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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인 예배를 회복하라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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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예배를 회복하라 (롬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 영적인 삶의 출발은 변화입니다.

한동안 renovation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어느 굴지의 그룹 회장은 회사의 혁신을 강조하면서 마누라를 제외하고는 다 바꾸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도 이 혁신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이 단어가 깊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의 [변화]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ανακαινωσις (아나카이노시스)도 바로 이 단어 Renovation 즉, “새롭게 하다”, “변화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 혁신, 변화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다른 곳에 있다.
Renovation이라는 영어 단어는 Renovatio 또는 Renovare라는 라틴어 단어에서 파생되었는데 그 뜻의 또 다른 의미는 바로 부활이다.

부활이란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저 깨끗하게 빨아서 쓰는 것도, 리모델링도 아닌 새로 짓는 것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늘 새로워지고, 늘 변화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셨는가?
영접은 아주 간단하다.
그 분을 나의 구주로 모셔드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나를 바꾸지 않고는 영접할 수가 없다.
나는 가만히 있으면서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실 수는 없는 것이다.
영접하는 일은 정말 수많은 변화의 산물이다.

영접하는 이는 먼저 내가 믿고 있던 어떤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하다는 1차적인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나의 구주 삼는 일은 그저 얼렁뚱땅 되는 일이 아니다.
이런 1차적 변화는 이제 마음 문을 열겠다는 변화를 일으키고 또 내가 주인이었던 마음의 의자를 예수 그리스도께 내어 드리는 놀라운 변화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영접은 내 영적 변화의 결과물이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고난이 있다.
그 고난이 우리를 아프게 하고 힘겹게 하지만 다른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변화를 촉구하는 두드림이다.

오래전 한 집사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집사님은 첫 눈에도 삶의 찌든 흔적이 역력할 정도로 얼굴이 초죽음 상태였다.
그가 한 때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사였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놀랄 정도였으니...

그 분과 상담을 하는데 그분은 삶의 희망이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예수 잘 믿었던 집사님은 교사로 잘 나가던 시절 남편을 만났다.
중매였지만 좋아서 결혼했던 남편이 속을 썩이기 시작한 것은 얼마가지 않아서였다.

남편은 사업을 한다며 이 일, 저 일을 기웃거렸는데 사업의 번성은 커녕 집에 빚더미만 안겨주었다.
결국 집사님은 남편 때문에 신용불량자로 교사생활도 접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현재는 학원강사로 여전히 남편의 빚더미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집사님이 즐거울리 없다.
집사님의 한 가지 소원은 빨리 죽는 거였으니 할 말 다하지 않았는가?

나는 그 집사님께 “왜 이런 고난을 하나님께서 제게 주시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기도하게 되었다.
나도 너무나 이해되지 않고 궁금했던 사항이라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기도했는데 주님은 내게 새로운 생각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그 집사님께 말씀하신다는 느낌이어서 나는 주저 없이 집사님께 말했다.
나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2가지였다.

첫째, 주님은 남편을 그의 자녀로 삼고 싶은데 그 일을 감당할 아내로 당신을 보내셨다면-당신은 전도자.

둘째, 이제껏 탄탄대로 마음먹은 대로 살아왔던 인생인데, 거기에는 간절함 없어 나는 할 수 없는 일을 통해 오직 주님만을 붙들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면. -당신은 진정한 예배자.

이 후에 집사님은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뛰어 들었다.
집사님은, 자신은 오직 남편 한 사람을 위해 주님께서 보내신 특별한 전도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남편의 마음과 영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채 2년이 가지 않아서 남편은 변화되었고, 그는 지금 자신의 교회 새신자를 위해 헌신하는 귀한 집사이다.

전도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불이다.
마음의 변화는 인생의 결과를 바꾼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변화를 위해 우리의 문을 계속 두드리신다.

당신은 그리스도께 당신의 죄를 고백하는 회개의 사람인가?
회개 또한 변화의 산물이다.
회개는 떠벌이는 것, 나열하는 것, 까발리는 것 정도가 아니다.
회개는 바꾸겠다는 나의 결단이다.
다시 말해서 회개는 변화인 것이다.

지나 온 삶을 하나님께 비추어 잘못을 고백하고 인정하는데만 그치는 것이 회개가 아니다.
회개는 그 잘못된 삶을, 잘못된 행위를 바꾸겠다고 선언하는 일이다.
회개는 내 마인드를 바꾸는 영적 변화를 말한다.

