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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약을 갱신하신 하나님 (창 3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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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을 갱신하신 하나님 (창 35:1~7)


신학공부를 막 시작할 즈음에, 저의 빈 가슴에 선명하게 한 획을 그어준 책이 있습니다. 󰡔神의 約束은 破棄될 수 없다󰡕(‘創世記에 대한 現代的 理解’ 부제, 김이곤. 한국신학연구소)는 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책 제목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만일,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 그 약속에 신실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약속이 단절되거나 파기 될 수도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여자는 어떠했습니까?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은 늘 신실하였습니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까? 그렇다면, 그 답은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약속은, 破棄될 수 있다이십니까? 破棄될 수 없다이십니까? 答은, 단연코 󰡔破棄될 수 없다󰡕입니다. 바로 여기에, 신실치 못한 우리를 향하신 福音이 있습니다. 

얼마 전, 중국 상하이 자동차가 우리나라 쌍용자동차와 맺었던 합작경영권을 포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계약을 파기한 것이지요. 상호 간의 불신과 상처가 매우 깊은가 봅니다(쌍용자동차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반적으로 계약파기는, 계약불이행이라는 문제가 제기될 때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슨 계약을 하든지, 단 번에 완전계약을 하는 법이 없습니다. 계약초기단계가 있고, 중간단계도 있고, 그리고 최종단계가 있습니다. 자그마한 공사를 하나 해도 공사계약금이 있고, 중도지급금이 있고, 나머지 지급금이 있습니다. 심지어 공사가 다 마무리 되어도, 총 공사비의 100%를 다 주는 법이 없습니다. 하자보수를 담보하기 위해서, 하자보수 기간까지는 공사비의 일부를 남겨두기까지 합니다. 계약불이행 사태를 최대한으로 막아보자는 안전장치를 두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言約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그 답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突然한 개입]

본문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라는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가정사에, 돌연突然 개입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야곱 가정상황이 어땠길래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입니까? 당시 야곱 가정은, 四面楚歌에 빠져 있었습니다. 야곱이 당한 위기는, 20년 전(정확히 말하면 30여 년 전), 야곱이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서 형의 면전으로부터 마치 화살과 같이 급히 도망했었는데, 하나님의 지시로 밧단아람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부터, 아버지 ‘이삭의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만난 위기상황입니다.

귀환 길에, 이미 야곱은 一觸卽發의 일차적인 인생부도위기를 넘겼습니다. 혈혈단신 홑몸으로 지팡이 하나만 짚고 요단강을 건넜던 야곱입니다. 그런 그가 20년 만에, 아내 넷과 열두 아들(라헬이 맨 나중에 귀환 길 중에 낳은 아들, 베냐민까지)과 딸 디나를 데리고 귀환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베푸신 엄청난 축복(암염소, 숫염소, 암양, 숫양, 젖 나는 낙타와 새끼, 암소, 황소, 암나귀, 새끼 나귀 등)으로 거부가 되어 귀환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한 모양새만 본다면야 금의환향이라도 하는 격입니다. 그러나 ‘얍복 나루’를 건널 즘에 와서, 모든 상황이 급박한 위기에 직면하고 맙니다. 그 밤에 야곱은, 혼비백산하여 두려움에 떱니다. 

형 에서가, 잘 훈련된 군사 400 명을 거느리고 야곱에게로 마주오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0년 동안 이룬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될 위기에 직면한 것이지요. 그렇다고 또 다시 20년 전처럼 도망칠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처자식과 그 많은 재산 어떻게 포기합니까? 그래서 야곱이 마음을 바꿉니다. 형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합니다. 가축 떼 중에서, 좋은 것으로 ‘오백 쉰 마리’의 선물을 준비했습니다(선물, (히) 민하מנחה 속죄제물을 뜻하는 말). 선물이 때론, 힘도 있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에서는 야고보다 더 큰 부자였는데 말입니다.

얍복 나루에서 만난 위기와 두려움은, 하나님의 突然한 介入으로, 인생역전의 기회로 바뀌었습니다. 발뒤꿈치를 잡다(비겁하다), 밀어내다, 책략을 써서 대신 들어앉다, 선수를 치다, 앞지르다, 속여서 빼앗다는 이름인, ‘야곱’을 버리고 ‘하나님과 씨름한 자’라는 뜻의 새 이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까지 얻습니다. 형님 ‘에서’와도 극적인 화해까지 하게 됩니다. 20년 묵었던 체증이 한 순간이 다 풀렸습니다. 천만다행이지요.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야곱은, 세겜 땅에서 또 다른 위기를 맞습니다.

