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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방이 막혔을 때 (사 3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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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막혔을 때 (사 38:1~8) 

  
세계적인 명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원래 첼로 연주자였다. 그는 심한 근시로, 시력이 아주 나빠서, 연주 때마다 악보를 잘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악보를 외워버렸다. 오케스트라 특성상 조화를 이뤄야하기에, 다른 파트 악보까지 모조리 외워버렸다. 

한번은 중요한 뉴욕 연주를 앞두고, 지휘자가 병원에 입원했다. 부득이 대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연주를 지휘할 수밖에 없었다. 의논 끝에 악보를 모조리 외우고 있는, 토스카니니에게 지휘를 맡겨, 지휘를 하게 되었다. 어렵지 않게 모든 곡을 잘 소화하여, 연주를 마쳤다. 

이것이 바로 토스카니니가, 세계적인 명지휘자로 발 돋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훗날 그는 “나의 나쁜 시력이, 나를 명지휘자로 만들어 주었다.”라고 고백했다. 위기는 개인적인 위기가 있고, 사회적인 위기도 있다. 또 국가적인 위기도 있다. 누구나 위기를 겪는다. 

  (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로 시작이 된다. 솔로몬이 죽자 이스라엘과 유대로 나누어진다. 나라를 다스리는 왕들은, 하나같이 사악했고, 백성들은 어리석었다. 그때 히스기야라는 선한 왕이 나타나, 우상을 파괴하고, 성전을 수축하고 예배하며,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특별히 앗수르의 산헤립 왕의 선전포고를 하자, 히스기아 왕은 선전포고문을 들고, 성전에 들어가 기도한다. 그래서 적군 18만 5천명을 격퇴시키는, 이적을 경험한다. 이제는 안심하고 편안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갑자기 질병이 찾아왔다. 죽음이 예고되었다. 

왕의 주치의도 희망이 없다고 선언할 만큼, 왕의 병세는 절망이었다. 심지어 이사야 선지자마저, 히스기야 왕에게 “왕은 더 이상 살 수 없다. 네 집에 유언하라.”고 했다. 나라의 혼란은 평정되었고, 이제는 편안히 쉴 수 있다고 할 때에, 죽음이 찾아왔다. 


1. 왜 히스기야 왕처럼 선한 사람에게, 이토록 좋지 못한 일이 생길까? 

성실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왜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할까? 착하게 사는 사람이 갑작스런 질병이나 사고로 가족들을 잃게 되고, 믿었던 친구들에게 배신과 기만을 당할까? 

헤럴드 쿠시너(H.S. Kushner)라는 사람이 쓴 “왜 선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가?”라는 책이 있다. 쿠시너는 천성적으로 착한 사람이고, 큰 교회에서 목회하며, 모든 교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훌륭한 목사님이었다. 

기쁘고 보람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3개월 된 어린 아들이 중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병원에서 진단한 결과 “조로증”이라고 하였다.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늙어가기 시작하였다. 10살이 되기 전에, 팔순노인처럼 늙어 버리고, 더 이상 세상에 살 수 없었다. 

이런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부모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바르게 살아보려고 노력했는데, 착하고 선하게 살려고 했는데, 하나님 뜻대로 믿음으로 살려고 했는데, 왜 이런 고난이 찾아왔는가? 내가 이 고통을 보면서 살아야 하는가?” 

이 문제를 끌어안고 기도하며, 오랜 시간을 씨름하게 된다. 기도를 마친 그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1) 인생의 모든 고난은, 나 혼자 당하지 않는다. 

(2) 이 땅에 우연한 일은 없다. 나는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이해가 안 되고, 용납되지 않지만, 이 고통 가운데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계획이 있다. 

(3) 길을 막으신 하나님은, 다른 길을 주신다. 
하나님은 땅의 문을 닫으실 때, 하늘 문을 여신다. 한 가지 문을 닫으시면 다른 문을 열고, 우리를 초청해 주시는 분이시다. 더운 공기가 빠지면 차가운 공기가 들어와, 그 자리를 채워준다. 

물론 우리 중에 그 누구도,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마다 형통한 삶, 기쁜 날을 원한다. 그러나 형통하기만 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처럼 된다. (눅12:19)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렇게 육신만 아는, 짐승같은 사람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는 불행이다. 신앙인에 최고 불행이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이런 불행을 원치 않으신다. 우리는 때때로 악인이 형통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세상의 가치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세상의 표준으로, 돈이 많고, 좋은 차를 타고, 넓은 집에 살고, 권세와 명예를 가지면 형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믿음과 순결한 삶을, 형통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때때로 곤고한 날을 허락하신다. 우리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 아름다운 인격을 얻게 된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얻게 된다. 평안히 쉬고 풍랑을 만난 배는, 짐을 버려야만 살 수 있다. 하나님은 풍랑을 통해서, 이제까지 버리지 못한 것을 버리게 만드신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버리는 것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베드로는 그물을 버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배를 버렸다. 