나는 인생의 고비 때마다 영적 변화의 과정을 겪었다.
가장 큰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였다.
나는 온통 모든 것을 다 바뀌었다.
언어, 보는 눈, 듣는 말 등 오감에서부터 먹는 것, 자는 것, 공부하고 책 읽는 것 등 생활의 패턴에 까지...
심지어는 늘 입던 우중충한 옷들의 색깔까지도 바뀌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는 기가 막히기까지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가 이제껏 믿고 따르던 것을 바꾸었다는 의미이다.

지금 나의 마인드를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다.
내 생각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무슨 처세술 책 제목 같지만 정말 분명한 것은 “우리는 지금 변해야 산다.”


2. 변화하지 못하면 영적 침체를 겪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새롭게 변화하지 못하면 영적인 침체를 겪을 수밖에 없다.
나는 매일 아침 늘 하는 기도가 있다.
그것은 오늘 나를 새롭게 하사 새로운 마음, 새로운 눈을 갖게 해달라는 것이다.

시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전에 담임하던 교회에는 청년들이 많았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고 참 갖가지 문제들이 수시로 벌어진다.
또 왜 그렇게 많은 문제들은 수없이 일어나는지...
그러다 보니 때로는 말썽 피우고 속상하게 하는 이들도 있다.
한번은 집에서 아내에게 그런 투정을 하게 되었다.

그랬더니 아내가 하는 말, “당신은 그 나이 때 그보다 나았을까?”
송곳처럼 내 가슴을 후벼 파는 촌철살인 같은 말이었지만 아내의 말은 나를 깨닫게 해 주었다.
매일 새로운 눈, 새로운 심령으로 변화하지 못하면 내 눈과 마음은 불평하고 짜증 날 수밖에 없다.
“늘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심령으로 변화하지 못하면 내 눈과 마음은 불평하고 짜증낼 수밖에 없구나!”

나는 그 이후로 나보다 젊은이들에게 불평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평거리가 없어서가 결코 아니다.
오직 그 때마다 “이 청년의 10년 후”를 기대할 뿐이다.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지 못할 때 오는 영적침체 : 1. 용서하지 못함

그래서 나는 아침마다 “오늘 만나는 이들을 어제의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게 해 주시길” 기도한다.
그 사람에 대해 새로운 마음으로, 나의 변화된 마음으로 말하고 만나기를 기도한다.

변화 없이는 우리는 새로운 눈을 결코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의 눈은 늘 새로운 눈이시다.
만약 어제의 나를 오늘도 보신다면 나에게는 기회가 없다.
하나님은 하루하루 늘 새로운 눈으로 나를 보시고 그것이 바로 용서이다.

만약 우리가 새로운 눈을 가지지 못한다면 1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변화를 갖지 못한다면 영적 침체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되고 만다.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지 못할 때 오는 영적침체 : 2. 신앙생활의 형식화

그 중 하나가 바로 나의 신앙생활이 형식화 되어버리고 만다는 점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QT를 숙제처럼 하게 된다.
기계적으로 예배하고,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고, 그러니까 빠지는 것도 아무 문제 없어지고 한다.

신앙이 형식화된다는 것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안했는데도 마치 한 것처럼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가끔 어떤 이에게 주일에 교회 갔느냐고 물어보면 기억을 잘 못하는 경우를 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신앙이 형식화되었기 때문에 안 가고도 간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듣지 않아도, 기도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니라 자신이 마치 말씀도 잘 듣고, 기도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식사기도가 전부이고, 가끔 벽에 붙은 말씀 한 구절 읽는 것이 전부인데도 말이다.

유럽의 교회들이 몰락에 가까운 현상을 보이는 이유가 뭔지 아는가?
그들은 물어보면 거의 다가 기독교인들이다.
그러나 교회가냐? 예수믿냐? 물어보면 묵묵부답이다.
그들은 종교세를 내거나 전통으로 마치 자신들이 기독교인인 것처럼 착각한다.
이것은 우리 집이 목사, 장로, 권사 집안이니까 나도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지 못할 때 오는 영적침체 : 3. 감정기복

변화하지 못해서 빠지는 영적 침체는 신앙의 형식화뿐만 아니라 감정적 조절에도 문제가 생긴다.
이 영적 침체에 빠지면 감정의 기복이 심해진다.
은혜 받으면 댈 수없이 뜨거워지지만 약 2주쯤 후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가라앉고 만다.
애정결핍도 생긴다.
누군가에게 늘 인정받고 싶고 사랑을 독차지 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내가 영적침체에 빠지면 가장 많이 듣고 싶은 말이 뭔지 아는가?
설교 후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이다.
나는 이런 사실을 깨닫고는 놀랐다.

