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너희가 모일 때에 (고전 14:26~40)

  • 잡초 잡초
  • 297
  • 0

첨부 1


너희가 모일 때에 (고전 14:26~40)

  
오늘날 기독교계에 소위 '예배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라는 말이 무슨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뜻인 즉은 교회 예배의 순서와 내용은 물론이고 예배의 목적 자체부터가 현대인의 취향에 맞게 바뀌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환으로 나타난 것이 소위 '열린 예배'입니다.
  여기서 '열렸다'는 의미는 '불신자들이나 구도자(求道者)들을 위하여 활짝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나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불신자나 혹은 어떤 종교가 좋을지 결정을 못하고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구도자들도 아무 부담 없이 참석해 볼 수 있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바로 이 '구도자들을 위한 예배'(seekers' service)라는 것을 시도해서 급속도로 부흥한 교회들이 나타나자 다른 미국 교회들 뿐 아니라 한국 교회들 중에서도 너도나도 그런 교회들의 예배를 배우고 모방하려고 야단들입니다. 
  물론 예배드리는 순서나 방법이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세부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경향은 '기본적으로 변할 수 없는 예배의 패러다임'도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소치입니다.
  불명예스러운 문제들이 많기로 소문난 고린도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바로 그 고린도교회의 공예배에서 빈번히 발생하고 있던 문제점을 지적해 주면서 '질서가 잡히고 덕을 세울 수 있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26절에 "26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너희가 모일 때에"라는 말이 바로 고린도교회의 공예배를 가리킵니다.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개인적인 특별 계시, 방언, 통역' 등은 당시 고린도교회를 비롯한 초대교회의 공예배에 들어갔던 예배순서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순서로 드려지든지 간에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는 말씀대로, 예배는 그 자리에 모인 예배자들 모두에게 영적으로 은혜가 되고 유익이 되도록 드려져야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덕이 세워지는 예배'가 되기 위하여 반드시 지켜져야 할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예배의 원칙들은 무엇이겠습니까?

