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5)

  • 잡초 잡초
  • 233
  • 0

첨부 1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5)
   

지난 2월 4일이 입춘이었습니다. 겨울 동안 땅을 꽁꽁 얼어 붙게 했던 동장군을 밀어내고 온 만물에 따뜻한 생명력을 불어 넣는 봄의 계절이 시작된 것입니다. 입춘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집 앞에 입춘대길이라는 글을 써서 붙입니다. ‘봄이 시작되었으니 좋은 일이 있으라’는 바램을 담은 글입니다. ‘봄’은 계절적으로 ‘희망’을 상징합니다. 입춘과 함께 다가온 희망의 계절이 경제 위기와 침체 속에 움츠려 들고 있는 우리에게도 희망의 계절로 다가 오기를 소망합니다. 

현대인들은 모두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스트레스라는 말은 캐나다 내분비학자 H. 셀리에 박사가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스트레스는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 몸에 가해지는 외부적인 압력이나 내부적인 압력에 의해 일어나는 긴장 상태를 스트레스라고 말합니다. 

셀리에 박사가 스트레스와 관련된 이론을 책으로 내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셀리에 박사가 스트레스와 관련해 많은 연구를 하고 그 이론을 약 500쪽에 달해 정리했습니다. 그것을 책으로 내기 위해 출판사에 갖다 줬더니 출판사에서 읽어 보고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출판사측은 셀리에 박사에게 ‘당신의 원고를 읽어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간단하게 요약해 주십시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셀리에 박사는 30쪽의 분량으로 요약해 보냈습니다. 그래도 출판사측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출판사측은 조금 더 줄여서 말해 줄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셀리에 박사는 ‘그러면 글로 요약하지 말고 한마디로 말하죠. 스트레스라는 것은 개를 적으로 보느냐 친구로 보느냐에 달린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개는 외부적인 자극입니다. 개를 만날 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 몸에 생화학적인 반응이 나옵니다.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기쁨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외부와 내부에서 일어나는 압력의 결과는 내 마음 가짐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본문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로 말미암아 베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망의 시간이었습니다. 포로 생활이 어느 정도 지났을 때 포로 생활에 지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희망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사야 40장은 포로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선포하는 시작의 장입니다. 하나님은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선포하면서 주시는 첫 번째 말씀이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선포하면서 당장 물질적인 부를 주시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회적인 환경을 한 순간에 평안한 상황으로 만들어 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들을 당장 포로 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포로 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선포하시면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무엇보다도 절망적인 가운데서 희망을 노래하기 위해서는 너희들의 의식과 생각의 변화를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시각을 긍정적이고 은총적인 시각으로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의식과 생각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바뀌는 곳에서부터 희망은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미국의 대부호로 이름을 날린 카네기가 젊은 시절에 사업을 시작했다가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경제 불황이 미국을 덮쳐 수많은 공장들이 문을 닫고 회사들은 망했습니다. 회사는 부도나고 빚은 나날이 늘어갔습니다. 깊은 절망감에 빠진 카네기는 차라리 이대로 인생을 끝내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갚아야 할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상황은 뼈를 마르게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강물에 몸을 던지려고 집 밖으로 나갔습니다. 강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뒤에서 한 남자가 소리쳐 불렀습니다. 돌아 보니 두 다리를 잃은 사람이 바퀴 달린 판자 위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차림으로 보아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고, 보나마니 가족도 잃어버린 아주 불행한 처지에 놓인 사람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는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는 카네기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연필 몇 자루만 사 주시겠습니까?’ 카네기는 남자가 내미는 연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1달러짜리 한 장을 꺼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강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카네기에게로 굴러 오면서 소리쳤습니다. ‘선생님, 연필을 가져 가셔야죠.’ ‘됐습니다. 나는 이제 연필이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카네기는 몹시 차가운 표정에다 고개까지 저으며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두 블록이나 따라오면서 연필을 가져가든지 아니면 돈을 도로 가져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러는 동안 내내 그 남자는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카네기는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삶의 의욕을 가지고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는 그 사람으로부터 연필 몇 자루를 받아든 카네기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자살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훗날 카네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에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살아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두 다리가 없어져 버린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던 것입니다.’

