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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눅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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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눅 15:11~32)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는 빛을 찾고 있습니다.  빛만 찾으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오늘 빛을 찾아 주님의 전에 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에 하늘의 빛이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아무리 어둡게 왔고, 아무리 힘들게 왔고, 답답함으로 왔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심령에 하늘의 빛이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내 생명에 빛만 있으면 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은 어둠을 뚫고 빛을 찾는 존재입니다.  그 중에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들은 빛을 찾는 존재입니다.  그 심령이 어두우면 완악해집니다.  그 심령이 어두우면 패역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두우면 큰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의 심령이 밝아지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아무리 흑암의 권세가 있다고 할지라도 예배를 드리다가 밝아지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듣다가 여러분의 답답하고 어두운 심령들이 밝아지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하늘의 신령한 계시적인 체험들이 있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님을 내 인생의 안내자로 모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빛을 찾아야 합니다.  빛만 찾으면 하나님의 성령님이 생명의 인도자가 되십니다.  오늘 빛을 찾아보십시오.  틀림없이 성령님께서 우리 삶의 인도자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빛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생명의 빛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내 영혼의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곤고한 심령들을 만져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죄 없는 성자들이 모이는 박물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수많은 문제와, 수많은 고통과, 수많은 아픔을 가지고 몸부림치는 병든 자들이 찾아야하는 병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 무슨 의사가 필요 있느냐?  병든 자를 위하여 내가 왔노라."

아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내가 어떤 문제가 있든 그 문제를 가지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곤고한 내 영혼을 붙잡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내 놓으십시오.  희망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 앞에 문제를 내 놓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십시오.  놀라운 것은 인간에게든 하나님에게든 구하지 않으면 얻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구하지 않으면 얻을 것도 없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자꾸 구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것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한 더 신령한 것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인륜이 무너지고, 도덕이 무너지고, 가치가 무너진 이 사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통곡하셔야 합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저렇게 잔인할 수가 있을까?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무너진 우리의 사회를 바라보면서 가슴을 찢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민족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비하신 주여,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그릇된 열정에 빠지면 안됩니다.  잘못된 열정에 자신을 내 걸면 안됩니다.  사람을 죽이고, 가정을 파괴하고, 영혼을 병들게 하는 더러운 열정에 빠지면 안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거룩한 열정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열정을 품으셔야 합니다.  가정을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거룩한 비전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들 가운데는 세상 열정에 생명을 걸고 온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혼란과 혼돈 속에서 인생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그저 그 길로 달려가던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지금 서 있는 상황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할지라도 빛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혼탁할수록 우리는 더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릇된 사회일수록 우리는 더 바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내 가정이, 우리 민족이 암울할수록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더 찾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땅의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것보다 신령한 영적인 것을 찾아야 합니다.  거기에 내가 살고, 내 가정이 사는 길이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 민족이 사는 길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 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없다라고 하던가, 아무리 인간의 종말에 대해서 모른다고 해도 모든 인간은 혼자 있는 어느 시간에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갈까?  내 영혼의 마지막은 어떻게 될까?  내 삶이 끝나면 어떻게 될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모든 인간은 빛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깁니다.  빛이 들어가면 사랑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으로 정복되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빛이 들어가서 사랑의 샘이 솟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샘이 철철 넘쳐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사회가 아무리 각박하고 메마르다고 할지라도 사랑의 샘만 솟아나면 됩니다.  오늘 이곳에 사랑의 샘이 솟아나서 우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적셔지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일마다 올 때 이런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왔는데 내 마음 밭이 온갖 잡다한 것들 때문에 힘든 때가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왔는데 세상의 염려 때문에, 아니면 미움 때문에 말씀이 막히고 은혜가 막혀서 결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면서 자기를 한번 하나님의 성령의 칼로 수술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듣다가 여러분의 마음에 이런 기도가 강하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주여, 이 육신을 해부하고 수술하듯이 내 심령을 수술하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칼로 내 마음을 수술해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성령의 칼로 우리의 마음 밭을 한번 수술해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내 마음 밭에 증오의 독초들이 얼마나 자라고 있습니까?  미움의 독초들이 얼마나 자라고 있습니까?  오만과 교만의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욕심의 가라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이 마음 밭에 굳고 굳어버린 돌덩이들이 너무 커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칼로 우리 마음 밭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 밭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어두운 뿌리들을 성령의 칼로 잘라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논과 밭에 잡초가 무성하면 낫과 칼로는 안됩니다.  불을 질러야 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마음 밭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오만과 교만과 욕심과 미움과 증오의 잡초들을 성령의 불로 태워야 합니다.  내 이 마음 밭에 성령의 불을 질러야 됩니다.  자기 파멸의 씨앗, 내재해 있는 자기 파멸의 씨앗을 하늘의 불로 지져 버리셔야 합니다.  태워버리십시오.  깨끗하게 태워버리십시오.  증오의 독초를 태우십시오.  교만과 오만의 잡초를 태우십시오.  