  1. 공예배의 순서가 질서 있는 성령의 감동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27절부터 33절까지에 기록하기를 "27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30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 고린도교회 예배의 문제점을 본격적으로 지적하기 시작하면서 아까 26절에 나왔던 순서들 가운데 "찬송시"와 "가르치는 말씀"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이 순서들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도 없었고 따라서 문제제기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신 '방언(통역)과 예언(계시)'에 대해서만 27절 이하에서 자세히 언급한 것은 그만큼 이것들이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바로 이 순서들 때문에 고린도교회의 공예배는 아주 시끄럽고 무질서한 예배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27절에서 "다불과"라는 말은 '많아야'라는 뜻입니다.
  즉 방언을 하게 될 경우에도 한 예배시간에 최대 3명까지로 제한하라는 의미입니다. 
  방언한다는 교인들이 너도나도 다 일어나서 말하게 되면 한 사람이 몇 마디씩만 한다 하더라도 전체 예배시간은 끝도 없이 흘러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그 방언도 만약 "통역이 없으면" 아예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엄중한 금령을 내렸습니다.
  14장 전반부에 자세히 나타나 있듯이 다른 평신도들에게 뜻이 통하지 않는 말로 자기 혼자 지껄이는 것이 결코 공예배의 순서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언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둘이나 셋" 정도만 말하라고 제한이 가해졌습니다.
  여기서의 예언은 바로 이어지는 30절의 문맥에서 알 수 있듯이 개인적으로 어떤 특별한 "계시"를 받아서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예언하는 사람이 일어나면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라고 했는데, 이것은 아무나 스스로 계시를 받고 예언한다고 해서 그냥 곧이곧대로 다 '신령한 말씀'이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또 누가 계시를 받아 예언하다가도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새로운 계시가 임하면, "먼저 하던 자"는 적당한 시간 내에 끝내고 곧 양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차례대로 순서와 질서를 지켜서 해야 예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그 말들을 똑똑하게 잘 알아들으면서 "배우고 권면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라는 말씀은 '예언하는 자는 자기의 예언하는 영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언한다는 것이 무슨 무당이 신들린 경우처럼 제 정신은 빠져 나가고 남의 혼이 들어와서 지껄이는 따위가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짜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아 예언하는 자라면 자신의 심령을 정확하게 스스로 통제하면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예배순서에서 이처럼 방언이나 예언이 허용된 것은 현재와는 명백히 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인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때는 아직 신약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고, 각 지교회에 사도나 혹은 담임 교역자가 없는 것이 대부분의 형편이었습니다.
  즉 정기적으로 예배의 설교를 맡을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이었던지라 초대교회의 예배순서에는 자연히 일반 교우들이 참여하는 비중이 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통역되는 방언'이나 '특별계시를 받은 신자의 예언'도 순서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허용되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전체 예배시간을 지킬 수 있어야 했으며, 예배순서 참여자들은 차례를 지켜서 해야 했고, 특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를 정확하게 영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질서 있는 예배가 되어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될 뿐 아니라 예배 참석자들에게 정말 영적으로 덕이 되는 은혜로운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말의 난무'로 길어지는 예배는 참 무질서한 예배입니다.
  우선 목사의 설교부터 이 점에 대하여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설교는 아무리 귀담아 들어 보려 해도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즉 전혀 '주제가 잡히지 않은' 설교도 있습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만, 저는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문장이 안 되는' 말을 설교라고 하는 것을 직접 들어본 적도 있습니다.
  설교가 그렇게 되니 회중들에게 은혜를 끼치기는커녕 그저 따분하고 지겨울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예배 사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장로나 집사가 무슨 헌신예배 등을 인도하게 되는 경우에, 사회 도중에 코멘트를 많이 해야 잘하는 사회가 되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아마 그 자리가 무슨 토크쇼쯤이나 되는 줄 아는 모양입니다.
  정말 하지 않아도 될 말들, 아니 하지 말아야 할 말들까지, 제 딴에는 분위기 잡는 말이라고 혹은 유머러스한 조크라고 예배순서와 순서 사이에 자질구레한 코멘트를 남발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실상 회중들에게는 은혜롭기는커녕 속에서 쓴웃음만 나오게 하는 창피하기 이를 데 없는 사회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감정이 주가 된 즉흥적인 예배 역시 실상은 무질서한 예배입니다.
  언젠가 어떤 '찬양 경배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였습니다.
  그 세미나의 강사 목사님께서 강단에 오르시더니 강연하시기 전에 찬송 몇 곡을 부르자고 하시면서 피아노 앞에 앉으셨습니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반주를 시작하기 전에 그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제가 찬송 부르는 동안 여러분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같이 찬송하고 싶으면 찬송하시고 혼자서 기도하고 싶으시면 기도하시고 손들고 싶으시면 손드시고 잠자고 싶으시면 주무시고..." 운운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좋은 말로 하자면 '자기 심령에 감동되는 대로',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 시간이 정식 예배시간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찬송 부르는 시간에 다 같이 함께 찬송 부르지 않고 제각기 느껴지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아무 것이나 하라는 말씀이 제게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배가 '영적으로 자유롭게'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 그 목사님의 세미나의 논지였지만, 실상 그처럼 '개인의 자유로운 영적 교통'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면 바로 '아예 순서 자체가 없는' 퀘이커교도 식의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그런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것을 질서 있게 하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즉흥적인 충동'이 '성령의 감동'과 직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지각에 기초한 예배'가 '감정에 기초한 예배'보다 더 부자유스럽고 딱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요 편견입니다.
  일정한 장소에 모여 일정한 시간 중에 예배드리는 자체가 이미 '자유가 제한된' 즉 '통제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찬송순서에서는 다 같이 찬송하고 기도시간에는 다 같이 아멘으로 화답해야 하는 것이 공예배의 기본자세입니다.
  목사는 설교시간에 잘 준비된 말씀으로 영적으로 논리정연하게 가르쳐서 모든 회중으로 하여금 바로 배우고 깨닫도록 만들어야 하고, 사회자는 전체 시간을 잘 지키면서 간단명료한 사회를 함으로써 시종일관 은혜로운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경건시간이야 자기 느껴지는 대로 어떻게 진행해도 별 상관없겠지만, 공예배만은 어디까지나 순서를 지키고 질서가 잡힌 예배, 그래서 실로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공예배의 훈도권이 성경만을 선포하는 목사를 통하여 지켜져야 합니다. 