세상의 쓸데없는 것을 붙들고 있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학정에 시달리도록 하셨나? 그래야 애굽을 떠나게 된다. 원숭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보이는 병 안에 넣어두면, 냄새를 맡고 와서, 음식을 꽉 쥐어 손을 뺄 수 없어 결국 잡힌다. 버리지 못하면 죽는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결박당한 채, 풀무불에 들어갔다. 그런데 결박되지 않은 네 사람이 불 가운데 걸어 다녔다(단3:24-25). 고난 중에 있는 다니엘의 친구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동시에 고난의 풀무불은 좋은 것은 하나도 해하지 못하고, 오직 나를 묶고 있는 결박의 끈만 태우는 축복이다.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이적은, 위기의 때에 나타난다. 이적은 사람으로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문제가 해결된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이적을 많이 체험한 왕은, 히스기야로 연상된다. 왜냐하면 그만큼 히스기야에게는,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어려울 때 기도하게 됨으로, 주님 전에 나와 말씀을 들음으로 ‘저건 내게 주신 말씀이야.’ 하면서 하나님 말씀, 복된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때 이미 승리하였다. 누구나 문제는 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중요하다. 


2.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문제를 푸는 유형을 살펴보면, 


(1) 긁어 부스럼 형이 있다. 자기 재주, 자기 경험, 인간적인 방법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이리저리 뛰다가, 더 문제를 키우는 사람, 더 문제를 흩으러 버리는 사람이 있다. 

(2) 절망 형이 있다. 고민하고 절망한다. 자학한다. 이웃을 향하여 불평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한다. 

(3) 에라 모르겠다는 형이 있다. 문제가 있으나 없으나,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는 미련한 사람들이다. 

(4) 지혜 형이 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아주 쉽게 문제를 푸는 사람들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어느 날, 군사들의 막사를 방문했다. 군사들이 노끈을 요상하게 묶어놓고, 노끈을 풀기 내기를 하고 있었다. 힘센 자도 풀지 못했다. 꾀 많은 병사도 노끈을 풀지 못했다. 

대왕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시퍼런 칼을 높이 치켜들더니, 밧줄을 싹둑 잘라 버렸다. “나는 문제를 이렇게 푼다.”면서, 만면에 미소를 띠고, 유유히 사라졌다. 언제나 문제가 잘못이 아니다.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력이 없는 게 잘못이다. 깊은 물이 문제가 아니고, 수영하지 못함이 문제다. 

물이 많을수록 수영은 쉽다. 길이 막혔을 때, 막힌 길 때문에 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 넓은 길을 발견하고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다. 똑같은 햇빛이지만 진흙은 굳어진다. 초콜릿은 녹아버린다. 똑같은 햇빛을 받고도, 살아있는 나무는 더욱 싱싱하게 자란다. 죽은 나무는 바싹 말라버린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제를 푸는 언약의 열쇠를 주셨다. 하나님은 (-)를 (+)로 바꿀 수 있는, 힘과 지혜, 믿음과 능력을 주셨다. 문제에 부딪혔을 때, 히스기야는 어떻게 해결했나?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로 삼았다. 

그는 단순히 아픔만 보고, 절망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났다. 기도가 없는 형통보다는, 차라리 기도하는 곤고가, 우리를 더 아름다운 길로, 더 유익된 길로 인도해 준다. 

(1) 히스기야는 낯을 벽으로 향하여 기도했다(2). 

① 그 벽은 성전을 향한 벽이었다. 
지금 당장 성전으로 달려가 울부짖고 싶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병이 악화되어,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했다. 신앙인의 삶의 중심은 성전이다. 중심이 흔들리는 팽이는, 오래 돌아갈 수 없다. 

왜 우리 인생이 흔들리는가? 믿음의 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왜 인생이 불만스러운가? 내 생애 축인 예수님이 보이지 않아서 그렇다. 말씀과 성전의 축을 잃어버리면, 비틀거리고 흔들거리는 삶을 살게 된다. 교회 중심, 말씀 중심, 예수님 중심의 사람은, 비바람에 흔들리는 법이 없다. 

② 벽은 절망과 좌절의 상징이다. 벽은 문이 없다. 밖으로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곳이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길이 전혀 없다. 따라서 절망 앞에 섰을 때,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을 때, 모든 문이 닫혀있을 때, 히스기야는 하나님만 바라보라! 