욕심의 가라지에 불을 지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 사랑의 불을  지르십시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동물입니다.  인간의 가장 귀한 양식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생명에 사랑을 주옵소서!"  인간의 주성분은 사랑입니다.  육신의 주성분이 물이듯이 우리 인간 영혼의 주성분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먹어야 됩니다.  이 시간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할지어다!  하늘의 능력을 힘입고,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고 모든 역경의 어둠을 헤쳐 나가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삶에는 언제나 태양 빛만 비추겠다고 어디에도 약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문제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나와 내 가정을 비추기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눈을 들어 주를 향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여, 내 손이 닿는 곳에, 내 발이 닿는 곳에 사랑의 샘물을 뿌리기를 원하나이다.  이 사랑의 샘물이 흘러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터지게 하시옵소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주님의 사랑의 샘물이 터지게 하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이 살려면 어둠도 있어야 됩니다.  비옥함과 풍요와 소출이 있는 땅은 구름도 있고, 비도 있습니다.  어둠도 있고 그늘도 있습니다.  밤도 있고 바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만 있으면 안됩니다.  이런 것들이 빛과 함께 있어야 됩니다.  빛이 있어야 옥토가 되고 넘치는 열매를 거둘 수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민족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들고 어두운 역경의 시대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사랑하는 여러분! 한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들이 넘어지지 않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넘어진 그곳에서 일곱 번에 일흔 번씩이라도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독수리처럼 날개를 치고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믿음의 뜻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자신의 꿈을 펼치십시오.  자신의 의지의 날개를 활짝 펼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실행은 이론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행해 보십시오.  내 손이 닿는 곳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일을 저질러 보십시오.  내 발이 닿는 곳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리라는 믿음을 붙잡고 실행해 보십시오.
 
모세가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세가 하나님을 믿고 막대기를 들어서 나일강이라도 때릴 수 있는 실천이 있었으니까 갈라졌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 가만히 서서 "주여! 갈라 주시옵소서!  갈라 주시옵소서!"라고 말만 했다면 절대로 안 갈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실천하는 믿음이 되십시오.  행동하는 믿음이 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답답하리 만큼 순종하는 그 믿음의 행동 속에 하나님의 증거가 따르게 될 것입니다.

엔도 슈사꾸의 단편 '바다와 독약'이라는 책에 보면, 작가는 현대인들의 무관심의 질병을 강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생명의 소중함을 망각한 잔인한 인간성을 나무라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신앙생활에도 엔도 슈사꾸의 독약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관심의 독약, 영혼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독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자칫 껍데기만 붙들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내 곁에서 영혼이 죽어 가는데도 아무런 관심이 없고, 내 교회의 부흥과 엄청난 사역에도 관심이 없는 것 이것이 오늘 이 시대의 무서운 질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일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의 지상과제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사명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외면하는 성도는 건강한 성도가 아닙니다.  한 영혼을 세우지 못하는 성도의 신앙은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도 한 영혼을 구원하는 하지 못하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중세 시대에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황 이노센트 4세와 대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 발코니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바티칸 시로 여러 나라에서 보내온 헌금주머니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교황은 자랑스러운 듯이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말했습니다.
"선생, 보시오.  베드로 사도께서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는데, 지금 교황청은 은과 금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때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에게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이름의 능력,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교회를 질타하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본문의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의 유명한 비유 세 가지가 나옵니다.  일찍이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구약 성경 가운데 단 한 장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누가복음 15장을 선택하겠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5장만 있으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돈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잃은 양은 무지해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잃은 돈은 환경 때문에 잃게 되었습니다.  잃은 아들은 자기 판단과 결단에 의해 집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 가지 중 어떤 경우도 이들을 가리켜서 반역자나 배신자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잃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죄악된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습니다.  돌아오면 용서하겠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자녀들을 양육하다 보면 어느 날 자녀들이 어버이의 속을 썩입니다.  그것이 한 번 두 번 반복되면 부모는 결심을 합니다.  "내가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기에는 너무나 큰사랑이 이미 부모의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을래야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손해보는 하나님의 짝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에서 잃은 양의 비유를 보십시오.  결국에는 주인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다 놓고 잔치를 벌입니다.  바보 같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놓고, 멀쩡한 양 몇 마리를 죽입니다.  세상에 이런 손해보는 장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동전 하나 찾고 나서 벗들을 불러모아 잔치를 벌입니다.  동전 하나를 찾아 놓고 동전 몇 닢은 사용했을 겁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영혼을 찾는 일,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 신앙 생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주판알을 굴려서 하는 것이 아니다.  손익계산을 따질 일이 아니다.  전자계산기를 두드려서 하는 일이 아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데 온 천하에 사랑할 대상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의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의 탕자의 아버지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가출한 청소년을 상담하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소년에게 탕자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이제라도 아버지에게 돌아가면 신발을 사주고,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송아지를 잡아서 환영해 주실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몇 주 후에 그 소년을 만났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목사님이 이 소년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얘, 아버지에게로 돌아갔구나."