그 위기의 요인이, 30년 전에 루스 광야(벧엘)에서 맺었던 하나님과의 약속에 대한 야곱의 신실치 못함 때문이었습니다. 형 에서와의 문제가 단번에 풀리자 방심한 것이지요. 야곱은 귀환 도중에, 그만 세겜 땅(수꼿)에서 주저앉아버리고 맙니다. 꽤 오랜 세월 거기 머뭅니다. 그곳에서 아들들이 다 장성할 만큼 지냈습니다(얍복 나루에서 형 에서를 만났을 때, 자식들이 幼弱. 당시 맏이 루우벤이 13살 정도 되었고, 막내 아들 요셉은 6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딸 ‘디나’는 요셉과 나이가 엇비슷). 

그러던 디나가 15, 6세가량 되었으니, 수꼿에서 10여 년은 더 머문 셈이 됩니다. 땅이 넓고, 목축하기에 좋았기 때문입니다. 수꼿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다보니, 30여 년 전 도망자 신세 때, 루스 광야(벧엘)에 찾아오신 하나님과 맺었던 言約을 그만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겁니다. 형편이 풀리자, 하나님의 존재가 크게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도 가물가물해지고, 그 언약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이 없는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세겜 땅의 군주인 하몰의 아들 ‘세겜’이 장성한 야곱의 딸 ‘디나’를 겁탈하고 맙니다. 그 일이 조용하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세겜의 젊은 남자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 후에, 할례를 행한 그 다음 다음 날, 디나의 친 오빠인 시므온과 레위(성품이 불같고, 소의 발목을 끊는 분기가 맹렬한 아들들)가 각기 칼을 가지고 아파서 신음하고 있는, 남자들을 기습공격해서 다 죽여 버리고 맙니다(군주 하몰과 그 아들 세겜도 죽임). 물건과 짐승까지 약탈합니다. 대 사건이 벌어지고 맙니다.

그 일로, 야곱은 아들 시므온과 레위에게 크게 노하면서도 책망합니다, 그러면서 두려움에 떱니다.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위기를 지켜보고 계시던 하나님의 관점은, 야곱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 위기의 요인이 아들들의 소행 때문이 아니라, 야곱 자신에게 있다고 보셨습니다. 하나님과 맺었던 약속에 대한, 야곱의 신실치 못함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돌연한 하나님의 개입으로 또 인생반전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파기 될 수밖에 없는 위기상황에, 돌연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입니다. 얍복 나루의 위기 이후, 10여 년간 침묵하시던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다시 찾아오신 겁니다.


[위기에 처한 야곱 가정사에 개입하신 하나님 말씀, 벧엘로 올라가라]

여기 돌연한 하나님의 개입은 무엇을 말합니까? 야곱이 30년 전, 루스 광야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신실치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먼저 그 약속을 파기하시지는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혹 신실치 못해도, 우리가 一方的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먼저 약속을 파기되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食言치 않으십니다.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하셨습니다(민 23, 19).

야곱에게 돌연 개입하신 하나님의 일성(一聲)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야곱이 머물고 있는 땅이 어딥니까? 세겜 땅, 수꼿(히, סכות)이라는 지역입니다. 들이 넓고, 장막치기가 좋고, 목축하기가 여간 좋은 땅이 아닙니다. 그러니 거기서 장막치고 목축하면서 산 것, 어찌 보면 당연한 것 아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 ‘수꼿’을 떠나라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야곱 입장에서 보자면, 수꼿 땅에 사는 것이 여간 좋은 게 아닙니다. 문제는, 그 땅은 하나님과 맺었던 言約을 맺었던 땅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위기만 사라지면 ‘수꼿’에서 편안한 삶을 추구합니다.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말입니다. 너무 쉽게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 일어나는 위기의 要因이 됩니다. 

며칠 전, 신학대학의 일로, 학교에서 선후배 목사님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대화중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보다 10여 년 이상 선배 되신 목님들이 30여 년 전에 신학교에 첫발을 디뎌놓으셨을 때 이야깁니다. 그 때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랐습니다. 상상이 가질 않았습니다. 그 목사님들 중 한 분은, 체중이 눈대중으로 봐도 최소한 80kg은 더 되 보였습니다(풍체가 좋으신 거지요). 놀라지 마십시오. 바로 그 분이, 30여 년 전 신학교에 다닐 때 체중이 49kg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키가 175cm는 족히 넘습니다, 그 키에, 여성도 아닌데···). 그 분만 그런 것 아니고, 대다수 목사님들이 다 40대, 50대였다고 합니다. 

