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 나라를 향한 비전 매핑(4) : 성전 미문 (행 3:1~10)

  • 잡초 잡초
  • 888
  • 0

첨부 1


하나님 나라를 향한 비전 매핑(4) : 성전 미문 (행 3:1~10)


상담실을 찾은 한분이 자기의 정신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고 합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무엇을 갖고 싶은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나는 끊임없이 애정의 대상을 찾아 방황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또 그런 대상에게 버림을 당하지 않을까 늘 두려워합니다. 

나의 대인관계는 성난 파도처럼 요동치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때때로 나는 물쓰듯 돈을 써버리고 이내 그것을 후회하곤 합니다. 나는 돈을 모으지 못합니다. 나는 정서적으로 늘 불안을 느낍니다. 이런 불안이 심해지면 자살 충동을 느끼는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누군가를 의지하지 못하면 삶을 이어가지 못하는 대인 의존적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정신 의학에서 이런 증상을 가르쳐 “경계선 성격 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라고 부릅니다. 사람들 중에 약 2-3가 이런 증상을 경험하고 상담가나 의사를 찾지만, 경미한 경우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비슷한 징후를 느끼며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병명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경계선 성격 장애>! 본래는 신경증과 정신병의 경계선에 위치한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인생은 누구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이웃에게 다가서지도 멀지 하지도 못하는 소위 경계선상의 불안을 느끼며 생존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교회에 나오면서도 제대로 교인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회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도 아닌 경계선상의 교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런 사람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가난한 사람이어서 구걸로 생존을 이어가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인생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성전 미문(예루살렘 동편 안쪽에 위치한 Nicanor문, 아름다운 문)에 날마다 출근하여 구걸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늘 성전 가까이 있었고 성전을 사모하기도 하지만 성전에는 들어가지는 못하고 다만 성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자선에 의지하여 생존을 이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마도 그는 입만 열면 성전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인색함과 이중성을 비판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야 말로 성전 안과 성전 밖의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던 인생이 아닙니까? 이렇게 교회 가까이 있으면서 신앙의 도움을 은근히 사모하면서도 입만 열면 늘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경계선상의 이웃들’이라고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그런 경계선상의 이웃들을 돕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1. 이웃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본문 4절에 보면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이 사람을 주목했다고 했습니다. 2절에 의하면 날마다 이 사람은 친구들의 도움을 빌려 이 성전 미문을 찾았고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전에도 그를 자주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도 이 사람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날은 이 사람을 특별한 마음으로 주목해 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적의 시작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하여’라는 말은 희랍어에 ‘아테니조’(atenizo)라는 단어가 쓰여 지는데 <의도적으로 집중적으로 바라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fastening(fixing) his eyes upon(고정해서 붙잡아 두고 바라봄)이라는 번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말로는 ‘눈 맞추기’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제일 못하는 것의 하나가 ‘눈 맞추기’입니다. 부부도 평생을 함께 살면서도 눈 맞추라고 하면 잘 못합니다. 그런데 부부 생활에서 눈 맞춤은 입맞춤보다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눈은 입보다 더 많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이 눈 맞춤을 못하는 원인이 그 중요성을 몰라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한국어는 못된 시선을 표현하는 다양한 언어를 소유: 노려보기, 째려보기, 두리번거리기, 곁눈질하기, 눈 부라리기, 눈 치켜뜨기, 눈 내리깔기, 깔보기, 한눈팔기, 사팔뜨기, 먼 산보기, 도끼눈 뜨기) 문제는 우리에게 훈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메라비안(Mehravian) 법칙(UCLA, Albert Mehravian 교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첫인상이 7초안에 결정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첫인상이 무엇으로 결정되느냐 하면 대화의 내용으로는 7, 청각으로는 38, 몸의 언어로가 55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몸의 언어중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눈의 언어인 것입니다. 한국어에도 ‘눈웃음 친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다른 커뮤니케이션 연구가가 소위 ‘5관에 의한 지각 정도’를 연구한 일이 있습니다. 상대가 보내는 정보의 인상이 5관중 무엇을 통해서 얼마나 우리에게 전달되느냐는 것입니다. 머리로 전달되는 것이 11, 손놀림으로 3, 입으로 2, 코로 1 그런데 눈으로가 83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의사소통의 결정적인 부분은 시각에 의하여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소통을 제대로 하려면 우선 이웃들을 사려 깊게 주목하는 연습부터 해야 합니다. 주목할 때 허공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눈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이 의사소통의 시작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입니다. 이웃을 정말 한번 사랑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그 사람을 지금까지 한번도 바라본 적이 없는 그런 ‘느끼한 시선’으로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그를 치유하고 그를 변화시키는 기적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2. 이웃들과 기도를 나누어 보십시오.

우리가 신앙의 경계선상에서 방황하는 이웃들을 섬기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의 하나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는 일입니다. 안 믿는 이웃들도 심지어 전도를 수용하지 않는 이웃들도 기도해 준다고 하면 대부분 거절하지 않습니다. 