"예."
"그래, 신발을 사 주시든?"
"아니요.  발바닥이 터지도록 맞았는데요."
"금가락지를 끼워주셨겠지?"
"아뇨.  지갑까지 다 빼앗겼는걸요."
"송아지를 잡아 주셨겠구나."
"아뇨.  송아지를 잡아 제게 주시는게 아니라 나를 잡아 송아지에게 먹이려고 하시던데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간의 사랑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계도 끝도 제한도 없습니다.  내 허물보다 하나님의 사랑은 더 크십니다.  내 실수보다 하나님의 용서는 더 크십니다.  내 죄악보다 하나님의 구속의 보자기는 더 크십니다.

아들이 집을 나갈 때와는 달리 거지꼴을 하고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눈에 그 아들이 자기 아들임을 알아봅니다.  밤낮없이 아들을 애타게 기다렸기 때문에 먼발치의 희미한 모습을 보고서도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불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집나간 자식이 아버지를 먼저 알아보았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불러주셨습니다.  그 아버지가 먼저 달려가서 아들을 안아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 아버지의 자비의 눈이 아들의 회개의 마음보다 빨랐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용서의 가슴이 달려오는 우리의 발걸음보다 더 빠르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아버지는 모든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실패와 고통으로 지새우는 수 많은 밤을 아버지의 눈은 보고 있었습니다.  거리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방황하던 아들을 아버지의 눈은 뒤쫓고 있었습니다.  돼지우리에 앉아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며 절망 속에 빠졌던 그 모습을 아버지는 보고 계셨습니다.  "돌아가야지, 아니야 돌아가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망설이는 그 모습을 아버지는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충혈된 눈과 굶주린 창자를 아버지는 보고 계셨습니다.  이 사랑은 인류 전체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각자를 향한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이 사랑은 정관사의 사랑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정관사의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잃은 양, 잃은 돈, 잃은 아들 그 앞에 정관사 the가 붙어 있습니다.  동전을 찾습니다.  건초더미에서 잃어버린 동전 대신에 아무 동전이나 채워놓고 '열 개를 채웠다' 그럴 수 없는 것이 여인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남기고 떠난 그 돈을 찾을 때까지 끝까지 찾는 것이 여인의 마음입니다.

잃은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시장에서 양 한 마리 사다 놓고 '백마리 됐다'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내가 아침 저녁으로 이름을 부르던 그 양, 상처 났을 때 어루만지던 그 양, 젖을 짜던 바로 그 양을 찾을 때까지 찾는 것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아들 하나가 집을 나갔습니다.  고아원에서 나이가 비슷한 아이 하나 데려다 놓고 '이제 두 아이 됐다' 그러면서 웃을 수 없는 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내 핏줄을 타고난 그 아들, 옹아리와 걸음마를 할 때 내게 기쁨을 주던 그 아들을 찾을 때까지 끝까지 대문을 닫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어버이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귀하게 사랑하시는지, 예수님은 자기 생명과 우리 자신을 맞바꾸셨습니다.  예수의 피로 산 양이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입니까?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달리는 앰블런스와 같은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앰블런스가 엥엥거리고 달려갈 때에 다른 모든 차가 길을 비켜 줍니다.  교회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이라고 하면, 영혼을 건지는 일이라고 하면 교회 모든 프로그램은 길을 비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정신이요, 복음 목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 주님의 심장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버지의 마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맏아들입니다.  사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는 본문 24절에서 끝납니다.  본문 25절 이후로는 둘째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맏아들과 아버지의 대화로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이 집에서의 탕자는 바로 맏아들입니다.  따라서 오늘 탕자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맏아들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오늘 본문은 교회의 타성을 책망하는 메시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감격과 감사를 잃어버린 못난 신앙을 나무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상실한 교회를 향한 책망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끼리만 교제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리새인들끼리만 교제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무시했습니다.  교회 안에 성도들끼리 교제하면서도 세상 밖에는 무관심한,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복음을 전할 마음이 없는 강퍅한 신앙인들을 책망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사실 본문에서 진짜 탕자는 맏아들입니다.  이 맏아들은 먼저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버지가 왜 맛있는 반찬을 드시면서 눈물을 흘려야 하시는지, 따뜻한 이불을 덮고 주무시면서도 왜 추워하시는지, 왜 대문을 걸어 잠글 수 없는지 아버지의 고통을 전혀 외면하고 살았던 못난 아들이었습니다.  동생이 돌아왔을 때 잔치를 벌이고 너무나도 기뻐하는 아버지의 기쁨을 무참하게 짓밟아 버렸습니다.  