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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죽옷을 주신 하나님 (창 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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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옷을 주신 하나님 (창 3:1~21)
 

창세기 3장에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슬픈 사건과 더불어 가장 희망찬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자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범죄한 사건을 말하고, 후자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셔서 영원히 죽을 운명에 처한 인간들을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말합니다. 실로,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아담의 타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만약에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 역시 죽음과 질병과 저주와 상관없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류의 조상은 뱀의 꾐에 넘어가서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불행을 자초했습니다. 

하루는 뱀이 하와에게 다가와서 말을 건넸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언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은 교묘하게 말을 돌려서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와가 뱀의 사악한 의도를 파악하고 상대하지 말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만 대꾸를 했습니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실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고 바꾸었습니다. 이는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견고히 서지 못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자 뱀이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말하기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뱀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들기 위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시며 절대로 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나 행위에는 절대로 불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와는 “그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뱀의 말에 귀가 솔깃했습니다. ‘나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나무를 보니까 이전과 달라 보였습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였습니다. 하와는 손을 뻗어 그 실과를 따먹고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하와가 아담에게 강제로 먹게 한 것이 아닙니다. 아담 역시 뱀의 말을 전해 듣자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을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음 받은 사람이 어찌 창조주 하나님처럼 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분수에 맞지 않는 생각을 품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르기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잠 16:18).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자 뱀의 말과 같이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는 육신의 눈이 밝아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마음의 눈이 밝아진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수치와 비참함을 보는 눈이 열린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3장 7절에 보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타락 이전에도 아담과 하와는 옷을 입지 않고 지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 때에는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천진난만 갓난아기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아담과 하와를 감싸고 있었으므로 수치를 느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그 영광이 그들에게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뱀의 말이 거짓말인 것이 드러났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와를 꾄 뱀의 배후에 마귀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뱀은 마귀의 하수인이고, 하와를 꾄 장본인은 마귀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계시록 12장 9절에 이르기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일컬어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고 하셨습니다.

뱀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 아담과 하와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까요? 수치심과 두려움이 그들을 엄습했습니다. 두 사람은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고,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는 뱀의 말과 정반대로 참혹한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한편, 아담이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타락했을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셨을까요? 창세기 3장에 보면, 날이 서늘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범죄하고 하나님을 피해 숨은 아담을 친히 찾아오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잘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이름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어디 있는지를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담의 위치를 물으신 것입니다. 그 때 아담이 대답하기를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아담의 타락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의 사이에 세우신 언약대로 아담에게 벌을 내리셔야 했습니다. 그렇게 죄를 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고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인생을 영영 저버리지 않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구원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시면서 하신 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뱀 곧 마귀의 파멸을 예고한 것일 뿐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한 최초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최초의 복음이라고도 부릅니다. 여기, 나오는 여자의 후손은 메시야 곧 구세주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은, 메시야가 오셔서 마귀를 멸하고 인생들을 구원하실 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인데, 이는 메시야께서 대속의 고난을 당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옷은 인간의 범죄로 인해 생긴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자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무화과 잎으로 만들어 입은 치마가 최초의 옷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옷의 목적은 수치를 가리기 위함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뭇잎으로 만든 옷은 옷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던 것입니다.

첫 번째로, 가죽옷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을 찾아오셨고, 그들에게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주셨고, 드디어는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에스겔서 18장 23절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이라도 멸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어찌하든지 죄인이 회개하고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가죽옷은 범죄한 인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간곡한 권면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1)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 6)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하여 구원의 잔치를 마련하시고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초청하셨습니다.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인종이나 국적, 남녀노소, 빈부귀천, 학식의 유무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천국 잔치에 참여하여 구원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행위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사랑에 근거한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아담을 찾아오셨듯이,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생들을 멸하지 아니하시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곧 하나님 아버지를 상징하고, 허랑방탕하여 가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된 아들은 범죄한 인생들을 의미합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이 돌아왔을 때 한달음에 달려 나가 얼싸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종들을 불러 말하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가죽옷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속죄의 길을 열어주셨음을 의미합니다.

무화과 잎으로 만든 옷과 가죽옷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릅니다. 무화과 잎은 넓어서 그것을 여러 장 이으면 당장의 수치를 가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곧 말라 버리기 때문에 다시금 수치가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가죽옷은 반영구적인 옷으로서 수치를 완전히 가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무화과 잎으로 만든 옷은 인간의 의를 상징하고, 가죽옷은 하나님의 의를 상징합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것은 비유컨대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해 입고 으스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의로운 사람이라도 그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 더러워져서 빨래통에 던져진 옷들이 서로 ‘내가 더 깨끗하다’고 다툰다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이겠습니까? 인간들이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것은 더러운 옷들이 서로 깨끗하다고 다투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치 잎사귀가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다니는 것과 같이, 죄가 시키는 대로 악을 행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적인 의를 가지고는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엿이 서려면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는 선고를 받아야 합니다. 타락한 본성을 지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의로움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의를 힘입으면 얼마든지 가능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의를 소유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녹과 노아와 욥과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의 인물들이 그들입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특별히 아브라함은 선민의 조상이요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라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온 지 10년이 채 못 되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셔서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기를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너무 늙어서 자식을 잉태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아브라함은 후사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성취될 것을 믿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창세기 15장 6절에 보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이 한 구절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기독교 진리의 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한 대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그의 자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아무리 수양을 하고 도를 닦고 도덕적으로 산다고 할지라도 그런 방법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 같은 인간적인 방법은 마치 무화과 잎으로 만든 치마와 같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려면 무화과 잎으로 만든 옷이 아니라 가죽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 가죽옷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직접 입혀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3장 23절 이하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방법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옷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 사함을 받고 가죽옷 곧 하나님의 의를 부여 받게 되고 의로운 자라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됨을 아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가죽옷은 구세주 곧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하시기 위해서는 짐승들의 희생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범죄한 것은 아담과 하와였으나 죄 없는 짐승들이 그들을 위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때 죽임 당한 짐승들은 순전히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희생당한 것입니다. 이 짐승들은 다름 아닌 메시야를 상징합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바친 모든 제물은 송아지든, 염소든, 양이든 다 메시야를 상징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송아지나 염소나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그 고기를 단 위에서 불사름으로써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하신 대로, 피는 생명을 의미하고, 짐승의 피를 속죄 제물로 바친 것은 생명으로 생명을 대신하는 원리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제사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는데, 그것은 짐승의 피로써 인간의 죄를 속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짐승을 제물로 바치게 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제물이 장차 오실 여자의 후손 곧 메시야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렸지만, 실은 장차 오실 구세주에 대한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만약에 구세주에 대한 믿음이 없이 제사를 드렸다면, 아무리 수 천 수 만 마리를 제물로 바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들을 대신하여 속죄 제물이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라’ 하였고, 사도 베드로는 증거하기를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며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에 이르기를 “11)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보혈을 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우리의 죄가 씻음을 받았으며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담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죽음의 길을 자초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아담에게 여자의 후손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아담에게 하신 약속과 가죽옷은 곧 그의 후손 된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손 된 모든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보내셨고, 그의 희생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옷 입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일서 4장에 보니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즉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며, 그 명령을 기꺼이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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