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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의 반석 위에 세우는 공적 (고전 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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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반석 위에 세우는 공적 (고전 3:10~15)


오늘은 영적 성숙을 향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드리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교회들마다 뜻이 있고 부르기도 좋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부산에서부터 내려오는 족보를 한참 설명해야 알겠다고 합니다.  우리 노회 안에도 참으로 세련되고 예쁜 이름을 가진 교회들이 있습니다.  좋은이웃교회, 함께하는 교회, 하늘비전교회, 하늘소망교회, 교회 이름들이 꿈과 소망을 주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주로 지역 이름을 따서 교회 이름을 지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교회는 지역의 이름을 따서, 예루살렘교회, 안디옥교회, 로마교회, 고린도교회, 에배소교회, 빌립보교회 등등 모든 교회들이 지방도시의 이름을 사용하여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지역에 교회가 여러개 생기다보니, 제일교회, 제이교회, 제삼교회 그런 식으로 이름을 지었고, 우리는 제사의 교회라는 이름이 싫으니, 중앙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가진 이름대로 살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영광 돌린다는 교회가 가장 영광을 가리기는 교회도 있고, 영원한 즐거움이란 교회가 불편한 교회요, 싸우는 교회로 전락하여 교회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평안한 교회가 심히 불편한 교회가 되기도 하고, 예수님의 교회라는 교회가 사람들의 집단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좋은 교회를 만들어가야 하고,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가야 합니다. 성숙한 제자들은 주님을 닮아가고 따라가는 사람들이요, 자기를 부인하면서 내려놓는 사람이요, 자기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사람은 자기 성품이라는 집, 인격이라는 집, 자기의 신앙이란 집, 모든 사람은 하나의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 하나의 아름다운 집을 짓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집이란 우리가 들어가 살아가는 가옥을 넘어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집이란 눈에 보이는 가옥을 말하기도 하지만, 집이란 우리가 직접 지어가야 하고, 완성해야하고, 항상 보수해야 하는 우리의 인생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류역사는 집을 짓는 역사라고 말합니다.  개인의 생활도 하나의 집으로, 사회생활도 하나의 집으로,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도 하나의 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의 인생을 산다고 할 때에 하나의 집을 건축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집이 셋이 있어야 한다.  가정의 집, 교회의 집, 영원한 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주에 있는 피사성당 정원에 있는 사탑(종탑)이 있습니다. 흰 대리석으로 된 둥근 원통형의 8층탑으로, 높이는 58.36m이고 무게는 1만4453톤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피사의 사탑은 지반이 약한 곳에 세워졌기 때문에 1174년에 건축할 때부터 조금씩 기울어지더니 현재는 5.4m나 기울어져 붕괴의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1차 공사할 때에 지반의 약함이 발견되었습니다. 보강한다고 하였지만 계속 기울어져, 2008년 기준 기울기의 각도는 중심축으로부터 약 5.5˚가 되었습니다.  

서울에도 이제는 100층이 넘는 건축물들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용산에도 상암동에도 잠실에도 세계적인 건물들이 들어설 것입니다. 그런 고층건물들이 들어설 때에, 기초공사하는 것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지상에 드러난 건물만이 아니라, 지하에 숨어 있는 기초가 더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1.  인생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10-11)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주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터전이 되어주십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라는 말은 현명하고 빈틈없는 사람으로 여러 건축가들을 거느리고 있는 도목수라는 말입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의 기초를 놓아주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를 놓아주었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시며,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바른 신앙고백 위에 세워지는 교회입니다. 시몬베드로가 주님을 향하여 그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우리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7-18)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반석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베드로라는 이름의 뜻이 반석인데, 그러면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말씀입니까?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을 말하는 것입니까?  

가톨릭교회에서는 마태복음16:17을 해석하면서 베드로가 반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황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구교에서는 사제가 교회의 기초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의 초대 교황이라고 하면서 현재의 교황 베네딕트 16세는 265대 교황입니다. 교황이 교회의 기초요 반석이라고 하면 그들 교황 중에는 성경을 잘못 해석한 사람도 있고, 교회를 바르게 치리하지 못한 분도 있고, 교황청이 둘로 나뉘어져 세 사람의 교황이 있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교황이 교회의 초석이 될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기초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가 고백한 것은 예수님은 누구시냐 하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바른 신앙고백이 바로 교회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11)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고전10:4에서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신령한 반석이 되시고 예수님 자신이 교회를 세우시는 반석이 되십니다. 우리 주님은 만세반석이 되시기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베드로도 예수님은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는 터전이 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행4:11-12에서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버렸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쓸모없다고 보았는데, 이제 새로운 집, 하나님의 교회라는 집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전은 은혜의 선물이지, 절대로 대가를 주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뤄놓으신 것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이미 우리에게 복음으로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오로지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인류를 구속하는 큰 사랑은 우리가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어떤 노력도 필요 없습니다.  

엡2:8-9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구원입니다. 거저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값없이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이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큰 사랑으로 우리는 값없이 구원받았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생명, 영원한 진리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얻은 것보다도 더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이 구원받는데 있어 우리도 일조한 부분이 있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오직 은혜로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 있기만 하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반석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 위에 집을 세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 고전3:12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집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너무나 엄청난 감격이요, 큰 사랑이었기에 집을 세우는 재료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요즈음은 건강에 초미의 관심을 가지고 있기에, 황토흙집을 짓기도 하고, 순수한 목재만으로 집을 짓는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노후에는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흙을 벗 삼아 조그만 텃밭을 일구면서 여유와 느림의 철학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흙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쳤던 것이 황토였는데, 황토가 우리 몸에 좋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되고 있습니다.  

