적인 로마의 법과 문화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야만족들 사이에서 자기들이 로마의 우수한 문화를 수호하고 보급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자부심이 매우 강한 곳이 이 곳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할 때 이 생활하라는 단어가 바로 이런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활하라’는 헬라어로 ‘폴리튜오마이’입니다. 같은 단어들로 ‘폴리튜마’라는 ‘시민권’이 있고, 또 ‘폴리스’는 고대 도시국가를 뜻합니다. 그래서 ‘생활하라’는 단어는 ‘시민의 의무를 다하라’, 또는 ‘시민답게 행세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로마 군인들은 로마시민답게 행세했습니다. 해병대는 해병대답게 행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20)라 말씀하여 우리가 하늘나라의 시민임을 분명히 합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은 하늘나라 시민답게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옷을 입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신사라도 예비군복을 입혀놓으면 거의 수준이 강아지 수준이 됩니다. 말도 안 듣고 아무데나 벌렁 눕고 지나가는 여자가 지나가면 소리를 지릅니다. 평소에는 그러지 않습니다. 예비군복을 입혀놓으면 그렇게 됩니다. 몇 년 전 홍제동에서 화재가 있었습니다. 이때 진압하던 소방대원들이 6명이나 순직을 했습니다. 한 소방관은 집 안에 어린아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안으로 뛰어들었다가 유독가스와 함께 집이 무너지면서 중상을 입었습니다. 

병원을 찾아가서 어떤 분이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불타는 집안으로 아무도 뛰어들지 않았는데 어째서 당신은 뛰어들었습니까?” 그러자 이분이 119 소방대 옷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소방대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옷이 그를 그렇게 용감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옷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의 옷을 입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답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 자녀들을 기를 때도 또한 하나님 자녀답게 길러야 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러니 절대 기죽거나 절망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너는 절대 거짓말을 하거나 사람의 눈치 보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며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자가 진정 성공하는 자이다. 이것이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 자녀답게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 자녀답게 기르는 것은 성공적인 자녀교육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유태인이 그렇습니다. 민족간 지능테스트로 유명한 스탠포드 대학의 교육심리학자 젠센은 유태인의 성공비결을 그들의 ‘강한 자긍심’에서 찾습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보다 결코 지능이 뛰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탁월하게 만드는가? 유태인들은 자기 민족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임을 굳게 믿습니다. 다른 민족과는 다르다는 이런 강한 자긍심이 자신감을 만들어내고 사명감을 고취시킵니다. 그 결과 학문이나 제반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요한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가 자녀들에게 잠자리에서 나누었던 다음과 같은 대화는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자녀교육의 모습입니다. 
“너희는 누구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너희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니?”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 일을 시켰니?” “하나님께서 시키셨습니다.”

서로 협력하는 것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말할까요?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세 가지를 권면합니다. 첫째는 서로 협력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대적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셋째는 고난을 달게 받으라는 것입니다. 27절 후반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여기 협력한다는 단어도 군사적 의미가 강합니다. 그것은 ‘함께 경기하다’ ‘한 팀으로 함께 싸우다’라는 뜻입니다. 이 협력한다는 단어를 또 ‘일심으로’ ‘한 뜻으로’가 또한 수식하고 있습니다. 전선에서 싸움도 그렇고 스포츠 경기도 그렇고 가장 중요한 것은 팀웍입니다. 수비하는 사람도 있고 공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골키퍼도 있고 중앙에서 골을 배급해주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자기 역할에 충실할 때 그 경기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이 편지를 쓰면서 가장 원했던 것들이 그들의 하나됨입니다. 이어지는 2장에는 유명한 그리스도의 찬가가 있습니다. 하늘 본체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하는 이유도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겸손과 낮아지심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요한복음 17장에서 제자들을 위하여 가장 중요하게 기도한 것도 아버지와 주님이 하나인 것처럼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서로가 하나가 되어 있으면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토인비가 역사연구를 통하여 밝혔듯이 한 문명을 무너뜨리는 것은 외부의 적이나 자연환경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과 경직성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위기를 맞아 여러 가지 정책을 펴고 그 중에 잘한 것도 있고 잘못한 것도 있지만 가장 잘못하고 있는 일은 국민을 분열케 하는 것입니다. 모든 국민을 단합시켜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국민은 IMF 위기 때도 금모으기 운동을 벌이며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 빠른 시간 내에 IMF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통령과 정부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노골적으로 시행하니 서민들이 소외됩니다. 무슨 나라가 이념 갈등이 이렇게 심한지 모르겠습니다. 때가 어느 때인데 친북이니 좌파니 하는 말이 여전히 등장하고 있고 정부에서 그런 분위기를 제어하기보다는 공공연히 조장하고 있습니다. 용산참사도 그렇습니다. 대통령이 사과하며 국민들의 마음을 위로해야 하지 않습니까? 한 가정으로 따지면 대통령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책임을 져야지 힘없는 자녀가 잘못했다고 몰아붙이면 서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가장 큰 위기는 국민들을 방관자로 만들고 냉소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서로의 잘잘못은 따지지 말고 포용하는 정치가 필요합니다. 