  공예배의 가장 중요한 순서가 말씀선포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선포의 권한, 달리 말하자면 '훈도권'에 있어서도 성경은 명백한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첫째 원칙으로, 34절과 35절은 "34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여자가 공예배의 훈도권을 가질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라는 말씀은, 지금 여기서 하는 말씀이 고린도교회에만 특별 케이스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에 일반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원칙임을 보여 줍니다.
  그 원칙이란 바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오직 복종할 것이요"라는 단호한 명령입니다.
  이것은 물론 여자가 교회에 나오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되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본문에 문맥에서 드러나고 또 성경의 다른 관계 구절에서도 확인되고 있듯이, 어디까지나 여자는 교회에서 공적인 훈도 즉 설교를 할 수 없음을 가리킵니다.

  그 대신에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남편은 아내의 머리'요 또한 '가정의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내가 그렇게 물어 와도 남편이 아무 대답해 줄 영력이 없다면 문제입니다.
  아내에게 영적으로 가장 노릇 못하는 남편이야말로 진짜 '남자 구실 못하는' 못난 남편인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처럼 못난 남편들이 좀 있다 하더라도 여자가 교회에서 남자를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현실적인 쟁점 중에 하나가 '여자 목사의 안수를 허용할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명하는 바는 너무나도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토론 안건으로 삼는다는 자체부터가 제게는 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한 구절만 들어도 디모데전서 2장 12절부터 14절의 말씀에 "12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13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14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자가 교회에서 남자를 가르칠 수 없는 이유에 대하여 이처럼 존재론적인 사실 즉 '남자가 먼저 지음 받은 것'과 또한 인죄론적인 사실 즉 '여자가 먼저 죄에 빠진 것'에 동시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이 교회 내에서 여자의 훈도권이 불가함을 여러 차례 강조한 것은 단순히 어느 한 지역교회 내의 특별한 상황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본성'이라는 아주 무게 있는 근본적인 이유들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존재하고 있는 여자 목사의 대다수가 자유주의 기독교 계통인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자유주의 기독교계에서는 여자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동성애자들까지 목사 안수를 해 줄 정도가 아닙니까?
  왜냐하면 이들은 성경 말씀을 절대주권자 하나님의 절대무오한 말씀으로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자가 스스로 목사의 사명을 받았다고 '영적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진실한 신자라면 '자기의 불분명한 느낌'보다는 '성경의 명백한 명령' 쪽을 따라갈 줄 알아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여자가 목사가 되고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결코 여성의 지위를 회복하거나 향상시킨 것이 아니라, 본문의 말씀대로 실로 여자에게 "부끄러운 것"일 뿐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훈도권'에 관한 둘째 원칙에 대하여 36절부터 40절에 "36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38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39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공예배의 훈도권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철저히 믿음'에서 그 능력이 발휘됨을 증거해 줍니다.

  본문 36절을 다시 번역하자면 '하나님 말씀이 너희들에게서 나오고 너희들에게서 완성되었느냐?'라고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핀잔조로 던지는 말입니다.
  즉 고린도교회의 방언이나 예언하는 남녀 교인들이 마치 자기네들이 하나님 말씀이 계시되는 대표적인 통로나 되는 것처럼 착각 내지는 교만에 빠져 있다는 책망인 것입니다.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이라는 말에서 암시되고 있듯이, 고린도교회 안에는, 좀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정말 영적으로 '자기 주제 파악을 못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스스로 신령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단호하기 이를 데 없는 어조로 명백히 선포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주"라는 단어가 아주 강조되어 있습니다.
  제 딴에는 신령한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자들의 방언이나 예언이 아니라, 바로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보낸 '편지'의 구구절절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강력하게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이 '주의 명령'이라면, 이것보다 더 권위 있는, 이것보다 더 우위에 있는 다른 어떤 계시란 것이 있을 수 없음은 명백합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의 소위 신령하다는 교인들의 방언이나 예언은 금세 사라져 버렸지만, 사도 바울의 "편지한 것" 즉 이 고린도전서를 비롯한 모든 바울 서신들은 신약 성경으로 영원히 남게 된 것입니다. 

  선지자와 사도가 받은 계시의 권위는 다른 개인적인 계시들보다 분명히 비교도 될 수 없는 우위에 있습니다.
  더욱이 그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증거인 신구약 성경이 완성된 이 시점에 와서는 더 이상 방언이나 특별계시로 받을 만한 무슨 중대한 계시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과 '믿는 자에게 천당 소망', 성경이 명백히 증거하는 이 복음보다 더 이상 무슨 좋은 계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책에 아직 기록하지 않고 빠뜨려 놓은 중요한 계시가 있어서 이제 와서 늦게야 어떤 개인에게 무슨 방언이나 통역이나 특별 계시로 또 알려 주셔야 하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요한계시록에서 저주하고 있는 대로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들 외에 더하는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개인적인 특별계시를 통해 받는 말씀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모든 신자들에게 공적으로 선포되어야 할 중요한 진리'는 결코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39절에 있듯이 사도 바울도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개인에게 필요한 까닭에 주시는 은사이며, 그런 까닭에 그런 개인적인 계시는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28절)일 뿐인 것입니다. 

