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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사중인 교회공동체 (엡 2:11~13, 엡 4: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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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중인 교회공동체 (엡 2:11~13, 엡 4:25~32)


I. 공사중

바람한점 없는 화창한 날 강변에 서 있으면 문득 강물이 어느 쪽으로 흐르고 있는지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됩니다. 하지만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이면 출렁이는 강물은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지를 금방 알려줍니다. 우리의 삶도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냥 고요하기만 할땐 목적과 방향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위기를 만나게 되면 인생이나 공동체가 가야 할 방향을 되찾게 됩니다. 

지금은 가정도 교회도, 기업도 나라도 위기라고 합니다. 이때는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적을 새롭게 해야 할 때입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40일」캠페인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공동체의 가치와 내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목적을 알려주었습니다. 
- 공동체는 가족입니다. 
- 또 다른 가족인 VIP들을 품고 사랑해야 합니다. 
- 서로 교제하며 성장하고 서로 돕고 격려하고 섬겨야 합니다. 
- 특히 교회 공동체의 가장 고상한 가치는 예배입니다. 

그러나 「공동체를 세우는 40일」캠페인을 마치면서 갖는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우리의 가정에 왜 이토록 문제가 많은가?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 왜 연약함이 있는 것입니까? 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때로는 갈등을 느껴야 되며 때로는 아픔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는 의문점입니다. 가끔 길을 가다보면 이런 안내판을 볼 수 있습니다. "공사중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건축중」「공사중」- 이 말은 이 땅에 있는 교회를 표현하는 적절한 단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상에 있는 교회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공사중」입니다. 거기 있는 모든 성도들도 완성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건축중이요, 모두가 치료중이요, 모두가 공사중입니다. 10년전 저는 꼭같은 제목으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꼭같이 우리교회는 「공사중」입니다. 주님 앞에 서서 그리스도의 후사가 되는 그날까지는 여전히 「공사중」입니다.


II. 문제없는 교회가 어디 있을까?

서울에서 중소기업을 하던 아무개 씨는 서울에서 전통적인 한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아내를 따라 교회를 다녔지만 조금 교회생활이 깊어지면서 교회의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오면 사랑을 받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친한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있었습니다. 사회적인 위치도 있고 하여 교회 임원의 역할도 해보고 싶은데 오래 다녔다는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안줍니다. 교회 짬밥이 군대 짬밥 못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직하게 살아야 되는 줄 알았는데 자신도 그렇게 살기가 힘이 들고 또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니 예수믿는 사람들 가운데 정직하게 사는 사람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안믿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교회에는 용서가 있으리라 믿었는데 교회안에서도 투닥 투닥 싸움하는 소리가 가끔은 들려 옵니다.

아예 발을 쑥 빼고 냉소주의자가 되어 구경꾼처럼 신앙생활을 하던 차에 일산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집 앞에 마침 크지 않은 교회가 있어 등록을 하게 되었고 등록을 하자 마자 교회의 감투란 감투는 다 씌워 줍니다. 얼마나 기다렸던 일이냐? 목사님과 손발이 척척 맞습니다. 목사님을 도와 내가 바라던 그 아름다운 교회를 이제 만들어 봐야지. 그런데 웬걸 1년이 채 되지 못하여 상처를 받기 시작합니다. 목사님도 이 사람이 내 목회에 걸림돌이구나 실망을 합니다. 서로 기대치가 높았던 만큼 서로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지요.

딴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도 마찬가지 실망과 상처를 경험합니다. 이 일로 부부 싸움이 잦아 졌고 부부가 합의하여 당분간 교회에 가지 않고 가정예배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가정예배도 몇 주 드리다가 흐지부지 되고 맙니다.

