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마당만 밟을 것인가? (사 1:10~18) - 예배

  • 잡초 잡초
  • 891
  • 0

첨부 1


마당만 밟을 것인가? (사 1:10~18) 


여러분,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자는 세상에 대단한 업적을 남기는 것은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예배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인간의 활동 중 가장 위대한 활동(the greatest activity)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배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들은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어디까지나 인간 차원의 일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신적인 차원의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배는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특히 우리 신앙생활에서 예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예배는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전도도 중요하고, 봉사, 교제, 그리고 선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예배의 연장이며, 넓은 의미에서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배는 신앙과 삶에서 최우선 순위(the first priority)이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배에서 성공하면 인생에서도 성공합니다. 반대로 예배에서 실패하면 인생에서도 실패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을 살펴보면 이런 사실이 분명히 확인됩니다. 그중에 예배에서 성공해서 인생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누굴까요?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12장 보면,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곳에 땅 한 평도 자기 이름으로 등기된 게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담합니다. 그는 실망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가는 곳마다 감사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제단을 쌓는 것은 그 당시 예배 방식입니다. 

창12:7~9 보면, 그가 움직일 때마다 제일 먼저 예배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7 ...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이와 같은 아브라함 예배의 하이라이트는 모리아 산에서 제단을 쌓아놓고 이삭을 번제로 드린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결정적인 순간에 중지시켰지만, 아브라함으로서는 이삭을 이미 바친 겁니다. 이것은 최상의 예배였습니다. 가장 소중한 독자 이삭을 바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배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그리고 인류 역사를 보십시오! 아브라함보다 인생에서 성공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 있는지! 그는 예배에서 성공하고, 인생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여러분, 2백 개가 훨씬 넘는 전 세계 국가들 가운데 가장 잘 사는 나라가 어디입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국이죠. 장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전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역사가 얼마나 짧습니까? 초대 워싱턴 대통령을 기준으로 하면 220여년, 청교도가 메이 플라워 호 타고 신대륙에 상륙한 것을 기준으로 해도 4백 년이 채 안 됩니다. 

그런데 미국이 어떻게 그렇게 됐을까요? 그 비결은 예배의 성공에 있습니다. 예수 잘 믿고 예배 잘 드리는 조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교도가 처음 상륙했을 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습니까? 먹고 사는 문제와 안전 문제가 시급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예배 드리고, 예배 드릴 교회당을 지은 겁니다. 그 다음에 학교 짓고, 나중에 자기들이 살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제일 먼저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금은 그 전통이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아직 곳곳에 그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그 덕분에 가장 부강한 나라를 이룩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 한국도 이만큼 잘 살 게 된 게 예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짧은 역사 속에서 한국교회 부흥의 기적과 한강의 기적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입니다. 그 배경에는 한국교회의 예배에 대한 열심히 있습니다. 교회 안에 얼마나 예배가 많습니까?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도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예배합니다. 하나님이 이를 기뻐하신 겁니다. 

오늘 본문은 이와 정 반대로 구약 이스라엘이 어떻게 멸망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한 마디로 예배의 실패 때문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아무쪼록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특히 바른 예배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재확인하는 기회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배에서 성공함으로 인생에서 성공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이사야서는 주전 8세기에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한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북 이스라엘 왕국은 이미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남 유다 왕국이 남아 있었지만, 국제 정세가 위협적이었습니다. 앗수르 제국이 버티고 있고, 한편으로는 신흥 강국인 바벨론이 새로운 위협으로 대두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배반한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이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본문 1장을 보면, 그들의 예배 실패를 통렬히 질책하십니다. 예배의 성공은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유다 백성의 예배를 거절하고 계십니다. 


[1] 하나님이 받지 않는 예배 : 형식적인 예배

여러분, 하나님이 왜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그들의 예배는 형식적인 예배였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꼬박 꼬박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참 예배자가 아니라, 위선이 가득한 자들이요 사악한 자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10절 보면, 그들을 가리켜 심지어 뭐라고 표현하십니까? 소돔과 고모라 사라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소돔과 고모라는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도시들로 심각한 죄악으로 인해 유황불 심판을 받고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의 상징입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이 얼마나 사악한지 소돔과 고모라 백성이 비견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들의 예배가 도대체 어떠했기에 그토록 신랄하게 책망하셨을까요? 형식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저히 받으실 수 없는 예배였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① 마음이 없는 예배 :

첫째는, 마음이 없는 예배였습니다. 겉모양은 갖추었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사랑의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11절~12절을 보시죠.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그들의 형식적인 예배를 가리켜 뭐라고 표현했나요? ‘마당만 밟는 예배’라고 불렀습니다. 허탕 쳤다는 뜻입니다. 

