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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구인 광고 (대하 16: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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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인 광고 (대하 16:7~10)


1. 구직대란(求職大亂)

성도 여러분, 요즘의 어려운 형편을 보여주는 말 중의 하나가 “구직대란의 시대”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이 말은 직장을 구하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은데, 일자리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말입니다. 이 심각성을 알려주는 말이 바로 현재 우리나라 실업자의 수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실업자 수는 지난 해 12월, 기획재정부와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75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더라고요. 75만 명의 실업자 외, 아예 구직을 단념한 사람이 12만 5000명, 현재 기업체 입사나 공무원 시험 등을 준비하는 취업 준비자가 55만 2000명, 그리고 돈을 벌어야 하는 형편이지만 몸이 아프거나 나이가 많아 취업이 어려운 사람 등이 132만 7000 명해서, 모두 더할 경우 사실상의 실업자는 무려 275만 4000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더욱 더 큰 문제는 “청년 백수”입니다. 왕성하게 일을 해야 하는데도 직장이 없는 젊은이들이 “101만 3천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학을 졸업해야하는 사람들이 졸업을 하지 않습니다. “경제위기로 신입사원을 뽑지 않겠다”는 기업이 많아 졸업을 미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졸업을 미룬 학생들만이 아니라, 취업난과 등록금 부담을 이유로 휴학하는 대학생이 늘어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94만 3437명의 대학생 중 휴학생이 43만 3699명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숫자는 전체 대학생의 22.8%로, 다섯 명 중 한 명 이상이 휴학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실업자의 수와 청년백수 문제는 각종 취업박람회에서 그 현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취업박람회가 열리는 곳마다 직장을 구하는 사람들로 미어터지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구직대란의 시대를 저와 여러분들이, 무엇보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러한 우리의 형편과는 달리, 구직의 반대라고 할 수 있는 구인광고(求人廣告)와도 같은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신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2. 하나님의 구인(求人) 광고

1) 아사 왕의 개혁과 하나님이 주신 복(역대하14:1~8)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된 후, 아사(B.C. 910~869)가 그 부친 아비야를 뒤이어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역대하 14장 2절에 따르면, 아사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했습니다. 역대 유다 왕들의 통치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이 정도의 호평을 받은 왕은 히스기야 왕이 있을 뿐인데(31:20), 아사는 그만큼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고 뛰어난 왕이었습니다. 그 구체적인 예가 14장 3절 이하에 나옵니다. 

그는 먼저 “이방 제단”을 없앴습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의 제단'을 가리킵니다. 창세기 31:19,30~35, 35:2,4, 여호수아 24:20,23, 사사기 10:16, 사무엘상 7:3, 그리고 예레미야 5:19 등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드라빔(Teraphim)과 같은 가정 신을 가정에 두고 있었고, 개인적으로 이러한 이방인의 풍습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가정이나, 마을이나, 산이나 골짜기 등 수많은 곳에 산재해 있던 이방 제단을 없앴습니다. 

그리고 아사는 예루살렘과 그 주변에 위치한 “산당”을 없앴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 하였으나 백성들 사이에 뿌리 깊이 박힌 산당 예배가 근절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주상(마체보트)을 훼파”했습니다. 주상은 예배 처에 세워 두는 '성스러운 돌들'을 가리킵니다(출34:13; 삿3:7; 왕하3:2). 