미국의 오바마를 보십시오. 민주당이 다수당이지만 오히려 공화당 의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정책 협조를 부탁하지 않습니까? 반대하는 세력을 사랑으로 끌어안는 것이 하나를 이루는 길입니다. 남북전쟁 당시 링컨은 자기를 반대하고 자기를 가장 비난했던 사람을 그 분야에 탁월하다 하여 스탠톤을 국방장관에 앉혔습니다. 그는 링컨을 “교활한 시골촌놈”일고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고릴라를 잡으러 아프리카에 가는 것은 어리석다. 여기 스프링필드에 진짜 고릴라가 있다.”며 고릴라같이 생긴 링컨의 모습을 조롱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탁월한 재능을 높이사 그를 중요했기에 국민을 하나로 만들었고 결국 남북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 또한 반성할 것이 많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세계적인 대형교회들도 많지만 반면에 100여개가 넘는 교단분열로도 유명합니다. 한 교단이 이렇게 많이 분열된 것은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도 드뭅니다. 너무 개인 플레이에만 강합니다. 한국교회가 교단 분열과 개교회주의를 통하여 성장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교회가 분열된 만큼 목숨 걸고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폐해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도 한 몫을 하고 있지만 조그만 지역에 교회가 난립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신도시에는 한 상가에 여러 개의 교회가 들어서기도 합니다. 교단 분열로 말미암아 각 교단마다 신학교를 세워 목회자가 넘쳐나고 결국 질적으로 저하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 한 사회가 타락하고 망해가는 지표중 하나가 무엇인줄 압니까? 그것은 종교 성직자의 수가 많아지고 교회나 사찰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종교개혁기의 로마교회가 그랬고, 프랑스 대혁명 때도 그랬고, 러시아 혁명직전에도 그랬습니다. 고려 말기에 불교가 흥왕했고, 조선 말에는 유교가 극성 했습니다. 성직이 마치 출세의 도구처럼 되었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결탁했습니다. 종교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하니 세상이 타락하고, 백성들이 의지처를 세상의 혁명에서 찾았던 결과입니다.

목회자가 많으니 좋은 교회에 자리가 날 때에는 수십 명의 이력서가 몰립니다. 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개척에 나서고 해서 대략 한해 2천 5백 개의 교회가 세워지고 3천 개의 교회가 문을 닫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렇게 경쟁적일 때는 교회가 질적인 면보다는 양적인 성장에만 골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대형교회를 이루는 것이 꿈입니다. 한국에는 50% 넘게 미자립교회라는 말도 있지만 그 구분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는 소수의 대형교회와 그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대다수의 작은 교회들만 있기 때문입니다. 대형 교회를 이루면 목회에 성공한 것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자본주의가 대기업 위주, 승자 위주로 가는 것처럼 교회가 기업처럼 취급받고 있습니다. 교회 크기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볼 때 크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영광을 다 받기 때문입니다. 작다고 하여 또 그가 그리스도를 닮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작기 때문에 병들고 큰 자 편에 설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스도를 닮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단지 크다는 이유로 한국교회의 대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큰 교회를 유지한다는 것은 단지 크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큰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경영기법을 들여오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길을 가야합니다. 큰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교인들에게 쓴 소리를 해서는 안 됩니다. 쓴 소리를 하면 떠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문화와 적당히 같이 가야 합니다. 힘 있는 사람을 대우해주어야 합니다. 

교회가 이처럼 거룩함을 상실하게 된 근본 이유는 협력하지 못하고 분열했기 때문입니다. 거룩과 말씀의 순종에 더욱 힘을 써야 할 교회가 자체 성장만을 추구해야 하는 구조가 된 것은 바로 이 분열 때문입니다. 선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상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 선교가 이제는 교인 쟁탈전의 수단이 되었고,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가 되어버렸습니다. 분열하면 세상이 우습게봅니다. 가톨릭은 하나로 협력하기 때문에 세상이 만만히 보지 못합니다. 성도들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어떻습니까? 이 교회 싫으면 다른 교회로 가면 됩니다. 사회적인 문제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합니다. 모래처럼 흩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28절에서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증거)니” 교회가 하나가 되어 협력하면 세상은 우리를 두려워하여 멸망의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교회임을 세상에 드러내어 구원의 증거가 된다고 합니다. 최소한 장로교는 장로교 끼리, 감리교는 감리교끼리, 침례교나 성결교는 그들 끼리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도시와 농촌을 순회하여 목회하도록 해야 하고 월급도 균등하게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목회자들은 성장보다는 진정한 말씀의 회복에 힘쓰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 수급도 조절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가뜩이나 남북이나 이념, 계층으로 분열된 한국사회에 놀라운 충격이 될 것입니다. 교회를 보며 저들은 세상과 다른 모습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양식을 먹고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시민들이 왜 이렇게 땅에 것에 관심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툴툴 털어버리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 됩시다 하고 헤쳐모여 하면 됩니다. 그런데 땅에 있는 그 알량한 것에 집착하여 도무지 하나 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합네 하며 온갖 거룩한 척합니다. 나중에 예수님에게 불려가서 책망 받을 일이 많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세상을 두렵게 하는 것은 무어냐? 우리를 살아나게 하는 것은 무어냐? 그것은 서로 한 마음으로 한뜻으로 협력하는 것입니다.

