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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1~6, 호 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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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1~6, 호 7:8~16)


안다는 말이 의미가 다양하지요.
오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아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교제에서 오는 체험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다윗이 그랬지요. 시34:8절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 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체험하는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북쪽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대입니다. 

여로보암 2세라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솔로몬 왕국 이후 정치적인 명성과 경제적인 번영을 구가하는 평화를 누리는 시대였지만 도덕적 종교적 생활은 완전히 피폐했던 시기였습니다. 
결과 앗수르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는데 이스라엘 패망 직전 하나님은 선지자 호세아를 통하여 준 마지막 경고와 위로의 메시지가 바로 오늘 호세아서입니다. 

오늘 호세아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의 핵심은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그것도 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것입니다.  

왜 선지자 호세아가 여호와를 힘서 알자고 외칩니까?

1. 왜 선지자 호세아가 여호와를 힘써 알자고 외칩니까?(참조/4:6절)

호4:6절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 

지금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이스라엘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잠언 19:1절에 보면 [지식 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라고 합니다. 
이 지식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할지라도 하나님을 바로 알고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식을 우리는 상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관계의 지식을 교양이라고 합니다. 

만약 교통법규를 모르는 사람이 운전을 한다면 교통사고를 유발시켜 교통 혼란을 가져옵니다. 
이 사회에서 가장 문제아는 바로 상식과 교양이 없는 사람입니다. 목욕탕 안에서 떼미는 사람  엘리베이터 안에서 휴대폰 거는 사람 우회전 차선 막고 직진 신호대기 하고 있는 운전자 예배 시간에 껌 떡떡 씹고 있는 교인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몰상식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W이론의 저자 이면우 교수의 글 가운데 보면 이 나라의 문제점은 사회공적이 대접받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사회공적이란 이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정부의 고위기관이나 기업의 최고 경영진에 앉아 있다면 지존파보다 더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회공적에 해당되는 부류 가운데 한 종류가무식한 사람이 부지런한 경우라고 합니다. 무식하면 부지런하기도 해야지 그럼 어떡합니까? 할지 모르지만 이런 사람이 중책을 맡게 되면 건드릴 것 안 건드릴 것, 갈 곳 안 갈 곳, 참석할 곳 안할 곳 가리지 않고 다 참석해야 하고 간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문제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서도 자기가 제일 잘 믿는다고 착각하고 있는 직분자입니다. 오늘 자신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고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정작 자신들이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무식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되려 나보다 성경 많이 아는 사람 있거든 나와 보라고 해 하던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는 열정만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열정이 되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문제는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를 알자는 것입니다. 

그것도 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것입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말은 여기에 힘써(라다프)란 말은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일에 온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열심히 좇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실감나게 말한다면 숨막히게 온힘을 다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 수도사가 스승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스승은 대답했습니다. `갈망함으로써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느니라` 
`저는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그 분을 못 찾고 있을까요?` 
스승은 제자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 제자를 데리고 강가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제자의 머리를 잡아 물속에 밀어 넣었습니다. 
스승의 행동에 놀란 제자는 스승의 손아귀에서 풀려나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습니다. 

한참이 지나자 스승은 제자의 머리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번에는 스승이 묻습니다. 
`자네, 내가 머리를 물 속에 넣었을 때 왜 그렇게 몸부림을 쳤나?` 
`그야 숨이 막혀서 그랬습니다` 그 때 스승이 말합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숨막히게 찾으면 하나님을 찾게 될 걸세`...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생명을 걸고 하나님을 힘써 찾을 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 방법상의 문제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태도에 그 포인트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사업으로 성공하려면 몇 가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아이큐가 좋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머리가 좋아서 좋은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본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어도 이것을 뒷받침할만한 자본이 없으면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세 번째는 그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기술입니다. 
좋은 아이디어와 충분한 자본이 있어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전문성이 없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는 태도입니다. 즉 일을 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중에서 조금 모자라도 되지만 절대로 부족해서는 안 되는 것이 한 가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이큐는 조금 모자라도, 자본 역시 약간 부족해도 되며, 그 일에 전문성이 부족하면 어려움은 겪겠지만 그래도 성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자세만큼은 눈곱만큼이라도 부족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자세가 바르면 다른 것이 부족해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우리의 자세를 한 번 점검해 보세요 
나는 지금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하여 힘써 좇아가고 있습니까?. 
이 열심이 식어져 있다면 지금 지식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합니까? 


