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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자 (왕하 6:14~19, 왕하 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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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자 (왕하 6:14~19, 왕하 8:11~13)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로서 갑절의 영감을 구하였다. 마지막까지, 끝까지 선생님을 좇은 엘리사는 승천하시는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어 손에 들게 되었다. 엘리사는 그 옷을 들고 자기 옷은 둘로 찢고 요단 언덕에서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내려치니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요단을 건너게 된다. 선생님이 요단을 건너갈 때 그 모습 그대로 엘리사도 똑같이 요단을 되돌아 건너오게 된다. 이때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를 보며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고 말한다. 이제 분명히 엘리사는 갑절의 영감을 받고 놀라운 일을 행하는 자가 되었다. 누가 보던지 그는 선지자다운 선지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의 신분에 대한 또 하나의 묘사가 있다. 그것은 왕하4:7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이란 표현이다. 심지어 왕하4:9을 보면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대접하고 자신의 집으로 모셔 드릴 때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을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줄 내가 아노니...” 이방의 여인도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왕하4:27, 5:8, 5:20, 6:6, 6:9, 6:15, 7:19, 8:2, 8:11, 13:19에도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신약으로 가면 디모데에게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라고 하였다.

도대체 하나님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성경을 종합해 보면...  

1.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것으로 등기낸 사람이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2.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에 대한 것에 신명을 바치는 사람이다.
   바쳐야 할 대상, 헌신해야 할 대상, 열정을 품어야 할 대상이 많아지면 오직 하나님에 대한 것만 제일 우선에 두는 사람이다.

3.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제일 잘 헤아리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과 하나님이 슬퍼하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마음의 중심에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감정이 들어와 있다.

4. 하나님의 사람이란 언제나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계시받는 영적 소통의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세상의 일에만 눈이 팔려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와 음성에 
   귀를 기 울이고 엎드리게 된다. 즉,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는 사람이다.

5.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영광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 드린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순종하고 자기를 비우며 거룩한 길을 걷는 자이다. 

우리 모두는 오늘 내가 하나님의 사람인지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자처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람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살아야 한다. 사과나무는 돌짝밭에 갖다놔도 사과나무다. 사람이 없는 골짜기에 갖다놓아도 사과나무는 열매를 맺고 과수원에 갖다놔도 변함없이 사과꽃을 피운다. 

한 그루의 나무들도 다 변함없이 자기 구실을 다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부끄럽다. 세상 속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환경에 따라서 카바레 사람, 노름하는 사람, 술 먹는 사람으로 돌변한다.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만 산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이 된 영적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눈과 입, 귀가 다 육신에 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해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창3:6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에 이끌려 하나님의 법을 어긴 아담과 하와처럼 유혹에 넘어지고 사단의 거짓말에 속고 처음부터 살인한 자의 종이 되어 산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세상 사람과 똑같아서도 안된다.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 사람과 다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똑같지 말아야지, 달라야지” 하고 의식적으로 외우고 암기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의 감동이 있기에 다르게 구별되고 마는 것이다. 엘리야는 갑절의 영감을 받았다. 그는 무엇이 다른다.


첫째,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들이 위기를 느낄 때 두려워하지 않는다. (왕하6:16)

엘리사가 도단 성에 있을 때 아람 군대는 성을 에워쌌다. 이때 선지자의 사환이 도성을 둘러싼 군사와 말, 병거를 보고 두려워 떤다. 

왕하6:15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그때 엘리사는 왕하6:16에서 대답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엘리사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삶을 판단하는 사환에게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이 사환의 눈을 여시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지켜 주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사람은 불병거와 불말은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보는 것이 다르다. 육신의 눈으로 아람의 군대와 병거만을 보는 사람은 두려워할 수 밖에 없지만 엘리사는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천사를 보고 불병거를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것, 하나님에 관한 것을 보는 자는 세상 군대가 두렵지 않다. 불병, 불병거를 본 것은 이기는 비결을 본 것이다. 아람의 패전을 본 것이다. 허수아비 같은 군대임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도 신령한 영안을 달라고 하자. 하늘에서 보이시는 것을 본 사람이 되도록 눈을 열어 달라고 매달리자. 전쟁의 위기가 아무리 크고 내 집, 내 도성, 내 장막이 다 동서남북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용기의 축복을 누린다. 
  