유독 내 영에 문제가 많을 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욕하면 어쩌나, 설교 이상하다 그러면 어쩌나” 두렵다.
애정결핍은 심령이 메말라가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애정결핍이란 그가 애정을 못 받아서가 아니라 애정을 못 느껴서 생기는 현상이다.
마치 자꾸 나는 사랑을 못 받았다고 역설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것은 자신이 못 느끼는 질병이 있기 때문이지 사람들의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다.

사랑 못 받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나는 이 말에 정말 확신을 갖는다.
왜냐하면 비록 사람들이 단 한 사람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하여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지 못할 때 오는 영적침체 : 4. 자기증오

이런 영적 침체의 감정은 자신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생각에까지 이른다.
의외로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자신의 성격을, 외모를, 환경을 증오한다.
자신을 증오하는 일이 간단치 않은 것은 자신의 증오는 곧 하나님에 대한 증오이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극심한 분노가 바로 자기에 대한 증오심의 결과이다.

나는 외모에 대해서 그리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고 콤플렉스도 없었다.
이만하면 괜찮지 않은가?

그런데 어느 날 누님 중의 한 분이 어떻게 하다가 얼굴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더러 웃기게 생겼다는거다.
물었더니 내 얼굴 이목구비가 한 쪽에 모였다는 것이다.
허긴 생각보다 큰 머리에 이목구비가 작으니 한쪽으로 모일 수밖에.
나는 그 말에 상처 받았다.
한 번도 얼굴에 불평을 가져보지 못했는데 불평이 생겼다.
나는 말씀으로 치유되기까지 한 동안 얼마나 얼굴의 생김새를 원망했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내게 말씀해 주셨다.
시139:13~14,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이목구비가 모여 있어도 나의 이목구비는 제 기능을 다한다.
당신의 얼굴 새롭게 봐야 감사할 수 있다.
당신의 작은 키, 당신의 무다리, 당신의 부은 몸집, 나온 배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지으심으로 새롭게 봐야 감사가 태동하고, 찬양할 수 있으며, 주님을 높일 수 있다.


4. 지성소의 예배를 회복하라

당신은 당신이 하나님에게 있어서 정말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는가?
그래서 그분은 당신이 당신의 영을 사단에게 내어주고 고통 받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정말 당신은 소중한 존재이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는가?
아니, 이 말은 틀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신은 언제부터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는가?

애정결핍이란 사랑받지 못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사랑받고 있는 것을 느끼지 못해 생겼다고 하지 않았나?
당신은 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해서 그 사랑을 누리지 못하는가?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랑은커녕 사단의 지배를 받아서 고통 중에 머물러 있는가?
그것은 당신이 주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복을 잃었기 때문이다.
당신 안의 상처가 당신으로 하여금 주님의 형상을 일그러뜨리게 한다.
당신의 상처가 당신에게 주신 복을 왜곡하고 왜소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참된 변화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인 예배가 당신의 삶에 회복되고 지켜질 때 당신은 상처로부터 해방, 영적 침체 로부터의 해방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배는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다.

나는 몇 분의 잊지 못할 신앙의 선배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중 한 분이 미국 워싱턴의 Church of the Savior, 고든 코스비 목사님이다.
나는 그분을 1993년 단 한 번 뵈었다.
그것도 채 1시간이 넘지 않는 시간에 말도 통하지 않아서 시간에 비해 나눈 대화는 극히 적었다.
단지 그것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분이 내 삶이 나눠주신 것은 엄청난 것이었다.

당신은 그런 분이 없는가?
단 한 번의 만남, 그것도 사람이 준 영향력이 이럴진대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과의 교감은 어떻겠는가?
사람들은 예배에 대단한 힘을 모른다.
아니 오히려 예배에 뭐 대단한 것이 있겠느냐고 말하고 생각한다.

