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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속에 눌리는 것이 있습니까? (고후 11:2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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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속에 눌리는 것이 있습니까? (고후 11:28~28)


영감 받은 사도 바울은 날마다 자기 속에 눌리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 '눌리고 있다'는 말은 '압력(pressure)을 받아 고통스럽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마음에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의 삶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이 세운 교회들로부터 들려오는 분쟁과 타락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고통에 대하여 사도행전 20장 29-30절에 『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해치는 이들이 유대주의자들인지 혹은 영지주의자들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이 거짓된 교의를 가지고 기독교를 전적으로 부인하면서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는 거짓 교사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양의 탈을 쓰고 침투하는 이리들에 대하여 경계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5절에 『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고 했습니다. 

이러한 배교의 세력들 때문에 교회가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들을 지목하여 흉악한 이리라고 지칭했습니다. 이들은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왜곡하다', '구부러지다'라는 뜻으로 '곡해한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에베소 교회에는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니골라당'이라는 이단이 생겨 분열을 도모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디모데후서 1장 15절에 『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7절에 『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계시록에 기록되었습니다(계 2:1-7). 

이렇게 교회의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것에 사도 바울은 눌리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2절에 『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교회 안에 침투하는 영적으로 잘못된 바이러스의 예봉을 막아야만 합니다. 작금에 교회 안에 사상적 질서는 혼탁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모두가 물질 만능주의와 과학지상주의를 부르짖고 그것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방송매체를 통한 각기 다른 교리를 가지고 하는 설교나 성경강해는 확실히 문제가 많습니다. 장단을 논하기 전에 평신도들에게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눌리는 것은 오직 교회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성장을 방해하는 잘못된 사상과 잘못된 교의들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잘못된 교의와 사상들이 무엇입니까? 


Ⅰ. 한국교회 안에 침투한 자유주의 사상 입니다. 

한국의 신학사상을 연구한 간하베(Harvie Conn)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 장로교 신학에 관한 연구"논문에서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침투에 대해서 거침없이 논했습니다. 

첫째, 캐나다 선교부 중심으로 자유주의적인 선교사 스코트(Scott), 푸레지어(Frazier)등의 영향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미국 북장로교회의 신학적 좌경에서 오는 점차적인 좌경 신학적 영향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일본유학을 하는 동안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임으로 생기는 일본 신학의 영향이라고 했습니다. 넷째, 초대 선교사들의 교구 조정으로 일부 지역이 자유주의 신학의 성역화(聖役化)가 되어 버린 이 네 가지 사실을 들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 모두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의 침투에서 자유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김의환 교수의 '도전받는 보수신학'라는 책에서 그가 언급했듯이 가장 큰 요인은 미국 북장로교회의 좌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 신학과 맞서 싸운 신학자는 박형룡 박사, 박윤선 박사 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재준 목사는 일본 청산학원에 가서 자유주의 신학을 배웠습니다. 그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으나 자유주의 신학을 발표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박형룡 박사의 반대로 그는 평양신학교 교수의 기회도 얻지 못했습니다. 

김재준 목사는 당시 평양신학의 학지(學誌)인 「신학지남」을 책임 맡고 있는 남궁혁 박사를 도와 「신학지남」 편집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1934년 김재준 목사는 신학지남 권두언에서 지금까지 보수신학을 맹종할 것이 아니라 좀더 한국적인 새로운 신학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새로운 신학건설을 제창했습니다. 

그는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 연구'라는 논문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을 '동정녀'에서 '여자'로 고쳐버렸습니다. 그리고 표적을 꼭 이적으로 볼 것은 없다고 덧붙여 지적함으로 노골적으로 성경에 있는 초자연주의에 대해 도전을 했던 것입니다. 

그때 편집위원이었던 박형룡 박사는 사표를 내고 말았습니다. 이후에 김재준 목사는 신학지남을 통해 무려 여덟 편이 넘는 학술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한국교회 신학자 김양선(金良善) 교수는 "김재준 목사에 의해 한국에 자유주의 신학이 싹텄다"고 했습니다. 한국 보수신학의 보루였던 박형룡 박사는 "비단 19세기적 철저한 자유주의뿐만 아니라 신정통주의란 이름으로 칼 바르트 신학을 따르는 자들도 실상은 정통주의 신학과 상관없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라고 간주했습니다. 