그래도 교회를 버리기엔 신앙이 들었습니다. 교회를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딘가에 좋은 교회가 있겠지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사랑이 있는 교회, 용서가 있는 교회, 은혜와 감동이 있는 교회 - 그 이상적인 교회를 찾아 오늘도 헤매어 봅니다.
이런 사람들의 주제가가 있습니다. 오늘도 걷는다 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

어디에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나를 반겨주는 교인이나 목사님의 환대마저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아니하고 교인으로 잡아 두려는 위선으로 보입니다.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또 문제가 있습니다. 하루는 냉소주의, 무관심 주의가 되었다가 또 하루는 불평분자, 비판주의자가 되어 불행한 성도로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에 행복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공동체의 삶」(릭 워렌)에 보면 새들백교회 초창기 교인들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60여명이나 남아 있다고 릭 워렌 목사님은 좋아합니다. 그들이 아직도 새들백교회를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놀라워합니다. 변화도 많고 시험거리도 많은 세상에서 한 교회를 10년 20년 섬긴 것 하나 만으로도 존경받을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III. 자기 중심의 교회관

이 아무개 집사처럼, 초대교회 성도들도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천국이 건설될 줄 알았는데 거기서 아픔과 상처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교회를 비판하는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들려 옵니다. 그러다가 정작 쓰러지고 넘어지는 사람은 비판하는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들이 교회에 일원이 되면서 나름대로 교회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 교회는 저래야 한다" 마음대로 평가하고 비판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들은 이방인이요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던 자들이었다. 아직도 시각이나 가치관이 세상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너무 쉽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교회가 왜 이래? 너무 쉽게 하나님의 교회를 폄훼하지 말라는 겁니다. 고쳐야 한다면 오직 너 자신을 날마다 고치며 살라는 겁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올 때 자기 나름대로 교회관을 하나씩 가지고 교회에 옵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어 주어야 할 만큼 친절해야 한다. 교회는 구제를 많이 해야 한다. 큰 교회는 작은 교회를 돕고 선교를 많이 해야 된다. 교회는 크게 성장해야 한다. 또 반대편에서는 교회는 작아야 교회답다. 교회에 모일 때 큰 소리로 기도해야 교회가 뜨거운 교회요 좋은 교회다. 또 한켠에서는 교회는 신사적이어야 하고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야단스러우면 안된다. 자기 나름대로의 교회관을 가지고 교회에 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과 맞지 않으면 거의 무차별 사격에 가까운 비판을 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교회생활과 신앙이 위험 상태에 빠져듭니다. 교회에 상처를 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너희들이 살아온 삶이나 지금 살아가는 가치관이나 헌신 등이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전체적으로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곳인지, 왜 교회안에 연약성이 있는지, 왜 교회가 내 생각과 다른지 배워야 할 위치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애기에게도 나름대로 인생의 고난과 시험이 있습니다. 
- "엄마, 맘마" 발음하기도 힘든데 작은 할머니가 오시더니 "작은 할머니 해 봐!" 할 때면 미치지요. 
- 여자 애기, 남자 애기 가리지 않고 아무데서나 벗기고 기저귀 갈 때면 몹시 자존심이 상한답니다. 
- 기는 것도 힘든데 고작 새우깡 하나를 미끼로 "일어서 봐, 걸어 봐" 할 땐 확 패 주고 싶지요. 
서둘지 말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기지 못하고 걷지 못한다고 욕하면 안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문제가 교회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제 갓 결혼식장에서 걸어나오는 신부를 대하듯이, 지금 막 엄마 뱃속에서 나온 아기를 대하듯이, 경외감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대하지 않으면 그 고결함을 손상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관점입니다. 

신학생 때는 세상 모든 교회들이 다 때묻어 보입니다. 선배 목사님들이 속물로 보입니다. 그래서 신랄하게 교회를 비판하고 목회를 평가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목회현장에 나와 목회를 해보면 교회나 목회가 그렇게 녹녹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목회 초년병시절엔 선배들의 목회가 우스워 보입니다. 그러나 막상 내가 교회를 맡아 섬겨보면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힙니다. 교인 10명만 모이면 거기 교회관 10개가 있습니다. 그렇게 쉽지 않은 것이 교회요 목회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성장하는 교회에 이유가 있구나. 겸손해 집니다. 이쯤은 양호한 목회자입니다. 정말 구제불능인 목회자는 나하고 다른 행태들을 마구 비난합니다. 그래서 자기만 옳다는 것을 과시합니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회가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지상의 교회는 매우 불완전한 교회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 혼란을 겪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상의 교회, 지역교회가 완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서 생긴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천사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끊임없이 죄와 싸우는 부족한 죄인들이 초청 받아 몰려온 곳이 교회입니다.

