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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자 (삼상 19: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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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자 (삼상 19:8~17)

 
지난 주간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큰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군포 여대생 살인범 강호순(38)은 2006년 12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2년간 경기서남부 지역에서 실종된 부녀자 7명을 모두 살해해 암매장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이럴 수가 있을까?’ 

조선일보는 2009년 1월 31일자에 ‘그에게 영혼이 있는가?’라는 표제를 달았습니다. 
도저히 생각을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사이코패스’라는 것은 반사회적인 인격 장애를 말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전혀 배려하지 않습니다. 
죄의식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죄를 지으면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구나.’를 생각하니 참담해집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추적하고 있습니다. 
삼상18장에서는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시도가 은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사울 왕은 다윗에게 맏딸 ‘메랍’을 줄 테니까 전쟁터에 나가라고 부추겼습니다.
 
삼상18:17절에 보면 이렇게 다윗을 부추긴 이유는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말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 손에 피 묻힐 필요 없이 전쟁터에 내보내 스스로 죽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랬던 것이 삼상19장에서는 다윗을 죽이려는 시도가 노골적이고 공개적이 됩니다. 

삼상19:1절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 왕은 다윗을 추적하여 잡아오라고 군사를 파견합니다. 
사울 왕은 추적자가 됩니다. 

본문에는 히브리어 두 단어가 아이러니하게 겹쳐집니다. 
‘죽이다’는 히브리어 ‘무트’와 그 죽임을 ‘일러주는’ ‘나가드’라는 단어입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삼상19장에서 쏟아지는 ‘죽임’이라는 단어를 보십시오. 
1절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2절 “그가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 사울이 너를 죽이기로 고하시느니라.......” 
6절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 
11절 “사울이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15절 “........그를 침상 채 내게로 가져오라 내가 그를 죽이리라.” 
17절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하니라.” 

그런데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과 사울 왕의 딸 미갈은 그 사실을 다윗에게 ‘일러주어’ 살리려고 합니다. 

2절 “그가 다윗에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 사울이 너를 죽이기로 꾀하시느니라........” 
11절 “사울이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일러 가로되........” 

아비 사울 왕은 계속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번번이 그의 아들과 딸은 그 음모를 알려 살리려 했습니다. 
아이러니하지 않아요? 

독자는 행간에서 ‘자식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한 아버지,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라는 사울 왕을 향한 비웃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다윗이 죽을 짓을 했습니까?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의 항변을 들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4-5절입니다. 
“요나단이 그 아비 사울에게 다윗을 포장하여 가로되 원컨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다윗은 죽을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히려 다윗은 사울 왕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고 전쟁터에서 싸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1. 우리는 여기서 ‘미움’에 대하여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원수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원수를 맺게 되는 것은 나쁜 ‘상대’가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내 마음속에 그 대상에 대한 나쁜 ‘감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쁜 상대’라는 말과 ‘나쁜 감정’이란 말을 비교해보십시오! 
엄밀하게 말해서 문제가 있다면, 나쁜 상대방이라기보다는 내 마음속에 있는 뒤틀려진 감정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한테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해를 입혀도, 그래서 원수질만한 일을 해도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책을 쓴 안이숙씨처럼 ‘그럴 수도 있잖아요?’라고 생각하면 문제가 안 됩니다.  

‘젊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 뭐!’ ‘화가 나서 한 말이니 그럴 수도 있지 뭐.’ ‘경험이 없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뭐,’ ‘천사가 아니고 사람인데 그럴 수도 있지 뭐.’ ‘높은 사람이니 그런 말 할 수 있지 뭐.’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섭섭하지도 원망스럽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원수가 맺어지겠습니까?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을 보세요! 
요셉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해석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요셉은 형들의 시기심 때문에 17살 때 애굽 땅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 어린 것이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락날락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애굽의 총리가 되잖아요.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구하려고 애굽 땅에 내려왔습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요셉의 형들은 총리가 된 요셉 앞에서 양식을 구걸하게 됩니다. 
요셉이 원수라고 여겨질 만한 형들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창세기 45장 4~5절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형들은 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겠어요?)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참 놀라운 믿음이지요?)” 

