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막 2:13~17)

  • 잡초 잡초
  • 257
  • 0

첨부 1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막 2:13~17)


사람 만나기가 참으로 두렵습니다. 언제 사람이 돌변해서 나를 해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야 하는데 오히려 서로를 경계해야 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이젠 모르는 사람에게는 호의를 베풀기도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래 동안 사귄 친구가 좋은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죽마고우보다도 20년 이상 사귄 친구보다도 예수님 앞에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더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라 부르시고 친구된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나는 예수님께서 친구라고 불러주실 정도로 그렇게 친하게 예수님과 사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향해 친구라 하는데 나는 감히 예수님을 친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지는 않은지요? 아니 너나 나나 같은 예수님의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반목하고 외면하는 그런 모습은 없는지요? 

언제든지 예수님께서는 먼저 무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갈릴리 바닷가는 바다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해발 마이너스 200미터입니다. 그리고 호수가로부터 언덕을 이루며 사방이 빙 둘러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모이면 호숫가에 예수님이 자리를 잡고 사람들은 언덕에 앉아서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소리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말씀을 잘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런 지형적인 조건을 활용해서 많은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날 야외 음악당을 생각해본다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온 목적은 단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말씀도 듣고 겸사겸사해서 병도 고침 받고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이적도 보고자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무리들이 모이면 그들에게 여러 가지 교훈으로 가르치기를 즐겨 하셨습니다. 그것은 말씀이 능력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능력은 들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아시기에 먼저 무리들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치심은 언제나 주위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을 이용해서 무리들이 이해하기 쉽게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모여 예배할 때마다 이렇게 말씀을 전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바로 말씀에서 나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든지 주님 앞에 나와 말씀을 들음으로 그 말씀의 능력을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한데도 우리는 단지 한 시간 말씀을 들음으로 한 주간을 살려고 하니 그것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한 끼만 먹고 한 주간을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누구라도 한 끼만 먹고 한 주를 살라고 한다면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건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 영혼을 위해서는 한 시간 말씀만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참으로 신기합니다. 육신을 위해서는 한 끼만 굶어도 벌벌 떨면서 영혼이 굶주리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니 세상을 이길 힘이 어디서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큰 믿음을 원합니다. 내게도 큰 믿음을 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말씀이 없이는 믿음도 없습니다. 큰 믿음은커녕 작은 믿음조차도 각기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 말씀을 의지해서 세상을 살아가게 될 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우리 믿음과 영혼을 위해서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와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홀로 사역을 감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도와 함께 일할 일꾼들을 불러서 세우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중의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부르신 사람은 세관에 앉아 일을 보고 있는 세리였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예수님께서 부르시는데 그에게는 나중에 마태라는 이름을 새롭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레위라는 이름보다는 마태라는 이름에 더욱 익숙합니다. 그 당시 세리라고 하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유다를 다스리고 있는 로마 또는 헤롯왕을 도와 세금을 거두는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라고 하면 매국노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당연히 같이 상종도 하기 싫은 그런 부류의 사람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세리를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십니다. 이와 제자로 부르신다면 누구라도 다 고개를 끄떡이면 그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할 그런 사람을 불러 제자로 삼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도 새롭게 장관에 지명된 사람들에 대한 청문회를 다시 시작하고 있는데 거기서는 그 사람이 과연 그 일을 하기에 합당한 사람인지를 여러 가지로 점검을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 일을 하는데 적합한 사람이라고 국회에서 인준을 해주게 될 때 정식으로 대통령이 그 사람을 장관에 임명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르신 레위는 그런 점에서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랍니다. 모든 사람이 고개를 돌리는 세리를 제자로 부르시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깊으신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보십시오. 왜 예수님께서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까?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닌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호숫가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그 말씀을 들은 것도 아닙니다. 단지 자기의 직무대로 세관에 앉아 업무를 처리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레위를 부르신 이유를 우리는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따르는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레위는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즉시 배와 아버지를 다 그대로 놓아두고 따랐던 것처럼 그 역시 그 자리에서 자기의 모든 일은 다 놓아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즉각적인 순종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르시는 사람 예수님이 쓰시는 사람은 누군가 하면 바로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이유를 대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사는가를 염려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 아니 다른 제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들이 반갑게 맞아줄지 아니면 외면할 것인지도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 가족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를 계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부르시니 그 자리에서 하던 모든 일을 놓아두고 일어나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한데 그는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곧바로 자기 집으로 모셔 들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을 위해서 식사를 준비하여 대접을 합니다. 그러니까 레위는 즉각적으로 순종한 사람일뿐 아니라 동시에 또한 대접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나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부르시니 그 뒤를 따랐을 뿐이라면 레위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들어가 대접까지 하였습니다. 그것도 예수님만 청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과 또한 자기와 같이 일하던 많은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죄인들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그런 사람들까지를 다 함께 청해 식사를 대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아주 큰 잔치입니다. 