지상의 교회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교회에 허물이 있다고 연약성이 있다고 내 맘과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너무 쉽게 화를 쏘아대서는 안됩니다. 그 연약성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부간의 이상향이 무엇인가를 의논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아내, 내 남편의 허물을 마구 비난하면 가정의 행복은 깨어지는 것입니다. 나라의 교육 정책을 비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 못하는 내 자녀는 내 격려의 대상일 뿐입니다. 교우나 교회는 나의 사랑과 격려를 먹고삽니다. 


IV. 교회는 병원이다

어떤 교회가 과연 이상적인 교회일까요? 신구약 성경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교회론을 다룬 책이 에베소서입니다.

당시 소아시아 여러교회 가운데 에베소 교회는 이상적인 교회가 될 수 있는 소질을 가장 많이 갖춘 교회였습니다. 좋은 교회가 되려고 하면 창립자가 좋아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 창립자는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도였기 때문에 교회를 창립하고 또 다른 곳에 가서 세우고 다시 다른 교회를 향하여 떠나곤 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에베소 교회만큼은 교회를 창립한 이후 3년동안 목회를 했고 또 처음 멤버들에게 소중한 제자훈련을 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는 위치적으로 교회가 서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지역의 교통중심지였습니다. 당시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다이아나 신전이 세워질 만큼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고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가 에베소였습니다. 

이처럼 에베소 교회는 훌륭한 교회론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목회자가 훌륭했습니다. 위치적으로 아주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가 보여주는 에베소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전혀 완전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에베소서를 읽는 사람들에게 크게 실망을 주는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에베소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일면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자녀들과 핸드폰 통화를 하면서 "밥 잘 먹어라" 한다면 그 아이는 밥을 잘 안먹는 아이일 겝니다. "밤에 일찍 들어오너라" 라고 말한다면 아마 귀가 시간이 좀 늦은 아이라는 뜻입니다. 전화를 하다가 "오늘은 싸우지 말고 들어오너라" 그렇게 얘기한다면 이 아이는 싸움쟁이라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4장 25절에 보면 바울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에베소 교회안에 거짓, 진실하지 못함, 위선이 가득했다는 얘기입니다. 26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회안에 혈기 부리는 사람들, 걸핏하면 화를 버럭내는 사람들, 성질 더러운 사람들이 가득했던 모양입니다. 28절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라" 다시 교회안에 심지어 옆에 앉아있는 사람 가방 뒤지고 도벽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29절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 교회안에 상소리, 음담을 좋아하는 사람, 이간질하고 흉보고 헐뜯고 입술로 범죄하는 사람이 수두룩했다는 거지요.

그 이전 2장에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지 못하여 갈등을 겪고 싸움박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모습이 이상적인 에베소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교회는 성인들이 모여서 천국을 건설해 놓고 살아가는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가 말하는 이상적인 교회는 병원이었습니다. 교회안에 아픈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 교만한 사람들, 혈기 많은 사람들, 거짓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입이 가벼워서 걸핏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교회안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도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왜요? 내가 바로 그중 한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누구를 비판할 겨를이 없습니다. 교회에 흠이 있다고 마치 전교회가 다 타락한 것처럼 매도하거나 폄하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교회에 대한 생각, 개념을 바꿉시다. 교회는 천국이 아니라 병원입니다. 만약 이 땅에 살아가다가 한 완전한 교회를 만나시거든 여러분들은 절대로 그 교회에 등록하거나 그 교회 교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 교회 한 멤버가 되는 순간 그 교회는 흠이 있고 아픔이 있고 갈등이 있는 교회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V. 치료중·공사중

한 학생이 꿈에 숙제를 풀고 있었습니다. 문제인즉, 한 아이가 호랑이에게 쫓기다 낭떠러지 앞에 왔습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는 호랑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또 어떤 아이는 죽은 척 한다. 또 한 아이는 호랑이가 덮치는 순간 살짝 피하여 낭떠러지에 호랑이가 떨어지게 한다... 등등 대답이 많았습니다. 드디어 선생님이 정답을 말씀하십니다. "정답은 말이야~" 그리고는 꿈을 깨었습니다. 