우리의 길이 막히는 이유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다. 땅의 문이 닫혀졌을 때에, 하늘 문이 열려지게 된다. 앞뒤 좌우로 길이 막혀있고, 땅으로 꺼질 수 없어도, 하늘 문은 언제나 열려있다. 우리 인생에, 가는 곳곳마다, 슬픔이 있고, 문제가 있고, 벽이 앞길을 가로막고 서 있나요? 

우리가 태양을 등지고 살아가면, 언제나 그림자가 내 앞에 있다. 그러나 돌아서 태양을 바라보는 순간, 그림자는 순식간에 내 등 뒤로 물러가게 된다. 우리 인생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으면, 주님을 바라보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림자는 뒤로 물러가게 된다. 

(2) 히스기야는 심히 통곡했다(3). 

히스기야의 눈물은, 영혼에 쌓였던 오물을 씻어내어, 그 영혼을 순수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눈물은 세상의 욕심을 비우고, 주님으로 채워주었다. 다윗의 눈물이 그랬고, 에스라의 눈물이 그랬다. 

또한 예레미야의 눈물이 그랬다. 그래서 스펄전은 성도의 눈물은, 천국 가는 고속도로라고 말했다. 성도의 눈물은, 막힌 길을 뚫는 폭탄과도 같다. 하나님은 순수한 눈물을 좋아하신다. 진실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하늘의 위로가 저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마5:4).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죽어 가는 영혼 때문에, 우는 자들은 복이 있다. 나라를 위한 눈물, 교회를 위한 눈물, 방황하는 자녀를 위해 흘리는 눈물이 있어야 살아난다. 지금 우리는 어떤 눈물을 흘리고 있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 우리의 눈에서 흐르는 모든 눈물을, 닦아주신다(계21:4). 

(3) 히스기야는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어 놓고 기도했다(3). 

마음을 쪼개놓고, 자신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충성했는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낱낱이 주님 앞에 고백하며 기도했다. 하나님 당신 앞에는, 감출 수도 덮을 수 없다. 또한 숨길 수 없다. 

우리의 작은 충성도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모하고, 은혜를 그리워하는지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 전능하고 신실하신 주님을 믿고 기도할 때, 문제들이 녹기 시작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드러낼 만한 내용이 있는가? 곤충들 가운데 보호색을 가진 것들이 있다. 

나무의 색깔을 따라 옷을 갈아입고, 계절을 따라 색을 바꾸어, 자신을 보호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게, 1년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 그러나 비가 오나 눈이오나, 더울 때나 추울 때나, 도도하게 자기의 색을 가지고 있는 거북이, 학, 두루미, 사자 등은, 옷을 갈아입지 않아도 오래 오래 산다. 

하나님 앞에서나, 세상에서나,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보호색을 걸치고 다니지 말라. 그리스도인의 한 가지 색깔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살아간다.” 이런 신앙의 옷을 입고, 살아감이 중요하다. 이것이 히스기야의 삶의 자세였다. 


3. 하나님은 이 눈물의 기도를 외면하시지 않으셨다(5-6).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15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성을 보호하리라.”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루 동안 태양을 멈추게 하신 분이시다. 또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해 그림자를 10도나 뒤로 돌리셨다. 바로 여기에 문제 해결의 길이 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면, 불가능은 가능해 진다. 고난은 변해 기쁨이 된다. 죽음은 부활로 바뀐다. 

우리 인생들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우리는 언제나 위험한지 모르고 달려만 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 하셔서,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어 주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내가 곧 길이니라. 이 길은 절대로 막히는 길이 없느니라. 

히스기야의 병이 낫고, 생명이 연장되었을 때, 그는 이런 시를 썼다. (사38:10-20)을 공동번역으로 읽어보면, “이제 한창 살 나이에, 저승의 문에 들어가야 하는구나. 남은 세월을 빼앗기고 마는구나.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사람이 사는 이 땅에서, 다시는 야훼를 뵙지 못하고, 

이 지구 위에 사는 사람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하겠구나. 나의 초막은 목동의 초막처럼 뽑혀, 말끔히 치워졌습니다. 당신께서는 직조공이 천을 감아들이듯, 나의 목숨을 감어들이고, 베틀에서 자르듯 자르십니다. 해가 떠도, 해가 져도, 당신께서는 나를 보아 주시지 아니하십니다. 