1934년 제 23회 총회에서 자유주의와 정면으로 충돌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그것은 모세의 창세기 저작 부인설과 교회 안에서 여자의 지위문제였습니다. 제 24회 총회는 박형룡 박사의 반대론을 받아들여 이 두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제 24회 총회에서 유형기 목사 편집 번역인 아빙돈 단권 성경주석(Abing don Bible Commentary)이 제소되었습니다. 
단권주석은 그리스도의 처녀탄생을 부인하고 그의 신성을 부인하였습니다.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고 육체적 부활의 관념은 유대인의 묵시 문학에 의하여 최초로 소개되었다고 했습니다. 총회에서 문제가 되자 채필근 목사는 총회 결정에 따라 잘못을 사과했으나 송창근 목사는 사과를 거절했습니다.

감리교는 1930년 총회적으로 교리적 포용정책을 결의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회원이 되어 우리와 단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무 교리적 시험을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의 중요한 요구는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함과 그를 따르려고 결심하는 것이다. 우리의 입회조건은 신학적인 것보다 도덕적이요 신령적이다. 개인 신자의 충분한 자유 신앙을 옳게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그 후 신사참배 문제에서 이미 알고 있는 대로 자유주의 신학은 자신의 정체가 백일하에 노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Ⅱ. 신정통주의 신학사상입니다. 

칼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으로 신학 사상적 문제를 야기 시켰습니다. 칼바르트의 신정통주의 혹은 바르트주의는 모든 국경을 넘기에 충분했습니다. 극동에 미친 그의 영향은 괄목할 만하였고 일본에서는 바르트가 일종의 신학적 교황으로 추앙되었습니다. 

신정통주의의 주제 중 하나는 계시의 개념입니다. 바르트의 계시는 위로부터 수직적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최선의 통찰력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는 사건인데 동시에 계시는 성경과도 동일시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과 그 안의 진술들은 계시의 증거요 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자체가 아니요 성경의 진술들은 계시들 자체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시키는 것은 계시를 객관화 하는 것이요 물질화 하는 것이라고 바르트는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이 썼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르트는 성경의 유기적 영감을 부인합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선택하시는 분 일뿐만 아니라 택함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신정통주의는 인간의 주관적 경험을 진리의 표준으로 삼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정통주의에서는 계시가 단순히 사람에게 향한 하나님의 선언이 아니라 계시는 만남이요 대면이요 대화라고 했습니다. 신정통주의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바르트는 예수의 참 사람으로서의 수욕을 말하지 않습니다. 바르트는 천당과 지옥의 실제성을 부인합니다. 또한 예수는 만민을 위한 구원사(救援史)라고 합니다. 
그 구원은 심히 커서 불교도나 유교도나 신도(神道)교도들을 포함하여 선택과 유기간의 분계선을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바르트의 입장을 총체적으로 볼 때 불신앙의 죄에 대한 심각성을 파괴시키고 배교에 대한 성경의 경고나 회개와 신앙에 대한 요구를 무의미하게 합니다. 

성경에 기록한 죄인의 비참한 상태를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그의 견해는 단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전 세계적으로 관여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에 그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의 긴급성이나 각자의 회개와 신앙생활을 통한 구원에 대한 감격을 크게 약화시킵니다. 중요한 것은 구원에 대한 보은이 교회 운동에서 열매를 본다는 성경적 맥락을 무의미하게 합니다. 


Ⅲ. 신복음주의 신학사상입니다. 

신복음주의자들에 대하여 일어난 가장 격심한 토론 제목은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이었습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이 과학의 빛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에는 아무 오류도 없다는 완전축자 영감설을 주장하면서도 워필드의 입장 같은 것에 대조시켜서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랄프 어얼(Ralp Earle)이나 다니엘 피 풀러(Daniel P. Fuller)같은 사람들은 영감과 무오성을 엄격히 구분하여 영감은 믿으나 무오성은 부인하는 듯합니다. 예컨대 "하나님이 알리시기를 원한 모든 것의 권위 있는 기록을 우리가 가지도록 보장하신 일이다. 그러나 지엽적인 문제에 있어서 무오를 확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나 목적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과학과 성경의 관계를 조사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존 씨 휠콤 같은 사람은 그러한 견해는 "이중계시설"이라 칭했습니다. 이 설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류에게 진리에 대한 두 가지 계시를 주었다고 했습니다. 곧 성경과 자연인데 "각각 자기 영역에서 완전히 권위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신학자는 하나님이 세운 성경해석자요, 과학자는 하나님이 세운 자연의 해석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은 자기가 연구하도록 위촉받은 독특한 계시의 책의 진의를 규정하는 특별한 도구들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우주 인류 및 거대한 홍수의 근원 같은 문제는 신학자 영역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연에 관한 것은 과학자에게 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이론은 과학의 영역은 성경이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문을 닫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진화론에 대해서도 개방적이라고 상당한 우려를 표시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Ⅳ. 개혁주의 신학사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칼빈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원래 개혁이란 말은 16세기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를 지배했던 오류와 폐단들에 대하여 항의하여 일어난 교회들의 성격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만이 인간 문제에 해답을 준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성경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성경에 붙잡혀야 합니다. 따라서 성경이 우리의 생활과 생각을 좌우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신앙과 행위의 절대자이고 최종적인 권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외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개혁주의 사상체계는 
① 성경에 최고 권위를 부여합니다. 
② 성경의 완전축자영감을 인정합니다. 
③ 성경의 무오성을 믿습니다. 
④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습니다. 
⑤ 하나님의 주권과 작정을 믿습니다. 
⑥ 하나님의 주권과 창조를 믿습니다. 
⑦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습니다. 
⑧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을 믿습니다.
⑨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은 전 피조세계에 미치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믿습니다. 