2. 왜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합니까?(6:1-2절)

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니라 ]      
여호와께서 도로 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싸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본래 여호와를 알자 라는 말속에는 우상숭배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라는 뜻이 내포된 말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돌아가자는 말은 참된 회개를 말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삶을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애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인애에 눈이 뜨여져 인애 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어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삶을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합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2절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라고 합니다.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킨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1) 하나님만이 고치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신32:39절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5:13절에 보면 [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저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 세상의 권력과 부가 너희 상처를 낫게 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헷시드 주석에 보면 [ 이 말은 하나님께로 온 상처는 하나님만 통해서 고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 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중에 불평할 때 불뱀으로 심판하시고는 놋뱀으로 치료하신 하나님인 것처럼 

찬527장 3절 가사처럼 [ 채찍 맞아 아파도 주님의 손으로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 신앙생활 잘못하다가 생긴 문제라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하나님으로부터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2) 회복이 빠르고 확실히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혹 인생 살다가 어려움 당하거든    이틀 후에 제 삼일에 반드시 살리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특히 사58:8절에 보면 빠른 회복을 원하거든 금식하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라 ] 

우리가 금식하며 간절히 여호와께 회개하면 네 치료가 급속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선지자 호세아가 하나님께 돌아와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합니까 어떤 하나님이시기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합니까? 


3. 우리가 알아야 할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3-6절)

3절 [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 

1) 우리 하나님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원어 해석에 의하면 5:15절 마지막, 나를 간절히 구하라는 말과 새벽빛과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본래는 찾다 라는 어원에서 출발하는데 의역한다면 간절히 찾는 자가 찾는다는 말입니다.

마7:8절 [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는 분으로 간절히 찾는 자에게 반드시 찾게 하시는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2) 늦은비같이 결실하기 위해 적당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즉 팔레스틴 기후는 이른비와 늦은비가 있습니다. 
이른비는 겨울비로서 파종 때에 내리는 비이고 늦은비는 봄비로서 결실기에 내리는 비입니다. 
우리와는 반대이지요. 이른비와 늦은비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비로써 

신11:14절 [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 합니다. 
하나님의 적당한 은혜는 하나님의 적당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아무리 이른비가 와서 파종했다 할지라도 늦은비가 오지 아니하면 결실할 수 없습니다.
좋은 대학 합격했다고, 좋은 직장 취직했다고 좋은 신랑 좋은 신부 만나 결혼했다고 다 된 것 아닙니다.
늦은비의 은택을 입어야 합니다. 

탈무드 이야기입니다. 한 청년을 어떤 회사가 그를 고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졸다가 그만 크게 도둑을 맞았습니다.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다른 곳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금은방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이 청년은 도둑이 또 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밤에는 가짜 보석을 즐비하게 진열하고 진품은 다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사재를 털어 좋은 카메라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안심하고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간밤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잊어버린 것은 꼭 하나였습니다. 카메라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늦은비의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슥10:1절 [봄비 올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 ] 

봄비 바로 늦은 비입니다.
늦은비의 은혜를 구하면 소낙비 같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기를 힘써 아는 백성에게        
새벽빛같이 일정하신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며        
늦은비와 같이 적당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에게 풍요로운 은총과 축복을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며 알수록 우리의 삶은 더 풍요로워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새벽빛같이 나아오시며, 늦은비같이 임하시는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누릴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있습니다. 
에브라임과 유다의 마음을 표현하기를 4절에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로 표현합니다. 
아침 구름이 수시로 변하듯이 그들은 수시로 그들의 마음을 바꿔 변덕스러움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슬과 같이 쉬 사라짐으로 신앙이 있다가도 얼마가지 않아 하나님을 멀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즉 그들은 상황에 따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하나님이 없는 민족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이 한결같이 확고부동한 믿음을 가지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시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모양은 아침과 저녁의 신앙이 다른 형식적인 모습들입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 고 합니다. 제사의 의식은 있고 예배의 형태는 갖추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애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알지 못하는 예배는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애가 뭡니까? <헤세드> 라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구약에 성도를 <헤시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말은 하나님께 드려진 헌신된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반드시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애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왜 인애를 모르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립니까? 