사람 꼴이나 되었겠습니까? 남이 볼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자신이 볼 때도 인간 될 거라고 생각이나 하셨겠습니까? 별 볼일 없는 미약한 존재, 그 자체 아니었겠습니까? 그분들이 지금 한국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작년에, 박종순 목사님 고향교회를 다녀온 적이 있는데, 박 목사님 역시 너무 가난해서 밥도 못 먹으면서, 자라나셨다고 합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지내던 시절에, 하나님의 부름이 있었고,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셨다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의 30여 년 전, 벧엘은 어떠하셨습니까? 

여러분의 20, 30년 전 벧엘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셨습니까? 아마 엇비슷하시지 않습니까? 얼마 전, 국민일보 김지방 기자와 염재호 장로님 인터뷰 기사가 났는데, 그 기사를 읽고 저는 놀랐습니다. 염 장로님도, 학창시절, 꽤 어렵게 공부를 하셨답니다. 염 장로님의 벧엘도, 만만치만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 중 누가, 나의 벧엘은 그렇지 않았다고 하실 분 계십니까? 사람 外貌로 취할 것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은총 아닙니까?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씀은, 지리적인 그 장소로 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 보십시오. “네가(야곱)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얼마나 초라하던 도망자 신세···)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나님께서 올라가라고 명하신 벧엘은, 지리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그 땅에서 만났던 ‘그 하나님’을 다시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거기서 다시 우리를 만나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장사되셨던 무덤이, 빈 무덤이 된 것을 목격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 다른 마리아가 천사들에게 들었던 중요한 말씀 하나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갈릴리가 어딥니까? 예수님 공생애 자리요, 부름 받은 자리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던 자립니다. 그 자리로 다시 가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아멘. 


[언약을 갱신하시는 하나님]

야곱이, 10여 년 만이 귀환을 다시 재개합니다. 벧엘로 올라갑니다. 올라가기 전에, 먼저 수꼿에서의 삶을 깨끗하게 다 청산합니다. 수꼿에서 10여 년 머무는 동안, 밧단아람을 떠난 지 오래 되었지만, 그 때까지도 청산하지 못했던 이방 신상들을 다 버립니다. 장신구들(귀걸이, 금패물, 발 목고리, 손 목고리, 인장반지, 팔치 등에 주문과 이방신상에 새겨진 것들)을 다 제거합니다. 또 가족들이 각자 자기 몸을 정결케 했습니다. 의복들을 바꾸어 입으라 했습니다. 

의복을 바꾸어 입는다는 것, 참 중요합니다. ‘옷 벗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던 일을 그만 둔다는 뜻이지요.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옷부터 벗습니다(옷을 갈아입어야, 쉼이 있습니다). 옷 바꿔 입는 다는 말은, 나의 정체성과 신분이 바뀐다는 뜻입니다(캄보디아 섬김, 옷). 야곱은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장신구들,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아브라함이 처음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 하나님을 뵈었던 곳) 아래에 묻었습니다(매장? 청산, 순수한 하나님 신앙 복귀선언).

그리고는 하나님 명령대로 벧엘로 올라갑니다. 가서 제단을 쌓습니다. 그곳이름을 ‘엘 벧엘’(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주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고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실하지 못했던 야곱에게, 개입하셔서 다시 言約을 갱신하여 주신 하나님이심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신실하지 못하지 못함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이 파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때,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개입하셔서 다시 ‘우리와 언약을 갱신하여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의뢰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와 언약을 갱신하여 주신 하나님께 야곱은 30여 년 전보다 더 신실하게, 다시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헌신의 제사)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부어드렸습니다. 내가 지금 머무시는 자리는 세겜 땅 수꼿입니까? 벧엘입니까? 숙곳에 머물던 신실하지 못했던 야곱을 벧엘로 부르시고, 거기서 그와 다시 언약을 갱신하여 주신 그 하나님께 제사 드린 야곱처럼, 우리와 다시 언약을 갱신하여 주시는 그 하나님께 신실하게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십시다. 아멘.

[기도]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그 언약에 대하여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가 신실치 못해, 위기에 직면할 때에도 찾아오셔서, 다시 언약을 갱신하여 주시는 그 하나님 의뢰합니다. 그 하나님께, 벧엘에 올라가 섬기게 하시고, 언약을 이루는 삶 살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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