  38절의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는 말은 조금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하나는 '모르는 사람은 모르게 가만 내버려 두어라.'는 것이고, 혹은 '(37절에서 바울이 하는 말을) 무시하면 그 자신도 무시당하게 될 것이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데, 대체로 오늘날의 주석가들과 새로운 번역들은 후자를 취하고 있습니다.
  실로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한 성경 말씀이 곧 "주의 명령"인 줄을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은 곧 '주께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어디까지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철저히 믿고 그 성경의 권위에만 의존해서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는 교단에서 안수는 받고 자기 교회 교인들에게는 목사로 인정받을지 몰라도 정작 하나님께로부터는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는 가짜 목사일 뿐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이라고 밝힌 대로, 분명히 은사들에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 말씀을 가르치는 권한, 즉 훈도권이 가장 컸던 직분은 물론 '사도'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그처럼 예수님 사건을 친히 목격하고 증거했던 사도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시대입니다.
  그 다음은 '선지자'인데, 이것은 무슨 '미래 일에 대한 예언자'란 뜻이 아니라 신구약 성경에서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목사야말로 바로 오늘날의 '선지자'에 해당되는 직분이며, 그 목사에게 이 훈도권이 집중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능력 있는 장로'라든지 '신령한 권사'라는 말들을 흔히 하지만 그 어떤 개인적인 영력도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여 선포하는 목사의 영력을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교인들의 의견을 모아서 이 인간 사회에 무슨 선한 일을 함께 하자는 식의 어떤 '민주적 정치'를 하는 곳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주의 명령'이 강단을 통해 선포되고 모든 성도들이 오직 그 말씀대로만 일사불란하게 순종하는 '성경중심의 신앙생활'이 나타나야만 하는 곳입니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는 교회는 필연적으로 '중구난방의 시끄러운 장터'와 '사공이 많아 산으로 올라가는 배'와 같은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훈도권이라는 것은 목사가 자신의 위신이나 입지를 지키려고 하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목사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사명을 똑바로 인식하고 있고 진정으로 교회를 바로 세우고자 한다면 정말 생명처럼 지켜야 할 것이 바로 훈도권인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공적 훈도권을 허락하고 있는 목사를 통하여 오직 성경의 권위에만 기초한 바른 말씀이 선포되는 예배를 귀중히 여기고 사모함으로써, 그런 신령한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덕을 세우는' 예배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고린도교회는 예배에서부터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미리 정해진 순서가 없이 즉흥적으로 진행되었고, 여자가 공예배 중에 '마이크를 잡고' 방언이나 예언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또 너도나도 자기 자신을 '선지자나 신령한 자'로 여길 뿐 아니라 마치 스스로 사도들과 영적으로 동격에 있는 것인 양 착각한 교인들도 많았습니다.
  그처럼 예배시간에서부터 무질서와 무지가 판을 치고 있었으니 고린도교회는 초대교회들 중에서도 가장 문제 많은 교회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배는 자기 감정을 있는 그대로 분출시킴으로써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무슨 '카타르시스'의 시간이 아닙니다.
  모든 예배자들의 심령이 똑같이 '성령의 제재'를 받는 가운데 영적 질서가 단정하게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또한 예배시간을 무슨 은사를 받았다는 교인들이 저마다 자기 개인적인 은혜를 발표하는 '간증 집회'로 여겨서도 아니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공예배의 가장 중요한 순서는 오로지 '성경을 풀어 깨닫게 해 주는 설교'이며 이 훈도권이 바로 지켜져야만 진정 예배가 은혜롭게 드려질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예배의 주체 되신 주님께서는 '너희가 모일 때에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명백히 명령하셨습니다.
  신자가 모일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그 하나님께 공적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이는 시간과 장소에는, 아무리 시대와 장소가 바뀌어도 결코 변할 수 없는 규례와 원칙이 있는 것입니다.
  '질서 있는 예배순서'와 '권위 있는 말씀선포'를 통하여, 모일 때마다 항상 은혜 충만한 예배생활을 함께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