7:8절에 [마음이 열방에 혼잡되어] 그렇다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좇아가야 하는데 세상을 좇아가고 있으니 하나님을 인애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왜 여호와께 돌아가지 않습니까? 
왜 오늘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까? 


4.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습니까?(7:8-10절)

1) 7:8절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 되니」라고 합니다. 혼잡은 이방 민족의 풍습과 사고에 물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력이 최고고 돈이 최고고 쾌락이 최고인 신앙 그것은 바로 바알 종교요 우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7: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과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계18:2-4절에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네 백성아 너희는 거기서 나오너라 ] 고 합니다. 
세상은 처음에는 우리를 유혹하며 온갖 부귀영화를 다 줄 것 같지만 결국은 실망시키고 만다는 것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 문제는 자신들의 이런 혼잡 상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9절 [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었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얼룩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 혹 성도들 가운데 보면 한 밑천 잡으면 예수 잘 믿겠다고 하면서 그 마음에 세상을 향해 늘 껄,껄 하는 직분자들 있지요. 보세요, 정신 차려야 합니다.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었으나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백발이 얼룩얼룩할지라도 깨닫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런 직분자들 한 평생 껄,껄 하다가 구원받으면 잘 받는 것입니다. 
혹 이런 직분자가 이 자리에 계신다면 먼저 여호와께 돌아와 여호와를 아는데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이뤄져야 인통 물통 만사형통이 이루어집니다. 

3) 10절에 교만해서 여호와께 돌아오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5:5절에 [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 얼굴에 교만이 뚝, 뚝 흐른다는 말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16절 마지막에 저들이 사모하던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리라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느냐?
하나님께로 안 돌아가도 잘 산다는 것입니다.


5.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11-16절)

그러나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잘 될 것 같지만 오늘 성경은 하나님 떠난 상태를 이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1) 7:8절 [뒤집지 않은 전병] 이라고 합니다. 뒤집지 않은 전병이 무엇입니까? 
부침 떡을 구웠는데 다 되었다 싶어 뒤집어 보니 새카맣게 타서 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한번 따라 합시다 - 공평하신 하나님 하나님 떠나 잘된다고 너무 힘주지 마세요 - 뒤집지 않은 전병입니다. 
남들 보기에는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그러나 속은 타서 먹지 못하는 뒤집지 않은 전병입니다. 

1) 11절 [어리석은 비둘기] 라고 합니다. 여기에 비둘기의 어리석음은 먹이를 찾다가 쳐 놓은 그물을 보지 못하고 그 안으로 곧장 날아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나 애굽에 도움을 청하러 갈 때 
그것이 곧 자신을 헤치는 불신앙적인 행동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빗대어 말한 것입니다.

앗수르나 애굽은 결국은 이스라엘의 적이듯이 세상은 결국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에서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눈앞에 먹이 때문에 그물로 뛰어드는 어리석은 비둘기같이 세상에서 유익을 구하는 성도는 결국은 올무와 덧에 걸려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2) 16절 [속이는 활] 과 같다고 합니다. 
속이는 활은 힘없는 화살로서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그 앞에 떨어진 화살을 말합니다. 
신32:10절 이하에 모세의 노래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독수리 새끼 훈련시키듯이 훈련시켰다고 했습니다. 왜? 땅의 더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기 위하여 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라고 탄식합니다. 
마찬가지로 본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삼기 위하여 15절에 [ 내가 저희 팔을 연습시켜 강건케 하였으나  저희는 내게 대하여 악을 꾀하는 도다 ] 라고 합니다. 결과 속이는 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실망시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교회가 하나님의 제사장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시기 바랍니다. 

시78편에도 같은 말이 나옵니다. 78:41절에 광야생활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훈련시켰지마는
[저희가 돌이켜 하나님을 재삼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격동하였도다 ] 라고 합니다. 
격동이란 말 - 화나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원뜻은 제한시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였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역시 57절에 [ 속이는 활같이 ] 빗나갔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속이는 활 즉 힘없는 화살이 되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삶인 것입니다. 
꼭 마음에 새겨두세요. 하나님 떠나 잘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뒤집지 않은 전병이요, 
어리석은 비둘기요, 속이는 활이라는 것을, 우리는 예배를 통해 새벽빛같이 일정하게 나아오시며 늦은비같이 적당한 은혜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힘써 알려고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꼭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새벽빛 같은 새 희망과 늦은비 같은 적당한 은혜로 풍요로운 삶을 안겨다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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