요셉은 사람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서-정신적으로 상처를 받거나, 신체적으로 상해를 받거나, 물질적으로 손해를 입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원수 같은 형들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일은 고사하고 말 한마디라도 ‘그럴 수가 있어?’라고 내 감정이 꼬부라지면 원수가 맺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따라합시다!  
“원수가 맺어지는 것은 저 사람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이 나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저 사람이 나쁘다고 항변을 해도 성경적으로 보면, 내 마음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삶을 살면서 미운 대상이, 미운 이웃이 생길 때 그 사람을 거울삼아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잘못된 감정, 미워하는 마음, 꼬부라진 감정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가슴을 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용서하옵소서. 내 마음이 꼬부라지니 만사가 꼬부라져 보입니다. 내 마음에 사랑이 없느니 사람들의 말 한마디, 걸음걸이까지 듣기 싫고, 보기 싫어집니다. 용서하옵소서.” 


2. 어떤 사람이 나에게 정신적인 상처를 입히고, 신체적인 상해를 입히고, 물질적인 손해를 입혔을 때 즉 악을 행했을 때 성경은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롬12:17절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은 남에게 복수하는 어떤 행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 깊숙이에 있는 감정까지를 말합니다. 
즉 복수심, 미움까지를 의미합니다. 
미움의 감정은 내 마음속에서 마귀와 내통할 수 있는 무서운 복병입니다. 
이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어떤 사람이 나에게 악을 행했을 때 복수하려는 마음도 갖지 말고, 복수하려는 행동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하나님께 맡기라. 

롬12:19절을 같이 읽어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성경에 보면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신 32:35절 “보수(보복하는 것)는 내 것이라........” 
시 94:1절 “여호와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소서.” 
히 10:30절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여러분이 직접 보복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삼하 16장에 보면, 다윗 왕이 그 아들 압살롬의 궁중반란으로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감람산 기슭으로 도망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얼마나 화급했으면 왕이 신발도 신지 못했겠어요? 

삼하15:30절에는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창피스러우면 얼굴을 가리지요?) 맨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 가니라.” 

다윗이 도망가는 길에 ‘시므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돌을 던지며 다윗을 저주합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삼하16:7)” 

이 말은, “그렇게 남을 많이 죽이더니 꼴좋다. 썩 꺼져라 이놈아!” 이런 얘기입니다. 
다윗이 이 조롱하는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왕이었을 때에는 찍 소리 못하더니 지금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고 당장 대놓고 저주하는 이 사람에 대하여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보다 못한 ‘아비새’라는 장군이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라고 주청합니다. 

그 때 다윗이 한 말이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삼하 16:11-12절 “.......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다윗은 원수 갚는 것을, 보복하는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의 태도를 귀히 보셨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인격에 감화를 받아 더욱 충성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다윗이 이 저주하는 소리를 듣고, 분에 못 이겨 “당장 잡아 죽이지 못하고 무얼 하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면 어떤 결과가 왔을까요? 
신하들은 ‘역시 여기까지가 다윗의 한계로구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어요? 
그렇게 되었다면 다윗은 광야의 외톨이가 되어 울부짖는 여우처럼 살다가 죽었겠지요? 
보복은 여러분이 직접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2) (악을 행하는 자에게) 선대하라. 

롬12:20절을 읽어봅시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사람으로서는 참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니” 이런 일은 사람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에 보면, 원수를 선대하라는 것입니다. 
잠 25:21-22절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오.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출 23:5절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잘됐다! 쌤통이다! 하지 말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릴찌니라.” 

눅 6:27-28절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삼상 24장에는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다가 엔게디 동굴에 숨어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이 백성에게 인기가 올라가자 사울왕은 질투심에 못 이겨 다윗을 죽이려고 좇고 있습니다. 
다윗이 엔게디 동굴 깊숙이에 숨어 있는데 사울왕은 그 동굴에 다윗이 있는 줄도 모르고 용변을 보려고 들어왔습니다. 
긴장을 풀고 용변을 보고 있습니다. 

그때 다윗 주변에 있던 추종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지금 사울을 처치하십시다! 
그때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원수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사울의 겉 옷자락만 살짝 베었습니다. 
큰 사람이지이요!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사울이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삼상 24: 17절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사울이 다윗의 인격 앞에 굴복합니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다.” 
이 말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야 할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원수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에게 미운 대상이, 미운 이웃이 생길 때 그 사람을 거울삼아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잘못된 감정, 미워하는 마음, 꼬부라진 감정을 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기 가슴을 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직접 원수 갚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선대하십시오. 
하나님이 갚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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