지금까지 세리로서 손가락질을 받으면서까지 돈을 모았던 것을 생각한다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한데 레위는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그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과 함께 대접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셨는가를 여기서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세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리들 가운데 제자로 부름 받은 사람은 오직 레위 한 사람 뿐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레위는 즉각적으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순종의 사람이요 또한 대접하기를 즐겨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주님의 뒤를 따라는 우리 역시 예수님의 말씀 앞에 즉각적으로 순종할 뿐 아니라 또한 이렇게 섬기며 대접하기를 즐기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어 주님의 일꾼으로 세움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좋은 일꾼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레위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묻기를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고 합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셨습니다. 아픈 사람이 없다면 당연히 의사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아프니까 의사를 찾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죄인들을 부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죄인이 있고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죄인이 있습니다. 여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리들을 가리켜서 죄인이라고 하면서 어째서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리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찌 보면 바리새인들보다 하나님 앞에는 더 의로울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리러보지도 못하고 기도하기를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는데 반해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거리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손을 들고 기도하기를 “나는 저기 있는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늘에서 하나님이 보시고 누구의 기도를 들으시겠으며 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남을 판단했습니다. 자신들을 먼저 살피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남을 판단하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것이 잘못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주님 앞에 엎드려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구하는 사람입니다. 죄인임을 알기에 나 스스로는 구원한 길이 없음을 잘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지만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의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의라고 하는 것이 다 하나님 앞에서는 걸레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자기 의를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있으니 이처럼 불쌍한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비록 악독한 살인마라고 해도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 그도 구원 받는 백성이 될 수 있지만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든가 나는 너무도 죄가 많아서 나 같은 사람은 구원받을 자격도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의 믿음대로 구원의 자리에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따라 주여 내가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간구하는 사람의 모든 죄는 주님께서 다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주시고 용서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바로 그것 때문에 주님이 오셨고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내가 받을 죄의 형벌을 대신 짊어지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다 구원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주님의 은혜를 마다한다던가 나를 위한 주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로 말미암아 죄의 형벌에 마땅한 대로 멸망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우리 역시도 이런 남을 판단하는 죄를 종종 범한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먼저 네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를 빼라고 하신 말씀과 더불어 너희 가운데 아무 죄도 없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도록 하라고 하셨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 가운데 나는 아무 죄도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과연 하나님을 향해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남을 판단하고 외면하고 있다면 그것 때문에 나도 주님으로부터 판단당하고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오히려 내가 외면하고 싶은 바로 그 사람을 위해서도 주님이 오셨다는 것과 그런 사람까지도 주님이 부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스스로 너무 부족하고 연약해서 탄식하고 슬퍼할 때 그런 나를 향해 주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여 이 주님의 사랑과 베풀어 주시는 은혜 아래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풍랑 가운데서 죽음의 공포로 가득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던 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라고 하시고는 자기는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하지만 새벽 4시가 다 되도록 까지도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에 도착하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은 갈릴리 호수에 풍랑이 몰아쳤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제자도 있었건만 호수를 몰아치는 풍랑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래 진땀을 흘리며 어떻게 해서든지 배를 호숫가에 대기 위해서 애쓰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풍랑 가운데도 찾아오시는 주님 바로 그 분이 오늘 우리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제자로 부름을 받은 우리들과도 함께 계십니다. 나만 홀로 풍랑 가운데 버려진 것처럼 느껴질 그 때에도 주님은 여전히 내 곁에 계십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은혜로 우리의 길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도 죄인을 불러 구원하는 일에 힘쓰실 뿐 아니라 예수 안에서 아름다운 성도로서의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시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