아침이 되도록 나는 호소합니다. 주께서 사자같이 나의 뼈를 부수십니다. 해가 떠도, 해가 져도, 당신께서는 나를 보아 주시지 아니하십니다. 내가 제비처럼 애타게 웁니다. 비둘기처럼 구슬프게 웁니다. 내 눈은 높은 곳을 우러러 보다가, 멍해집니다. 나의 주여 괴롭습니다. 나를 보살펴 주십시오. 

내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무엇이라고 주께 아뢰겠습니까? 주님께서 하신 일인데! 내 마음의 슬픔 때문에 잠도 멀리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나의 주여, 내가 마음으로 당신만을 바라보고 살겠습니다. 마음을 진정시켜 주시고, 살려주십시오. 이제 슬픔은 가시고, 평화가 왔습니다. 

당신께서는 나를 멸망의 구렁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나의 죄악을 당신의 뒤로 던져 버리셨습니다. 저승이 어찌 당신을 기리며, 죽음이 어찌 당신을 찬미하겠습니까? 땅 속에 들어 간 자들이, 어찌 당신의 성실하심이 나타나기를 바라겠습니까? 

오늘 이 몸이 찬미하듯이, 살아 숨 쉬는 자만이 당신을 찬미하옵니다. 나도 한 아비로서 자식들에게, 당신의 성실함을 알리겠습니다. 야훼여! 나를 구해 주신 이는 당신이십니다. 우리는 한 평생 야훼의 전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하겠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했다. 주님의 성실함을 알리고, 주님을 찬양하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19세기 러시아 최고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28살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영하 50도의 추운 날씨에 사형장으로 끌려간다. 

이 땅에서 숨을 붙이고, 살아갈 날이 5분밖에 남지 않았다. 이 5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2분 동안에, 나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에게, 따뜻한 인사를 나누리라. 그리고 2분 동안에 살아왔던 지난 세기를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를 하리라. 

마지막 1분 동안은, 내가 발붙이고 살아가던, 이 땅의 아름다움을 둘러본 다음에, 난 조용히 눈을 감고 하나님 앞에 서리라.” 2분 동안 친지 친구들을 향하여, 따뜻한 인사를 나누었다. 지나온 생애를 돌이켜 보는데, 무서운 공포가 엄습해 온다. 

한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렇게 후회스럽게 살지는 않을 것을, 인생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음을, 내가 왜 모르고 살았단 말인가?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후회하지 않으면서 삶을 살텐데… 이때 밖이 왁자지껄 시끄러워졌다. 한 병사가 흰 손수건을 흔들며, 요란하게 말을 타고, 달려왔다. 

황제의 특사령이 내려졌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자기의 피를 찍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썼다. ‘죄와 벌, 까라마 조프의 형제들’ 등 불우의 명작을 남기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히스기야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생명을 연장시켜 주셔서, 지금 살고 있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어야할 존재들이다. 다만 그 시간이, 연장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시간도, 재산도 자녀도, 남편도 아내도, 직장도 사업도 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주인의 심판에 따라, 언젠가는 막이 내려지고, 내 놓아야할 날이 있고, 끝이 있다. 

오늘밤이라도 하나님이 오라고 하시면, 못 가겠다 소리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우리의 연장된 시간, 이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사시기를 원하십니까? 참으로 소중한 문제가 여기에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답이 있고, 길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문제에 길이 열려졌을 때, 어떻게 사시겠냐는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우리의 생애에 뚜렷하고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그를 일컬어 하나님의 사람이라, 주의 제자라 부른다. 

신앙 중에 가장 나쁜 신앙이 기복신앙이다. 기복신앙에는 사명도 없고, 목표도 없다. 다만 형통만을 추구한다. 기도의 사람으로 알려진 사람이 있다고 하자. 대학 입시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서,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되어, 취직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 

취직 후에는 결혼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더니, 만남의 은혜를 주셨고, 가정을 이루게 하셨다. 결혼한 후, 한 동안 아이가 없어 열심히 또 기도했더니, 그에게 아이를 주셨다. 이런 식으로 살다가 죽었다. 겉으로 보기에, 이 사람은 평생을 기도로 산 사람 같다. 그러나 그의 삶은 안타까운 삶이다. 

왜냐면 형통의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명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라면, 영적으로 건강한 삶이지만, 사명 없이 구함은 기복신앙에 불과하다. 예수님을 믿음이, 그저 천국에 가고, 축복받아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서, 더 많은 화장실을 사용하고, 더 좋은 차만 타고 다니는데 있지 않다. 

만일 이러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믿으려고 한다면, 그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을 때, 그 길의 축복을 전하는 인생이 되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혼이 되시기 바란다. 

  
결론적으로, 선하게 살아가려는 성도들이여! 길이 막혔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것이다. 그 후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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