실패의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패에 대한 태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은 고통을 없애면 자동적으로 찾아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행복은 고통을 없앰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찾아지는 것입니다. 잠언의 기자는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바뀌면 미래도 달라집니다. ‘자살’ 라는 말을 거꾸로 하면 ‘살자’입니다. 마음 먹기에 따라 삶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저는 우리들이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희망을 노래하기 위해서는 환경의 변화보다도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희망을 노래하기 위해 두 가지 마음의 변화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는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은 노래하려면 절망에 빠지게 된 원인을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미국의 월 스트리트에서부터 시작된 경제 위기의 파도로 우리 생활이 전반적으로 위협 받고 있고, 전 세계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직장인은 해직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사업체들은 줄어드는 매출과 불어나는 빚에 한숨을 쉬고 있습니다. 가정들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위기로 인해 가족이 동반 자살을 선택하고 생존하기 위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기도 합니다. 경제적인 위기로 인해 우리 사회속에 나타나는 아픈 현상들을 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이번 경제 위기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사분기만 지나면 풀릴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그 시기를 올 하반기로 말합니다. 1년을 말하는 사람, 2년을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꼭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경제 위기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월 스트리트에서 시작된 금융회사들의 붕괴가 그 원인이지만 그것은 외형적인 원인입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들의 욕심입니다. 적은 돈을 투자해서 순식간에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돈을 적게 들이고, 아니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이 없이도 큰 집과 좋은 차를 마련하려는 욕심입니다. 내 노력은 기울이지 않고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의 욕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너도 나도 적은 노력과 투기를 통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욕심이 큰 화를 불러왔습니다. ‘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낳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을 바르게 가르쳐야 하는데 교회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교회도 세상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도와 교회도 하나님의 가치와 정신을 뒤로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많은 돈을 벌고, 누리게 되면 그것을 부러워하고,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그런 사회 현상을 모르는 척 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부추기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가치와 정신이 상실된 가운데 추구하는 ‘대박’을 어떤 사람은 ‘환상의 복음’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세상은 허황된 욕심에서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교회도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금의 절망 속에서 우리의 허물을 제대로 보고 그 절망속에서 희망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절망에서 희망을 노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라는 회개의 단어가 살아나야 합니다. 잘못을 깨닫고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는 그 곳에 희망은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 가장 먼저 한 것은 회개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자신들의 삶을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때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희망을 선포하셨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사람들과 교회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는 정직한 축복을 선포하지 못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번창하고, 부자가 되면 그것을 축복이라고 말했습니다. 부정직한 수단으로 번돈으로 많은 헌금을 하면 교회는 많은 헌금 자체로 만족했습니다. 교회는 가치관을 상실한채 휘청 거리는 사회를 향해 바른 복음을 제시하지 못하고 환상의 복음과 함께 덩달아 춤을 춘 사실을 회개해야 합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부정과 부패로 사회를 얼룩지게 만들었고 경제 지상주의적인 발상으로 국민들의 정신적인 영역을 혼탁하게 만든 지도자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성실함과 근면함에 뿌리를 두지 않고 허황된 욕심과 욕망에 희망을 두었던 우리 국민과 사회는 모두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던 마음이 하나님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희망은 회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의 어려운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대로, 교회는 교회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가정은 가정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회개하는 마음을 품어 이 절망적인 위기속에서 사회를 전반적으로 새롭게 세우며 그속에서 희망은 선포하는 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희망을 노래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마음은 감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온도계와 같은 믿음’과 ‘온도조절기와 같은 믿음’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온도계와 같은 믿음은 주변 상황의 변화에 따라 믿음이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온도계와 같은 믿음은 한 순간도 제 자리에 머물러 있지 못합니다. 계속 변화합니다. 환경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화합니다. 반면에 온도조절기와 같은 믿음은 상황에 따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 아니라 오르락 내리락 하는 환경을 안정시켜 줍니다. 온도조절기는 온도가 내려가면 히터를 돌려서 온도를 높여 줍니다. 기온이 올라가면 에어컨을 틀어서 온도를 낮추어 줍니다. 

진정으로 성숙한 믿음은 온도계와 같이 믿음이 아니라 온도조절기와 같은 믿음입니다. 온도계와 같은 믿음의 사람은 일이 잘되고 생각하는 일들이 잘 풀려지면 기고만장해집니다. 목이 굳어지고 교만해집니다. 자기가 능력이 있고, 자신의 정확한 판단으로 인해 성공했다고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일이 자신이 원하는대로 이뤄지지 않고 실패를 하거나 어려움에 봉착하면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일들이 잘 풀리지 않는 원인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며 다른 사람을 원망합니다. 믿음의 모든 중심이 자기 자신입니다. 

온도조절기와 같은 믿음은 상황에 따라 믿음이 요동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자신의 믿음을 조절합니다. 즐거운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찬양하며 겸손을 배웁니다. 고통이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며 희망을 배웁니다. 온도조절기와 같은 믿음은 감사의 영성이 깊어질 때 이루어 집니다. 감사의 영성은 온도조절기와 같습니다. 감사의 영성이 깊으면 깊을수록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 가운데서도 믿음의 온도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 중심으로 삶의 자리를 바르게 세웁니다. 

계절적으로 봄은 희망을 상징합니다. 희망은 편안한 곳에서 시작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혹독한 추위의 겨울이 없다면 봄은 희망과 생명의 계절이 될 수 없습니다. 희망은 절망과 고난 속에서 피어나는 단어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가치가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들이 겪고 있는 오늘의 삶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의 포로 시대와 같이 우울하고 불안한 시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회개와 감사의 영성을 회복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선포하시며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 주심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며 잘못된 점들을 회개하며, 감사의 영성으로 재무장하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 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