이런 예배의 모습을 사29:13에서는 단적으로 이렇게 지적합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 ” 

오늘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런 겁니다. 성경을 척척 찾고, 기도도 잘 하고, 찬송 시간에 잘 따라 부르고, 설교 시간에 정숙하게 앉아 있고, ... 그러나 몸은 와 있지만, 마음은 전혀 다른 데 가 있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실한 마음이 없이 기계적으로 건성으로 예배에 임하는 모습입니다. 

옛날에 극장 구경 간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오래 전에 시골 영감님 서울에 자식들 보러 올라 오셨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모두 바빠서 모시고 다니지 못합니다. 죄송해서 용돈을 드리면서 극장 구경이나 하고 오시라고 햇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보니까 돈이 그대로 있는 겁니다. 이상해서 물었더니 영감님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얘, 서울 사람들 약아빠진 줄 알았더니 참 어리석더구나. 내가 30분이나 여기 저기 둘러보았는데 돈 받을 생각도 안 하더라. 나도 굳이 낼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왔지 뭐.” 극장 구경은 했는데 정작 영화 구경은 못한 겁니다. 마찬가지 예배당 구경은 했는데 얼마든지 예배는 드리지 못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② 삶이 없는 예배 :

두 번째는, 삶이 없는 예배입니다. 신앙은 마음 속에 있지만 행실로 나타납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중요한데, 더 나아가 삶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예배 드릴 때의 진실한 모습이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만일 예배 시간에는 그럴 듯한데, 삶은 엉뚱하게도 악으로 가득하다면 이야말로 큰 모순이라는 겁니다. 

15절~16절에 보면 유다 백성의 모순적인 모습을 지적합니다. “ ...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16 ...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그들은 삶 속에서 거짓과 사기, 폭력과 살인, 사악한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그들의 삶을 뻔히 보고 게신 하나님으로서는 그들의 예배가 아무리 겉으로 번듯해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13절~14절 보면, 구체적으로 그들의 예배를 열거하며 책망합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burden)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I am weary of bearing them)” 그런 모순적인 예배는 가증스러워서 바라보기도 지쳤고 아주 지겹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해야 되는 것처럼 예배와 삶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신행일치(信行一致)도 중요하고, 예행일치(禮行一致)도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가증스럽고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예배가 정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 다시 말하면 열납하시는 예배가 되도록 유의해야 됩니다. 열납(悅納)이란 말은 호감을 갖고 좋게 본다(look with favor), 기쁘게 받아들인다(accept)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열납하실 만한 예배가 아니면 거부하십니다. 인간은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말1:10 보면 심지어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 하리라” 아예 성전 문을 닫아걸고 싶으실 정도라는 겁니다. 


[2] 형식적인 예배의 폐해 : 축복 대신 저주 

이처럼 예배가 형식적인 게 됨으로 예배에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는커녕 거꾸로 진노가 임한다고 경고합니다. 15절 보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유대인은 손을 내밀면서 기도하죠. 아무리 예배하고, 간절한 모양으로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인간의죄는 영적인 절연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단절 시킵니다. 사59:1~2 “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하나님과 통해야 축복을 받든지 은혜를 받든지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아무런 은혜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꽉 막혀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심령이 병들고, 더 나아가 생활이 엉켜버리고, 마침내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유다 왕국이 이래서 멸망한 겁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엘리 제사장 아닙니까? 그는 제사장이었지만,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귀히 여기지도 않고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그 자식들은 더했습니다. 그들 역시 제사장직을 세습했지만, 제사를 훼방합니다. 제물을 가로채고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을 범하고 ...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짓을 저지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삼상2:30 “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하나님이 경멸하시면 이야기가 끝난 것이죠. 그런 인생이 어떻게 형통할 수 있겠습니까? 엘리는 완전히 패가망신하고 말았습니다. 블레셋과 전쟁에서 패함으로 나라도 망하고, 온 가문이 멸절됩니다. 