왜 주께서 세운 교회가 왜 이토록 약점과 허물이 많은가? 정확한 정답은 말이야... 아쉽지만 정답은 없습니다. 온전한 공동체가 이땅에 존재한다는 것은 꿈입니다. 교회도 흠많은 인간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껴주고 서로 격려하며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연약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나를 들여다 보면 됩니다. 그 흠과 연약성은 바로 내 안에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병원입니다. 

좋은 병원은 언제나 많은 환자들이 몰려와서 치료를 경험하는 곳입니다. 병원은 환자들이 찾아오는 것을 좋아합니다. 딱히 돈을 많이 벌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병원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환자를 치료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바로 그런 사람이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그들이 교회에서 치료를 경험하고 변화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토막으로 짤라 놓고 보면 제대로 고침받지 못한 사람들 투성이 입니다. 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때로는 지상의 모든 교회들이 이상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보이면 그는 아직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는 흠이 있습니다. 부족함이 있습니다. 상처투성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왜요? 이 교회 머리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갈기갈기 찢겨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지상교회는 하나입니다. 교파가 달라도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되게 하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연약하게 보여도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 왜요? 그 교회안에는 영광스러운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너도 환자요 나도 환자입니다. 병원에서 안대하고 나오는 사람이 다리 부러진 사람보고 비웃지 않습니다. 팔 부러진 사람이 맹장 수술하고 나온 사람 비난하지 않습니다. 서로 용납하는 것이 병원입니다. 그것이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장애인입니다. 서로 불쌍히 여기며 사는 곳이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장 32절 마지막절에 보면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자폐증 딸을 둔 가정이 있습니다. 그 부모는 맞벌이 가정이었습니다. 제게 상담하기를 "이 아이를 어디에 좀 맡겨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부모의 사랑안에서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 아이는 이 땅에 태어날 때에 가족공동체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도록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어머니가 직장을 휴직했고 아이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아주 많이 좋아졌다는 소식을 듣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치료받는 분위가 되기 위해서는 가족적인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큰 교회안에서 은혜로운 예배를 경험함과 동시에 영적 가족 목장 안에서 신령한 가족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목장은 내 아픔을 자연스럽게 내어놓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실수해도 용납이 되는 자리입니다. 


VI. 우리는 한가족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늘나라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신 그분의 몸입니다. 만왕의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 거룩하신 분의 신부의 얼굴에 상처를 낼 수는 없습니다. 신부의 옷을 찢고 더럽힐 수가 없습니다. 이 땅의 교회가 못나 보여도 소중한 주님의 신부입니다. 서로 귀하게 여기고 교회에 경외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배운 가장 소중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가족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2장 13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느니라"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진 사람들입니다. 서로 돕고 서로 겸손히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서로 세워주고 붙들어 줄 때 하나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가정입니다. 목장입니다. 소그룹입니다. 남의 탓, 교회 탓하지 말고 자기를 성숙시켜 나가면 자신도 치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를 극장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듯이 옆사람에게 신경쓸 필요없이 공연내용에만 집중하면 되는 곳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나 설교를 통해 나혼자 은혜를 체험하고 감동을 받으면 됩니다. 교회안에서 감동을 받는다는 것, 은혜를 체험한다는 것, 느낀다는 것,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그것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 혼자만의 은혜와 감동으로 끝난다고 하면 그 감동은 무책임한 감동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를 학원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 저것 여러 강좌를 개설해 놓고 내가 필요한 부분을 채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마치 백화점과도 같습니다. 좋은 물건 쌓아 놓고 손님이 필요한 물건을 사가도록 합니다. 교회가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 준다는 것은 귀한 일이지요. 그러나 교회의 본래의 모습, 본질은 아닙니다. 필요를 채워서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를 가르치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 나라 가족입니다(엡2:19). 모두다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한가족입니다. 가족은 위기 때에 서로 의지합니다. 아픈 사람들을 도와줍니다. 연약한 어린 자녀들을 잘 양육해 주는 것입니다. 나에겐 당신이 필요하고 당신에겐 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그렇게 디자인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교회의 한 가족이 되면 부족해도 좋고 모자라도 좋고 잘 몰라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품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잘 오셨습니다. 