개혁주의는 사상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란 전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절대적인 자기 지배를 가리키는 사상체계의 술어입니다. 이것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상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이 전 피조세계에 완전하고 절대하신 주권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것은 인간이나 또 다른 피조물에게서 사상체계를 출발시키지 않고 오직 하나님 자신께로부터 출발시키고, 진행시키고, 끝을 맺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국 장로교는 처음부터 이와 같은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 신학을 전수받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세대주의, 근본주의, 신비주의 그리고 경건주의 등이 소리 없이 침투하였습니다. 여기에 신학적 자유주의 사상이 가세하여 오랫동안 한국 개혁주의 신학의 정체성을 위협하여 왔습니다. 

한국장로교회는 초기부터 세대주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세대주의가 곧 역사적 장로교회인 것처럼 혼동하고 세대주의와 개혁주의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세대주의는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를 일곱 세대로 나누고 이들 각 세대는 서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세대주의는 성경의 단일성과 교회의 단일성, 구원의 단일성에 흠집을 내고 있습니다. 

한국장로교회에 영향을 준 사상은 또한 근본주의입니다. 근본주의가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신성, 처녀탄생, 부활, 재림 등 근본교리들을 변호한 것은 개혁주의와 일치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균형 있게, 깊이 있게 보지 못하고 단편적으로 보는 것이 약점입니다. 예를 들면 예정교리를 강조하지 못하고 만족하게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깊이 보지 못했습니다. 일반은총에 따르는 노력을 강조하지 못하고 창세기 1장 28절에 나타난 문화적 사명을 소홀히 합니다. 

신비주의는 한국교회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사상체계입니다. 신비주의는 객관적인 성경보다 주관적인 체험을 앞세웁니다. 기복신앙, 만사형통 신앙을 내세우게 됩니다. 마침내 불건전한 신비주의는 어쩔 수 없이 진리에서 탈선하게 됩니다. 신비주의는 개인의 변화보다 환경의 변화를 우선합니다. 이것이 기복주의 신앙의 압권입니다. 

기독교의 사회참여는 죄인을 회개시키고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데서 철저히 국한합니다. 또한 경건주의는 기독교에 타격을 입힙니다. 개혁주의는 언제나 성경이라는 창을 통하여 보기 때문에 이 세상이 크게 보이지 않고 성경이 가장 가까운데 있습니다. 언제나 성경은 개혁의 주체이고 성경 외에 모든 것은 개혁의 대상이 됩니다. 경건주의는 개혁주의의 동반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신자의 경건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있어서 경건은 중요하나 경건주의는 무익합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성경에도 없는 것을 함부로 주장하여 표준을 삼게 함으로 율법주의에 떨어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성도의 생활을 성화시키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지 사람이 생각하는 어떤 규칙에 달린 것은 아닙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창조가 아니고 본래의 것을 찾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 주위에는 비성경적이거나 인본주의 요소들이 성경의 탈을 쓰고 개혁주의 사상체계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곧 성경주의 신학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이유입니다. 

개혁주의는 성경에 철저한 신학사상 체계입니다. 개혁주의는 완전 영감된 성경을 믿는 믿음에서부터 모든 것이 출발합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이론이나 사상체계도 성경에 기초하지 아니하면 아무 쓸모가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쉬지 않고 밤낮 눌리는 것은 교회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 시간도 보호하시고 간섭하시고 통치하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 때문에 여러분 속에 눌리는 것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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