잔치집 분위기를 망가뜨렸습니다.  가정의 행복을 꺾어버렸습니다.  누가?  이 맏아들이 말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맏아들은 동생을 잃어버렸습니다.  밭에 있다가 돌아와 보니 집안에 잔치집 분위기가 무르익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곧장 달려들어가지 못하고 담장 너머에서 종을 부릅니다.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종이 아주 소중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Your brother."  당신이 사랑해야 될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맏아들은 한번도 자기 동생을 향하여 '내 동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달려나와서 다시 깨우쳐 줍니다.  "Your brother."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느냐?  "Your brother."  그러나 끝까지 이 아들은 자기 동생이란 말을 한번도 하지 않습니다.  '이 아들'이라는 말을 영어 성경에 보면 'this son of yours.'  "당신의 이 아들"이라고 합니다.  한 번도 내 동생이란 의식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이 둘째 아들은 창기와 함께 탕진하며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까?  둘째 아들이 "아버지, 내가 창기와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렸습니다."  그렇게 고백했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동네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습니까?  친구들 중에 그렇게 증언해 준 사람이 있습니까?  종들이 그렇게 이야기했습니까?  아닙니다.  이 아들이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만났는지? 큰 빌딩을 지었는데 홍수에 날아갔는지? 아니면 사기를 당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허랑방탕'이라는 말은 "구원의 삶에 합당하지 않게"라는 뜻입니다.  "창기와 함께 먹어 버렸다"는 말은 맏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유일하게 이 맏아들이 자기 동생을 비난하기를 창기와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린 '당신의 이 아들'이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맏아들의 동생을 향한 이 비난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어찌 그 아픈 면만을 과장하여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동생을 향한 사랑의 열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의 비신자들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면 그들은 돌아오고 싶어합니다.  저들은 모두 세상과 쥐엄 열매에 이제 지쳐 있습니다.  세상은 저들에게 배부르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도 바른 길을 걸어가고 싶어합니다.  그들도 영혼의 만족을 누리며 살고 싶어합니다.  그들도 환경이 줄 수 없는 진정한 평안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방황하는 저들도 우리와 똑같이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 전도할 대상자가 없는 사람은 가장 소중한 천국가족을 버린 사람입니다.  그가 바로 오늘 본문의 맏아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 전도는 다른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복음 전도의 결과는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게 됩니다.  때문에 내 이웃이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 사명보다 서둘러 감당해야 할 어떤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고 나면 이 사명을 감당할 시간이 하루가 줄어든 것입니다.  일년을 살고 나면 일년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루도 지체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한 영혼이라도 당신이 주께 돌아오도록 도왔다면 그와 더불어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영혼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은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한 영혼이 우리 교회의 공동체로 들어오는 것은 나의 기쁨이요, 우리 모두의 기쁨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한 영혼이 돌아오든 말든 무관심한 마음은 사탄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영혼을 주 앞에 세우는 이 거룩한 일을 통해서 내 영혼의 날개에 힘이 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한 영혼을 전도하여 그를 주 앞에서 세우게 될 때, 우리 공동체는 신비한 하늘의 영적 힘을 저축하게 됩니다.  우리가 영혼의 날개에 힘을 얻고, 우리 교회 공동체가 거룩한 영적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혼 구원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32절로 이야기가 끝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본문 33절은 우리가 마무리를 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이 이야기의 결론을 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33절을 기록하느냐?  여러분이 어떤 33절을 기록하느냐에 따라서 주님 앞에 서는 심판의 보상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33절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또 어떻게 기록되어지기를 원하십니까?  한 영혼이 주께로 돌아오는 그 기쁨을 가슴에 가득 안고 살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주여, 나에게도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주여, 나에게도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주옵소서!"
"주여, 한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올 때 느끼는 그 감격과 기쁨을 우리들에게도 주옵소서!"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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