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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나는 나를 아는가? (고전 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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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아는가? (고전 10:1~11)


이런 민담을 들어보셨습니까? 거울에 얽힌 얘기입니다. 시골에 사는 선비 하나가 한양에 과거를 보러갔습니다. 과거시험을 치른 후에 한양 장터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광물점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참 신기한 것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손거울입니다. 값이 비쌌지만 시골 촌구석에서 고생하는 아내에게는 안성맞춤의 선물이 될 것 같았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내를 찾았으나 김을 매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잘 볼 수 있는 벽에 못을 박고 거울을 걸어 놓았습니다. 아내가 얼른 보고 기뻐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선비가 외출을 한 사이에 아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짐 보따리는 있는데 남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방을 둘러보니 벽에 이상하게 반짝 거리는 것이 걸려 있었습니다. 일어나서 들여다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 안에 예쁜 색시 하나가 들어있었습니다. 한양에 과거를 보러갔던 남편이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고 예쁜 색시 하나를 데려온 것이 분명했습니다. 가슴이 떨렸습니다. 분하고 억울했습니다. 남편 뒷바라지 하느라 온갖 고생 다했는데 남편은 자기를 배신하고 다른 색시를 데려왔으니 지난 세월이 너무 억울했습니다. 방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합니다.

그때 시어머니가 들어와 울고 있는 며느리의 얘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어떤 색시를 데려왔나 싶어 거울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예쁜 색시는커녕 바짝 늙은 할멈이 있었습니다. 아니 이 녀석이 할망구하고 바람이 났다니! 아들이 한심했습니다. 첩을 데려오려면 젊고 예쁜 색시를 데려와야지 다 늙은 여자를 데려다 어디에 쓰려고 하나? 한심한 아들을 둔 시어머니가 속이 상해 퍼질러 앉아 웁니다. 집안에서 통곡소리가 난다는 얘기를 듣고 들에 있던 시아버지가 헐레벌떡 들어왔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시아버지가 확인도 할 겸 거울을 들여다봤습니다. 거울 안을 들여다본 시아버지가 갑자기 넙죽이 절을 하더니 “아버님, 안녕하셨습니까?” 인사를 여쭙더랍니다.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이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와 꼭 닮았던 모양입니다. 거울이 없던 시대에 회자된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만일 한 번도 자기 얼굴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 처음으로 거울을 통해서 자기 얼굴을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물론 처음에는 모두 놀랄 것입니다. 자기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잘 생겼구나”라고 흡족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아니, 이게 나야? 실망이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80이 다된 할아버지가 ‘귀소본능’이 일어나 고향을 찾아갔습니다. 오래 전에 뛰놀던 냇가나 산을 바라보며 감회가 컸습니다. 방학 때라 다니던 초등학교 교실에 가서 의자에 앉아볼 수 있었습니다. 70여 년 전의 일들이 새록새록 생각났습니다. 학교를 나와 논둑길을 걷는데 앞에서 할머니 하나가 손주를 데리고 오고 있었습니다. 이가 다 빠지고 주름으로 가득 찬 얼굴이지만 초등학교 동창생이 틀림없었습니다. “할머니, 70년 전에 이 학교에 다니지 않으셨어요?” “네. 이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때 이동철이라는 학생을 기억하세요?” “글쎄요,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당신처럼 대머리 벗어진 할아범은 없었수다.”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토라진 음성을 내뱉고는 가더랍니다. 늙은 할아범만 보였지 자신의 늙은 모습은 보지 못하는 할머니였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자신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과거의 나는 누구였나? 나의 뿌리는 어디서 시작되었나? 현재의 나는 누구인가? 앞으로의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내가 나를 알아야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모르면 조롱거리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Know yourself)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나를 볼 수가 없습니다. 내 눈으로 내 얼굴이 안보입니다. 나를 내 능력이나 내 경험이나 내 지식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거울이 있어야 내가 내 얼굴을 볼 수 있듯이 나 아닌 다른 것을 이용해야만 나를 볼 수도 있고, 알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처음 창조될 때는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자기를 볼 수 있는 눈이 망가졌습니다. 판단능력이 사라졌습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에게 맨 먼저 찾아온 재앙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나를 모르니 나는 더욱 깊은 죄의 수렁에 빠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추함을 알지 못합니다.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 타락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나 자신을 보게 합니다. 성경은 나 자신을 알고 깨닫게 하는 인생거울입니다. 성경을 펼쳐 읽으면 내가 보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오늘 봉독한 고전 10:1-11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눈도 열어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일, 송년주일 예배를 드리며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의 말씀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누구인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고전 10:1)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누구인지 너희들의 조상 때부터 내가 알고 있다”고 말함으로 모세오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너희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알려면 첫째로 뿌리를 알아야 합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그 뿌리를 모르면 오늘의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뒤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고전 10:1b-4a) 

애굽에서 430년 동안이나 종살이하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종 모세에 의해 탈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광야를 지날 때,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인도했습니다. 홍해가 가로 막을 때는 바다를 갈라서 육지처럼 지나가게 했습니다. 하늘에서는 만나를 내려주시고 목이 마를 때는 반석에서 샘물이 솟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3장과 17장에 이 역사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제 갈 길로 달려감으로 하나님을 슬프게 했습니다. 바울은 5절에서 이렇게 지적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 10:5)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했느냐? 