둘째,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사람이 무지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왕하7:1~2)

아람 왕 벤하닷 때 사마리아가 포위를 당했다. 사마리아는 식량이 공급되지 않으므로 경제가 파국을 맞아 물가가 하늘만큼 솟았다. 이때 엘리사는 왕하7:1에서 잘 되는 정상 물가의 말이 온다고 전한다. 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 때쯤이면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이는 장정 4일 품삯이다. 식량이 없어서 비둘기 똥을 사분의 일 값에 은 다섯 세겔하던 경제 고통이 회복이 되고 정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예고에 대해 사마리아 장관 한 사람이 비웃고 조롱한다. “아니 하나님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정말 먹을 것이 없어서 아들까지 삶아 먹는 기아에 허덕이는 이때 하루만에 물가가 내려간다는 것은 불신앙의 사람에게는 이해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사람과 어리석은 장관의 차이는 듣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경험만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여호와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의지하여 말씀을 따라 말을 한다. 그러므로 똑같을 수 없다. 세상 사람이 경험을 가지고 금년 경제가 어렵다, 쉽다, 해결된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대학교에 수백, 수천명의 박사들이 있어도 해결될 때가 아니면 이들이 소용없다. 하나님의 사람은 오직 하나님이 산다고 해야 산다고 동의한다. 세상 사람이 다 죽는다 해도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죽는다고 말씀하지 않는 이상 우울한 소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에 모든 상황 판단의 근거를 둔다. 우리의 귀가 말씀 듣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만이 불황의 시대를 사는 희망이다. 

그날 저녁 아람 군대는 군대 소리를 듣고 도망을 간다. 전쟁이 종료되고 봉쇄된 삶이 풀어졌다. 물가는 내리고 경제가 정상이 되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이루어졌다. 말대로 되어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에게 초점을 두고 그분이 들려주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 뿐이다. 듣는 귀를 가진 사람이 되자. 경제적 궁핍이 삶을 흔들 수는 없다. 다 당황하는 속에서도 길을 말할 수 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람은 듣는 이도 모르는 장차 되어질 일을 전한다. (왕하8:12)

왕하18:15을 보면 엘리야는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 사명의 계승이 엘리야의 후계자, 엘리사에게서 이루어진다. 왕하8:12을 보라. 하사엘을 만나게 된 엘리사가 운다. 우는 선지자로 인해 “어찌하여 우시나이까?”라고 묻는다. 엘리사는 대답한다.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한 모든 악을 내가 앎이란 네가 저희 성에 불을 놓으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매어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 

하나님의 사람은 사명을 계승하여 되어질 일을 예언한다. 그때 하사엘은 “개같은 종이 무엇이관대 이런 큰일을 행하리이까?”라고 한다. 불신앙의 사람은 내일 일을 말할 수 없다. 그러기에 질문을 가질 뿐이다. 자기 자신이 자신의 일을 모른다. 그때 엘리사는 “네가 아람 왕이 되리라. 하나님이 알게 하셨느니라.” 장래 일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님의 사람에겐 통보된다. 

우리도 하나님이 뜻을 보여준다면 어찌 예언하지 못할 것인가? 하나님의 사람은 불신앙의 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신령한 것에 열려 있다. 듣는 본인 자신도 모르는 장래 일을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 속에 살면서 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지 못하는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겠다는 열정을 갖자.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선명한 목표를 정하자. 정말 엘리사의 열린 눈, 불 병거를 보는 눈이 열린다면 정말 엘리사의 듣는 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있다면, 정말 엘리사의 입술, 장래 일을 언급하는 입술이 있다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피할 것을 피하고 취할 것을 바로 취하는 크리스챤이 될 것이다. 세상 사람과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신앙 생활은 죄와 불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변론과 언쟁, 투기와 분쟁, 훼방과 악한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원망과 좌절에 묻혀 사는 것도 아니다. 이런 악한 것들을 피하고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 없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기이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 갑절의 영감받기가 제일 중요하다. 간절히, 끈질기게 신령한 영감을 사모하여 우리들 모두 하나님의 사람이 되자. 

세상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자가 되자.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이 시대의 힘이다. 오감으로만 사는 세상에 계시적인 영감으로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어야 전쟁의 위기, 경제의 궁핍, 해야 할 미래의 사역이 제대로 극복되고 진행된다. 하나님의 사람, 그 사람이 되는 것이 시대의 빛이고 희망이며 축복이다. 우리가 신령한 것에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린 사람이 되면 교회는 악한 마귀가 손 못대는 전초기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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