VII. 치료중인 공동체

이제 교회에 대한 이상이 분명해 졌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가족이다. 치료중인 병원이다. 서로 치료하고 서로 세워주고 서로 돌봐주며 만들어 가는 곳이다. 그래서 공사중입니다. 아직도 공사중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치료중, 공사중입니다.

거기엔 반드시 변화가 있습니다. 어떤땐 땅만 고르고 골조 공사만 계속되는 것 같지만 아파트가 완성되어 입주하는 날이 있게 마련입니다. 만일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 1년, 5년, 10년을 교회 다녀도 생활이 변화되지 않고 습관, 사고방식 가치관의 변화가 없다면 교회생활 잘못한 것이지요. 교회는 치료가 있는 병원입니다. 치료가 완성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머리를 치료하고 나면 손을 치료해야 되고 손을 치료하고 나면 다시 발을 치료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안에는 교회가 성장하고 대형화되어지는 것을 원치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태도가 못됩니다. 성장을 원한다고 모두 성장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원치않는다고 성장이 안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장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생명체가 건강하면 성장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속에 교회의 가족적인 분위기를 원하는 그 마음만큼은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름다운 마음이고 그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자리를 교회는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계속 커져야 하고 또 한편 계속 작아져야 한다고 외쳤던 릭 워렌의 말은 진리입니다. 교회의 공동체성, 가족경험, 심령의 치유 등은 작은 모임에서만 이루어집니다. 그곳이 우리교회 목장이란 곳입니다. 반드시 목장이나 사역팀안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를 온전한 교회로 이해하지는 맙시다. 아직도 공사중인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치유가 활발히 일어나는 병원으로 만들어 가면 거기 아름다운 교회, 이상적인 교회가 있습니다. 목사도 치유를 경험하고 싶습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도 치유를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나의 치부를 드러내고도 부끄럽지 않는 가족공동체를 만들어 가십시다. 「공동체를 세우는 40일」캠페인 이후 물씬 커진 우리교회를 기대하십시다. 비전채플 건축이 아름답게 진행되어가면서 교회 공동체도 건강한 가치로 세워져가길 원합니다. 
이 자리에 모이는 큰 교회는 작은 목장교회가 감당할 수 없는 영광스런 예배와 찬양, 큰 힘이 필요한 선교, 성도들 훈련 등을 담당할 것입니다. 이제 목장들이 저마다 흩어진 자리에서 온전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 가도록 하십시다. 연약하고 모자라는 모습 그대로 신비한 교회입니다. 치료중, 공사중 그 모습은 지상교회의 이상입니다.

어떤 교회광고시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 아무개 장로님께서 직장 관계로 멀리 이사를 가시게 되어 오랫동안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배마치고 서로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자리에 다 일어나 찬송가 "우리 함께 기뻐해" 찬송하겠습니다. 

- 아무개 권사님이 별세하셨습니다. 유족들을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일 새벽 장례예식이 있습니다. 이제 모두 일어나 찬송하십시다.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네가 떠나고 죽는 것이 우리의 아픔이 되고 슬픔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 우리는 함께 예배하고 서로 교제할 때 행복한 공동체입니다. 
- 서로 섬기고 서로 격려할 때 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 보다 더 귀한 가치는 없습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40일」캠패인을 보내며 우리 모두는 행복했습니다. 
- 우리교회가 얼마나 건강한 교회인가를 확인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 우리교회가 얼마나 건강한 교회를 향해 가고 있는가를 감사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 더 멋진 교회를 이루어갈 꿈을 꾸는 시간이었습니다. 
- 믿음이 회복되고 가정이 살아나고 교회가 생기로 넘치는 시간이었습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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