① 악을 즐겨 행했습니다(6절)
② 우상을 숭배했습니다(7절)
③ 음행을 저질렀습니다(8절)
④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9절)
⑤ 원망을 했습니다(10절)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광야에서 멸망한 자들을 성경에 기록한 까닭은 모든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깨우치게 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이 말씀을 읽노라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같이 성경은 우리의 뿌리를 알게 하여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합니다.

둘째로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나를 알게 됩니다. 탈무드에 보면 굴뚝청소를 함께 한 두 소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소년이 굴뚝청소를 하고 나왔습니다. 누가 먼저 얼굴을 씻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상대방의 얼굴에 그을음이 묻어 있는 것을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씻게 마련입니다. 내 얼굴도 저렇게 더러워졌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 얼굴은 보지 못한 채 상대방의 얼굴에 꺼멍이 묻어 있다고 흉보는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단점을 발견했을 때 비난하거나 정죄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칫 남의 실수를 보면서 책망하고 정죄하고 비방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나를 볼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셋째로 오늘 2008년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난 한 해를 뒤돌아보면서 세월과 함께 떠나보내야 할 것들을 떼어내는 일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보았으면 단장을 해야 합니다. 잘 한 것이 무엇이고,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서 잘못한 것이 있다면 털어버려야 합니다. 성경에 비춰보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깨달았으면 버려야 합니다. 수정해야 합니다.

악을 즐겨 행 했습니까?
우상을 숭배했습니까?
음행을 저질렀습니까?
주님을 시험했습니까?
원망을 일삼았습니까?

한 해를 떠나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즈음에 영적 새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행위를 버려야 합니다. 버릴 때는 용단이 필요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버릴 때 용감한 사람입니다. 우물쭈물하면 다시 오염되고 맙니다. 

성경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으면 맨 먼저 찾아드는 마음이 있습니다. “감사”입니다. 광야를 건너는 이스라엘이 구름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났으며 신령한 음식과 음료를 먹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으셨다면 하루도 살 수 없었음을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받았기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홍해의 위기 앞에서 바다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의 은총이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릴 때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목이 마를 때 바위를 쳐서 생수를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은혜는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사 41:4)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섰을 때 “나는 죄인 중의 괴수”였는데도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깨닫고 이렇게 감격하였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of whom I am the worst) (딤전 1:15)

그러므로 “오늘의 나”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제 한 해를 넘어가면서 오늘의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았으니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새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해에는 더욱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따라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깨우치게 하시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하나 더 정리하고 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지난 한 해 우리를 사로잡았던 실패감, 열등감, 섭섭함, 분노, 등을 떨쳐버리고 가는 일입니다.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던 인도는 독립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갈등으로 내홍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회교도에게 아들을 잃은 한 힌두교도가 마하트마 간디를 찾아갔습니다. “어떻게 하면 회교도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인 자들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마음속에 가득한데 어떻게 하면 평화를 내안에 찾을 수 있습니까?” 간디는 그에게 고아가 된 적군의 아들을 입양해서 자식처럼 키우라고 제언을 해주었답니다. 내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용서가 필요합니다. 용서는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미움과 증오와 불안으로 가득한 내 안에 평안을 줍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용서가 있어야만 원만히 맺을 수 있습니다. 

사노라면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때로는 억울하게 상처를 받고 피해를 입습니다. 그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를 모함한 자, 섭섭하게 한 자에 대한 분노를 삭일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못된 짓을 한 자를 용서하면 그들이 저지른 못된 행동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 용서가 안 됩니다. 용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못된 짓은 못된 짓입니다. 다만 못된 짓을 한 그 사람이 불쌍한 것뿐입니다. 못된 짓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를 용서하지 않을 때 오히려 그 상처와 분노의 감정에 내가 노예가 되어,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을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을 보면 그동안 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평안을 되찾는 것을 종종 봅니다. 죽음이 모든 것을 내려놓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실패나 상처는 미래 앞에서 죽은 시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 과거를 다시 살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살 뿐입니다. 과거는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결심만 하면 과거의 아픔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새해는 새 마음으로 맞이합시다. 새 감정으로 맞이합시다. 새 희망으로 맞이합시다. 새 기쁨으로 맞이합시다. 새해를 출발하는데 짐이 될만한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가벼운 차림으로 시작합시다. 

2008년의 아픔이여 영원히 사라져라. 기쁘고 즐거운 미래만 다가올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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