자, 우리는 어떤 재료를 사용하여 집을 지어갈 것입니까? 이 세상에는 금, 은, 보석으로 집을 짓는 사람들은 없을지라도 신앙의 세계에서 보면 금, 은, 보석으로 집을 짓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생에 신앙과 인격의 집을 짓는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완성을 목표로 하여 쉽게 건축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일생에 걸쳐 하나의 집을 짓기에 꾸준히 자기를 다스리면서 성실을 지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가보니 뚝딱 하고 집을 완성하였는데, 나무 가지를 엉성하게 얽어매고 풀을 엮어 시원해 보이는 원두막을 지었습니다. 이런 집이라면 한 여름 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집에서 비바람, 눈보라 맞으며 일생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금이란 재료는 아무래도 가장 값비싼 재료임에 틀림없습니다. 성경에도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을 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시편119:127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을 금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금은 믿음을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벧전1:7을 보면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금, 은 보석이란 재료는 신앙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재료들입니다. 믿음이나, 소망이나, 사랑과 같은 보배로운 신앙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은이란 곧 돈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값지고 단단한 것으로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나무나 풀이나 짚 같은 재료는 약하고 쉽게 불타 없어질 것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재료를 가지고 집을 짓고 있습니까?   금을 붙잡고 계십니까?  은을 드리고 있습니까?  


3.  불에 타지 않는 공적이 있어야 합니다.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13) 

공적이라고 하면, 인간의 행위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심판의 때에 평가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공적을 드러내주는 사건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하는 날이 반드시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신앙 생활한다고 하였는데, 조금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흔들어보면 그의 신앙의 진가를 알게 됩니다.  교회가 중요한 일을 결정해놓고, 교인들에게 다소 경제적인 부담을 주어봅니다. ‘아, 예수 믿는 것은 좋은데, 예수도 돈이 있어야 믿을 수 있다’면서 낙심한다면, 불같은 시험에 낙방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오늘은 비록 앞장서지 못하고 겨우 이름만 짓고, 참여하지만 앞으로 하나님께서 힘주시면 나도 더 큰 짐을 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겨나가야 합니다.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감당하면서 따라붙어 나가야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안수집사도 되고, 장로도 되는데, 나는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이 교회를 몇 십 년 다녀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불같은 시험에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잘못하면 공적이 나타나는 것이 없고,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보다 우리 하나님이 알아주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봉사를 기뻐 받으시기에 좀 더 성숙한 봉사자가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성실을 다하고, 시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무엇으로 흔든다고 하여도 내 신앙은 어디까지나 나의 신앙이요, 내가 무엇 때문에 요동하거나 주저앉는다면 지금까지 우리의 신앙은 그냥 풀이요 짚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육신의 이 장막을 벗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에,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그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양보할 수 없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우리의 일생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을 다 하고 물질을 다 드리면서 금과 같이 은과 같이, 보석과 같은 믿음으로 살았다고 하여도 그것은 감사의 조건이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그것을 무너뜨리려고 하면 자기 공로로 구원받는 사람이요, 자기 행위로 구원받아 자랑하려는 사람이 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되고,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그는 최선의 것으로 주님 사업을 위해 헌신할 것이요, 자기 신앙의 집을 금과 은과 보석 같은 재료를 사용하여 건축할 것입니다. 우리는 똑 같은 영생의 터전 위에, 곧 예수 그리스도 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고 간절하기 때문에, 그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 부끄러운 모습으로, 불구덩이에서 건져낸 나무토막 같이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설 사람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대로 주님 앞에 선다면, 구원받은 것마저 하찮은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사랑은 이 세상에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랑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에 상 받는 자리에 서는 사람들이 있고, 부끄러운 구원받는 사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무조건적인 사랑, 한없는 사랑, 큰 사랑을 보여주셨기에 나도 최선의 것으로, 나도 보답하는 심정으로, 나도 주님의 손에서 쓰임 받겠다는 사랑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오늘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던 그런 사도바울이 은혜와는 전혀 반대되는 공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았지, 공적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 관계를 잘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나 공적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공적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신 줄 압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옥토에 씨를 뿌렸습니다.  어떤 밭에서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같은 옥토인데, 어떤 이는 100배의 결실을 가져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내십시오. 천국은 침노하는 사람들이 빼앗고 차지하는 나라입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집을 짓는 사람이 금과 은과 보석과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집을 짓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금과 같은 믿음과 은과 같은 소망과 보석과 같은 사랑으로 헌신적인 삶을 사는지,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갈 것 같으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믿어보자는 식으로 믿는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 주님이 아시고 우리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말씀의 사람으로, 헌신의 사람으로 살아가는지, 아니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살아가는지는 자기 자신이 잘 아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주님에게 맡기고 주님을 닮아가려고 힘쓰지 않으면,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추구하게 되고, 쾌락을 따라가다가 악의 종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은혜받은 사람들입니다. 은혜가 진정 은혜 되기 위해서는 은혜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림으로, 우리 주님의 손 안에서 금과 같이, 은과 같이 보석과 같이 쓰임 받고, 주님의 몸을 이루시면서 천국의 확장을 위하여 소중한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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