제가 한번 비행기를 타고 옆 좌석에 계신 분에게 전도했더니 화를 내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교회 나갔다가 받은 상처가 원인인듯 싶었습니다. 그래서 더 대화를 지속하기 어려워 그냥 제가 목사인데 “한번 기도해 드릴까요?” 그러니까 갑자기 양처럼 순해지면서 “기도해 주세요”하더라구요. 그래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를 시작하자 어느 사이 어깨를 들먹이며 눈물을 흘리더니 공항에 도착해서는 “저 교회 다시 나가겠습니다.”라고 인사하던 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베드로가 앉은뱅이였던 이 사람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기도였다고 믿습니다. 요즘 중보기도 사역의 장에서 통용되는 말을 빌리면 ‘명령 기도’(Prayer of command)인 것입니다. 이웃들을 섬기고 싶으시고 전도하고 싶다면 그를 위해 기도로 시작하십시오. 우리가 기도하는 순간 성령의 사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미국에 대학교수이며 전도자 가운데 ‘토니 캄폴로’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한번은 역시 비행기를 타고 “옆에 앉을 분에게 전도할 기회를 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보기에도 인상이 위협적이고 덩치도 큰 험상궂은 분이 옆 좌석에 앉더랍니다. 그래서 속으로 주님, 이 사람은 아니지요? 했더니 자꾸 그 사람이 내가 보낸 사람이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한번 더 흘깃 인상을 보니 입을 잘못 열었다가는 얻어맞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기도를 시작하기로 했더니 기도하는 동안 조금은 용기가 났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런 기도를 계속했다고 합니다. “성령님, 제가 일단 이 사람에게 기대어 보겠사오니 제 사랑의 마음이 전달되게 하소서”하고 옆으로 몸을 기울이며 부딪치자 갑자기 그가 “당신 혹시 나를 위해 기도하는 것 아니요”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그랬더니 “기왕 날 위해 기도하려거든 소리를 내서 기도해 주시오”하더랍니다. 기도하는 동안 성령이 일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은 지금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가는 도상이었습니다. 1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제 구시(오후 3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그러나 그날 그들은 그들이 성전 안에서 만이 아닌 성전 밖 미문에서도 기도 사역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배웠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웃들도 지금 우리가 지나가는 삶의 마당에서 우리의 기도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입니다. 기적의 시작입니다.


3.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선물하십시오.

사도 베드로는 늘 이 앉은뱅이 걸인을 성전 미문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늘 지나치고 싶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냥 돈을 구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지나칠 적마다 조금씩 이 사람에게 적선할 수 있었겠지만 날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날 만은 성령 충만했던 베드로는 다른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 사람에게 적선이 아닌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날만은 이 사람이 돈 이상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생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향해 선포한 것입니다. 

6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랬더니 그는 일어나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 바로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는 교회의 지상명령인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가 교회를 비판하니까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해야 할 유일한 책임이 사회봉사인 것처럼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웃 사랑의 명령에 따라 물질로 사회를 섬기는 책임도 다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좀더 이런 일에 헌신하기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기억하실 사실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사회봉사는 교회 아닌 다른 단체에서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만이 세상을 향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양보할 수 없는 교회의 우선 순위적 사명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때 지나간 역사에 소위 자유주의 신학이 창궐하던 시절 교회가 복음 증거의 사명을 잊고 사회봉사에만 열중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회심 자들을 잃어버린 교회들은 위축되기 시작하였고 결과적으로 교회는 전도도 사회봉사도 못하는 영향력을 상실한 공동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이름을 증거 하는 그 우선 순위적 사명을 결코 놓치지 않는 주님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부자 되어 전도안하는 교회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가난해져서 전도 많이 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중세 교회는 부자 되어 전도안하는 교회이었습니다. 교황이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를 불러서 화려한 금으로 장식된 성당을 보여주며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하는 말은 이제 우리가 못하겠구만” 하자 신학자 토마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소리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텍사스에 한 교회 앞 마당에서 유전이 발견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유전 가치가 있는 그 마당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의논하던 교회는 더 이상 교인들을 받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유전 이익 배당금이 줄어들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망했고 교인들도 불행해 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위대한 교회는 은과 금이 남아도는 교회가 아니라, 전도와 선교를 위해 모든 은과 금은 속히 처분해버리고 스스로 가난해 지는 교회입니다. 다만 예수의 이름만 가득한 교회-나는 그것이 우리 교회의 미래이기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름이 오직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오직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오직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경제 위기 속에서도 우리 교회 성도들이 예수의 이름을 붙들면 일어 설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정도 우리 사업체도 예수의 이름을 붙들면 다시 재기 할 줄로 믿습니다. 주인 되신 주께서 친히 주의 이름을 위해 사는 그 가정, 그 사업 그 공동체를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승리를 누리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하십시다. (이동원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