여러분, 예배에 실패하는 게 이렇게 심각한 겁니다. 우리의 예배 생활은 어떻습니까? 혹시라도 마당만 밟는 예배, 헛된 예배, 그래서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고 축복하시지 않는 죽은 예배는 아닌지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모습이 있다면 빨리 시정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예배의 회복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축복이 회복됩니다. 


[3] 예배의 회복 : 축복의 회복 

예배가 회복되면 축복이 회복되는 것, 이건 원리이며 공식입니다. 딱 떨어지는 진리입니다. 우리 삶이 왠지 답답합니까? 뭔가 꽉 막혀 있습니까? 열심히 사는데도 뭐가 잘 안 됩니까? 하는 일마다 자꾸만 꼬입니까? 그러면 우리 예배를 잘 점검해 보십시오! 그리고 예배의 회복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흠향하실 만한 예배,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은혜가 넘치는 산 예배로 새롭게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비유하자면 이런 겁니다. 조화와 생화의 차이입니다. 얼른 보면 조화도 그럴 듯합니다. 어느 때에는 더 화려합니다. 하지만 조화에는 은은한 향기가 없습니다. 생화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풍깁니다. 우리의 예배에서도 향기가 풍겨야 합니다. 

① 마음의 향기가 있는 예배 :

먼저 마음의 향기가 있는 예배여야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마음의 향기가 생길까요? 우리 안에 있는 죄를 회개하고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영혼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납니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마음이 정결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 앞에 에배할 때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해야 됩니다. 회개하는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18절 보십시오! 18절. “ ...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은 유다 백성이 사악하고 예배에 실패하고 있지만 포기하지 않으시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호소합니다. 그들의 깨끗하게 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참 에배자로 변화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이 깨끗한 심령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바라고 기다리시는지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죠. 요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는 깨끗한 심령으로 성령을 의지하며 말씀을 사모하며 드리는 예배자입니다. 이런 참 예배자를 하나님께서 애태워 간절히 찾으십니다. 이런 예배를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집중력과 정성입니다. 마음을 쏟는 겁니다. 

어느 목사님의 글을 보니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흔히 성도들이 에배 시간에 범하기 쉬운 실수들을 정래한 겁니다. 설교시간에 강단 멀거니 응시하는 멀대파(눈은 보고 있는데 생각은 딴 데 출장 가 있는 경우), 주보로 밑줄 그으며 교정까지 보는 꼼꼼파, 졸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아멘파, 수시로 시계 보는 안절부절파, 옆 사람과 글로 대화하는 청각장애파, 예배 후 할 일만 생각하는 염려파, 설교 시간이 혼자 성경을 읽는 나홀로파, 찬송 부를 때 입만 벙긋대는 금붕어파, 기도 시간에 살짝 잠을 보충하는 기회주의파, 누가 왔나 안 왔나 두리번 거리는 경비파, 마음을 집중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순정파, ... 한 가지라도 해당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우리는 순정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담긴 향기로운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② 삶의 향기가 있는 예배 : 

또한 우리 예배에 삶의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예배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게 무엇입니까? 16절~17절.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악한 행실은 버리고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에배가 제대로 드려질 수 있다는 겁니다. 

마더 테레사가 한번은 거리의 고아를 도와주면서, 목마른 아이 물 한 컵 주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이 그녀를 칭송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주님께 예배하고 있습니다. 칭찬받을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런 예배를 가리켜 생활 예배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롬12:1~2에서 설명합니다. “1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그것 자체가 예배라는 겁니다. 이런 예배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십니다. 

이와 같이 마음의 향기, 사람의 향기가 담긴 예배로 회복되면 심령이 회복됩니다. 그리고 생활이 회복되고, 더 나아가 인생이 회복됩니다.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요삼2이 바로 그런 원리를 언급하는 말씀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예배에서 성공하면 영혼이 회복되고 잘 됩니다. 그러면 생활의 범사가 잘 됩니다. 계속 그렇게 살다 보면 인생이 복스러워집니다. 그리고 존귀해집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인생의 성공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이 시간 한번 우리 자신의 예배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성숙해지는 면도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습관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성전의 마당만 밟는 안타까운 모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손해가 큽니다. 인생 전반에서 손해 보게 됩니다. 기왕에 신앙생활 하는 것 그러면 안 되겠죠.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예배에 성공함으로 인생에서도 꼭 성공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