이것은 본래 성전에 없던 것으로, 고대 시대에 어떤 장소를 성스럽게 구별하거나,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를 말합니다(창 28:18, 22). 율법은 이런 주상들을 세우는 것을 금할 뿐만 아니라(신 16:22), 파괴를 명하고 있습니다(신 7:5;12:3). 그 이유는 그것이 우상시되고 또 바알 종교와 연관되어 큰 타락의 요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아세라 상을” 찍었습니다. 아세라 상은 대개 나무로 만들었는데요. 아세라 신은 고대 근동의 여러 족속 중 특히 아모리족과 가나안족이 숭배했던 것으로, 이 아세라 숭배에는 항상 음란한 제의(祭儀)가 수반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타락케 했습니다. 또 5절에 따르면, “산당과 태양상”을 없앴습니다. 역대하 34장 3,4절과 레위기 26장 30절에 태양상이 바알 숭배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바알 신이 태양을 지배한다는 사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편 태양상은 항상 복수로만 언급되는데(사17:8;27:9) 그것은 여러 개의 석상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아사 왕은 가장 우선적으로 유다 내에 우상을 철저히 제거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14장 4절에 따르면, 아사는 유다 백성들에게 명령하기를 ‘하나님을 찾고 그 명령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즉 우상을 제거하는 작업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님을 찾고 율법에 순종할 것을 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아사 왕의 신앙개혁을 기뻐하셔서 유다에 평안을 주셨습니다. 나라 내부적인 안정만이 아니라 어떤 나라도 유다를 향하여 도발할 수 없도록 외교적인 안정까지 주셨습니다.

2) 구스 백만 대군의 도발(14:9~15)

그러던 중 “구스(Cush)”의 백만 대군이 유다를 공격해 왔습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과 아시아와 유럽으로 진출하려는 목적으로 유다를 공격한 것으로 보입니다.

역대하 14장에 나오는 구스는 애굽과 ‘에티오피아’로 알려진 애굽의 남쪽에 있는 아프리카 지역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구스 사람 세라(Zerah)”, 즉 애굽 22왕조의 제 2대 왕인 오소르콘 I세(Osorkon I)는 애굽 남쪽의 누비아(Nubia), 세나르(Sennaar), 코르도판(Kordofan), 그리고 아비시니아(Abyssinia) 지역을 점령하여 통일 제국을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강성해진 “세라”가 군사 백만을 거느리고 유다를 공격해 와서는 “마레사”, 즉 헤브론과 아스돗 사이(11:8) 유다 평지에 있는 “스바다 골짜기”에 진을 치고서 유다를 위협했습니다. 당시 유다가 최대한 동원할 수 있는 군사는 약 58만 명이었습니다만, 병거와 기마부대로 이뤄진 구스의 백만 대군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사는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14:11).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이 본문을 Living Bible은 “우리를 도울 자가 아무도 없나이다. 

지금 우리는 이 강한 군대에 비해 무기력하나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판단한 아사 왕이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비록 인간적으로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이라도 당신을 의지하기만 하면 능히 도우시고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권능을 믿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는 '영원히 살 수 없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이기지 못하게 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구스의 군대가 비록 백만에 이르는 대군일지라도,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 수의 많고 적음(삼상 14:6)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아사 왕은 그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 것입니다. 

이러한 아사 왕의 믿음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구스 사람을 … 치시니 …도망”했습니다. 아사 왕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여호와께서는 유다가 보는 앞에서 세라의 군대를 치셨고, 그들은 도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구스의 백만 대군 가운데 “살아남은 자가 없었습니다(14:13).” 이 전쟁으로 구스는 다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패배했습니다. 그래서 이후로 유다는 애굽의 22왕조와 23왕조에게서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았는데요, 그 이유는 이 사건으로 인해서 애굽의 22왕조가 무너지고 23왕조가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15장 1절 이하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하는 아사와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선지자 “오뎃의 아들 아사랴”가 외친 말씀입니다.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15:2).”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의 말씀으로 모세 때에도(신4:29), 다윗과 솔로몬의 때에도(24:20; 대상28:9), 그리고 신약 시대에도(약4:8) 동일하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사 왕에게 이같은 언약의 말씀을 상기시키신 것은 그로 하여금 언약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축복을 계속해서 누리게 하시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면서 7절에서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 그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상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전쟁의 승리를 통하여 아사 왕과 유다 백성들이 받은 상보다 더 큰 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들로 더욱 더 주님 앞에 온전하기를 바라는 말씀이었지요.

성도 여러분, 제가 지난 주 설교 가운데 “하나님은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찾으시고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살아계심과 그 능력을 보이신다”고 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아사 왕을 통하여 다시 한 번 그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당신만을 믿고 의지하는 아사에게 응답하셨고, 주님의 백성을 치러온 구스-애굽 군대를 철저하게 물리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아사와 같은 믿음으로 산다면, 이와 같은 놀라운 일들이 여러분의 삶에도 일어날 것입니다.