대적자를 두려워하지 아니 함

복음에 합당한 생활 두 번째는 대적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대적자들은 누구인지 정체를 파악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복음에 대적하고 교회에 반대하는 세력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런 대적자들이 빌립보 교회 주변에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대적자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 지하 감옥에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대적자를 바라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대적자들이 있습니다. 자기 인생에서 방해가 되는 사람이나 문제가 대적자들입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금년도 받은 말씀은 여호수아 17장 18절입니다.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철병거는 오늘날 탱크나 전차와 같습니다. 맨 몸으로 싸우는 사람이 철병거나 전차를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비록 저들이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이기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받고 나니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이 말씀이 떠올라 능히 대적하리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여러분도 자기 인생 앞에 있는 철병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린 붙잡고 있는 손은 철병거보다 더 강한 하나님의 손입니다. 담대함으로 나아갈 때 문제들을 부수고 정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여 싸우면 승리할 수 있는데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입니다. 두렵기 때문에 믿음이 생기지 않고 결국 주저앉고 맙니다. 다윗처럼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면 승리할 수 있는데 골리앗이 두려워 아무도 그 앞으로 나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나갈 때 골리앗은 단 한 방의 물맷돌에 나가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면 세상과 사탄은 더 신나합니다. 그래서 더 으르렁 대며 우리를 아주 무기력하게 만들고 맙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는 순간 어둠의 세력은 힘을 잃었습니다. 저들은 우리 안에 갇힌 사자들일 뿐입니다. 저들은 으르렁대는 소리로 우리를 두렵게 할 뿐 실제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고난의 은혜

세 번째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한 삶은 고난을 달게 받는 삶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고난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라고 하면 좋은 것만 생각합니다. 건강하고 일이 잘되고 물질적인 축복받는 것만이 은혜가 아닙니다. 고난 받는 것도 은혜입니다. 고난이 왜 은혜입니까?

첫째, 고난은 우리가 하늘나라 시민임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이 우리 땅이 아니고 우리가 거할 곳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불편이 따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곳이 편하면 우리는 이곳에서 시민권을 얻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고난은 이곳이 우리가 머물 곳이 아니라는 싸인입니다. 하나님은 가끔 우리에게 고난을 주심으로써 우리가 하늘나라 시민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을 섬기라고 내게 건강을 주셨건만 나는 세상을 위해서 전부 다 써버렸습니다. 이제 나를 일깨워 주시려고 나에게 병을 주셨습니다.” 병을 주신 까닭은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닥쳐야 비로소 그때서야 기도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습니다. 그래서 C.S.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무서운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는 습성들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고통이란 것은 귀머거리에게 알아듣도록 하는 하나님의 확성기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2절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바울이 빌립보에서 옷을 찢기고 그 위에 매를 맞았고 발에 착고에 매여 지한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사도행전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당했던 싸움을 이제 너희 빌립보 교인들이 당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며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임을 확인시켜줍니다. 이 편지를 받고 있던 빌립보 교인들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당했던 고난은 그리스도가 당했던 고난과 같은 고난이요,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골1:24)고 말했습니다. 이제 빌립보 교인들의 고난은 사도 바울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난을 받으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고난이 은혜인 까닭은 그것이 변장된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위기 같은데 하나님은 그 위기를 통하여 우리를 더 단단하게 연단시키시고, 우리를 더 놀라운 축복으로 인도하십니다. 마치 거친 파도가 덮쳐오는 고난의 순간이지만 그 파도를 이용하여 날아오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그 거친 파도를 이용하여 우리 소원의 항구로 빠른 속도로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고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는 고난을 받았지만 그것은 요셉을 조그만 이스라엘 땅의 총리가 아니라 당시 최강국인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고난은 분명 위기입니다. 우리는 이 때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하나님은 힘이 없다고 버리거나 극도로 무기력한 인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는 그 결국에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고난 앞에 결코 주저하거나 물러서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서 모든 불순물들이 빠져나오고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인격들로 빚어져 나올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에미 카미켈이라는 분이 고난을 통한 연단에 대해서 이렇게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한 번은 인도 대장장이에게 “당신은 금을 연단할 때 이것이 순금이 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지혜로운 대장장이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금 위에 내 얼굴이 뚜렷이 보일 때까지 연단합니다.” 고난은 선택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고난은 버리고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요, 변장된 축복입니다. 이 고난의 용광로를 통과한 자들에게는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빛나는 놀라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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