3) 은혜에 보답하는 삶(대하15:8~19)

선지자 아사랴의 말씀을 들은 아사 왕은 다시 한 번 자신과 주변과 나라를 살폈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더 “가증한 물건”, 즉 우상 또는 우상 숭배와 관계있는 물건들을 유다 전역에서 제거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부정한 것이 남아있지 못하게 한 것이죠. 그리고 “여호와의 낭실 앞 여호와의 단을 중수”했습니다. 이것은 성전과 제단을 수리보수하고 예배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15장 9절에 보면, 아사 왕은 전 국가적인 개혁을 수행하고 새롭게 언약을 세우며 백성들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대집회를 열었습니다. 이는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기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열었던 대집회(5:2) 이후 처음 있었던 집회로서 그 규모가 엄청났습니다. 

그러는 중에 아사 왕은 그의 모친 혹은 할머니(11:23;13:2)인 “마아가”가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것을 알고 그 태후의 위(位)를 폐할 정도로 단호하게 신앙의 순수를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아사 왕의 두 번째 신앙개혁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보답하여 다시 한 번 자신과 나라를 살펴 남아있는 불신과 죄악의 찌꺼기를 없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아사와 유다로 인해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가운데에서 나와서 저의 중에 머물러 사는 자들”이 많았습니다(15:9). 즉 북 이스라엘의 백성들까지 유다의 신앙개혁과 번영을 보고 남하(南下)하여 정착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아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였습니다(15:16). “온전(솰렘)”이란 그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한결같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온전함이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온전함”이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4) 결정적인 범죄(16장)

아사 왕 제 36년에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유다를 공격해 와서는 라마를 건축했습니다. 원래 베냐민 지파의 기업인 라마(수18:21~28)는 예루살렘 북쪽 약 6km 지점, 에브라임에서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바아사는 유다의 안정과 번영의 명성을 듣고 남하(南下)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기 위하여(15:9) 이곳을 요새화하여 경비를 강화했고, 또한 유다 정복을 위한 전초(前哨) 기지 확보라는 전략적 목적도 꾀하였습니다. 한편 라마보다 더 북쪽에 있는 유다 땅 벧엘도 이때에 라마와 함께 바아사에게 빼앗긴 것으로 보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을 때, 지난 번 구스 백만 대군과의 전쟁 경험이 있는 아사 왕은 어떤 전시 태세를 갖추어야 합니까?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사 왕은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아람 왕 벤하닷(Ben-hadad)에게 원조를 요청했습니다. 본 절과 병행 구절인 열왕기상 15장 18절에는 “은금을 몰수히 취하여” 벤하닷에게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아사는 바아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그 부친의 구별한 물건과 자기의 구별한 물건(15:18)” 전부를 아람 왕 벤하닷에게 갖다 바치면서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아사 왕이 이렇게 한 것은 상당히 머리를 쓴 행동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북쪽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아람이 이스라엘의 북쪽 국경 지역을 도발하면, 남쪽으로 내려와 유다와 전투 준비를 하고 있던 이스라엘과 그 군대가 북쪽의 국경 쪽으로 쏠릴 것이고, 그러면 유다를 공격하던 것을 멈출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아사 왕의 생각을 그대로 맞아 떨어졌습니다. 아사로부터 많은 뇌물을 얻었을 뿐 아니라(2절), 팔레스타인으로 진출할 기회를 얻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이득을 본 벤하닷은(3절) 지체 없이 이스라엘 땅을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남쪽 유다와 접한 국경에서 전쟁 준비를 하던 이스라엘은 즉각 북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벤하닷의 침입을 맞아 수도를 방비하러 가자, 그 틈을 이용하여 아사 왕은 라마를 재탈환했습니다. 그리고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가져다가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사 왕이 지혜롭게 처신하여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은 것은 좋은 결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아무리 지혜로워 보이고 그 결과도 좋아 보여도, 사실은 엄청난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우선적인 문제는 아사가 아람 왕을 이스라엘 민족 간의 문제에 개입토록 함으로써 그 다음 한 세기 동안 계속해서 아람이 이스라엘을 간섭하게끔 만들었다는 점입니다(왕하8:28, 29;16:5-9). 그리고 아사 왕이 초기에는 온전히 여호와만 의지했으나 이제 여호와가 아닌 다른 사람을 의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람 왕 벤하닷의 원조를 받으려고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조공으로 바친 행위는 치욕적인 행위였습니다. 구스 왕의 백만 대군을 물리칠 때의 그 대담하고 멋있는 신앙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아사 왕의 모습을 보고 한탄한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9절에 나오는 “선견자 하나니”입니다. 그는 아사 왕에게 ‘왕이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하였더라면 바아사에게서 승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원래 이스라엘과 동맹 관계에 있던(3절) 아람까지도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과 더불어, 그동안 다른 선지자의 입으로나 자신의 입으로 했던 아주 중요한 말을 그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의지하라(14:11)’, ‘여호와와 함께 하라(15:2)’, ‘여화를 찾으라(15:2)’ 등의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9절에서 결정적인 말씀을 하지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감찰하십니다. ‘감찰한다’는 말은 주님의 눈이 온 땅 여기저기를 두루 다니시면서 살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범위적으로 모든 땅을 말하고, 그 깊이에 있어서는 아주 면밀하고도 자세히 살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온 땅과 모든 사람과 그 마음 속 깊은 곳을 살피시는 이유는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가?”를 파악하시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전심으로”라는 말에는 3가지 뜻이 있습니다. ❶ 첫째는 ‘최선을 다해서’라는 뜻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시작할 때의 그 열심과 정성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시작부터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❷ 둘째는 ‘집중해서’라는 뜻입니다. 살다 보면 정말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습니다. 그것을 다 하려고 하다보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당장에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집중하는 사람,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일에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❸ 셋째, ‘일편단심으로’라는 뜻입니다. 공동 번역에서는 이 구절을 “야훼께서는 당신께 일편단심인 사람에게 용기를 주시려고 온 나라를 두루 살피고 계십니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일편단심으로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한결같이, 오로지 하여’, 주님을 경외하여 그 뜻대로 살고 행하려 합니까? 여러분들이 바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사람, 즉 하나님이 찾으시는 바로 그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본문의 아사 왕은 시작은 훌륭했으나 나중에 가서 전심이 아니라, 반심도 못되고, 아예 주님과 그 말씀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선지자 하나니는 아사 왕에게 “이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라고 예언했는데(16:9), 이 말씀은 아사 왕의 후손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아사 왕 자신은 어떻게 어떻게 위기를 넘겼으나 자식들에게 전쟁의 고통과 아픔을 물려주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더 큰 불행이 아닐까요?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또 분별력에 있어서 어두워져서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고, 백성들을 학대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노년에 가서는 중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죽었습니다. 이것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못한 아사 왕의 최후였습니다.


3. “하찾사”,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

말씀을 맺겠습니다. 저는 말씀을 시작하면서 지금이 “구직대란의 시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입장에서 보면 “구인란(求人亂)”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이 드물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가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어디서든, 어떤 곳에서든 주님을 갈망하고 찾는 사람, 성령과 진리로 주님께 예배하는 사람,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 기도를 쉬지 않는 사람, 항상 찬양하는 사람 ….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즉 “하찾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아사 왕을 보십시오. 그는 사는 것이 편해지면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를 만나도 기도하지 않았고, 결국 인간적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또 그렇게 살다 보니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게 되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회개의 기회마저 날려버렸습니다. 그렇게 사니까 그의 말년이 얼마나 불행했습니까? 그는 전심으로, 평생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은 사람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시작은 화려했으니 그 끝이 너무나 수치스러운 사람이 된 것이죠.

그렇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삶이 편하든지, 반대로 고난과 질곡이 에워싼다 할지라도 절대로 달라지지 말고 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환난과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한결 같은 사람입니다.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 어디서 보아도 주님을 향한 그 열심과 정성이 한결 같은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주어진 일에 집중하시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일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일편단심 주님 만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은 이런 신앙인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쓰시고, 또 그런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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