우리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자.
우리가 지금껏 예배의 위대한 힘을 느끼지 못했다면, 하나님과의 교제인 예배에 대단한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한 예배를 하지 못했을 뿐이다.
왜 사람들은 자신이 예배하지 못한 것 가지고 예배에 능력이 없다고 이야기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당신이 드린 예배가 ‘과연 지성소의 예배였는가?’ 따져볼 일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인 성막(예배의 장소)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예배의 장소 3가지 ①성전 뜰 안(육적예배)과 ②성소(혼적예배)와 ③지성소(영적예배) 이 세 가지이다.

당신이 지금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 자체는 성전 뜰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는 그저 당신은 육적인 예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정말 지금 육적인 예배만 드리고 있는 것인가?
조금 전 힘차게 찬양하고, 또 간절히 기도하고, 지금은 말씀도 듣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당신은 오늘 감정을 동원하여 찬양하고, 의지적으로 그리스도를 외치며 기도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지적 능력을 동원하여 이 말씀을 깨달으려고 노력하니 지적으로도 예배하는 게 틀림없다.

사실 훌륭한 예배를 당신은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인가?
지정의를 동원하여 예배하는 것, 깨달음이 있고, 눈물과 감동이 있는 예배, 그것으로 다인가?
사실 혼적인 예배에도 감동 있고 눈물 있다.
혼적인 예배에도 지정의를 동원한 예배를 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참 보기 좋고 기쁜 예배자의 모습이 맞다.
당신이 정성껏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는 예배는 귀한 예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인가?
예배 참 좋았다, 훌륭했다, 눈물도 있고, 감동도 있고, 깨달음도 있었다하면 다인가?

사랑하는 이들이여!
우리는 이제 들을 만큼 들었다.
신학이나 신앙에 대해서도 알만큼 다 안다.
방법적인 면에서도 어떤 것이 더 낫고, 기술적인 면에서도 어떤 것이 좋은지 우리는 알만큼 안다.

이제 우리가 모르는 것을 구하자!
전적인 하나님의 성령을 구하자!
지성소에 들어가자!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쏟아내시는 은혜를 경험하고 맛보자!

성전 뜰 안의 예배와 성소에서의 예배는 우리가 할 일이 많다.
짐승도 잡아야 하고, 제물도 바쳐야 하고, 각도 떠야 하고 손도 씻어야 한다.
그러나 지성소는 우리가 할 일이 없다.
그저 하나님께서 물 붓듯 부으시는 은혜를 조용히 경험하는 곳이다.
그 곳은 우리의 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불이 임재 하는 곳이다.

성령의 힘을 간구하자!
나를 통해 기적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매달리자!
노력해도, 노력해도 되지 않는 용서의 문제, 사랑의 문제가 성령의 강권하신 능력을 받아 내게 기적처럼 임하게 해 달라고 소원하고 또 소원하자.
내 속에 상처의 문제, 아무리 말해도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고치지 못한다.

당신은 눈으로 보았던 것에만 치중했던 삶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성령님의 운행을 간구하라.
성령으로 뜨거워지고, 내 이성으로는 도저히 느끼고 이해하지 못할 하나님의 특별한 권능을 힘입으라.
그 권능을 갈구하라.
나의 이성과 감성으로는 한계가 있다.
나를 뜨겁게 바꾸시는 성령의 역사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제 더 이상 나의 능력으로 하려 하지 말고 성령의 역사를 구하는 자가 되라.

성령의 역사로 새로운 눈을 갖는 기적이 일었던 바울처럼 당신도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성령의 역사로 새로운 머리를 가져 수많은 이들을 전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치며, 거리낌 없이 십자가를 달게 지었던 베드로처럼 당신도 지금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다.

전혀 새로운 예배, 지성소의 예배, 하나님과 단독자로 만나며 우리 이성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언어와 말씀과 은혜가 충만한 예배를 회복하라.

아무도 당신을 방해하지 못하고, 어떤 시선도, 또 어떤 욕망도, 어떤 지식도, 어떤 영도 방해하지 못하는 예배, 곧 이 자리를 당신의 지성소로 만들라.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언어, 성령의 언어를 갖기 원하신다.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흙에 생령을 불어 넣으신 것처럼 숨을 불어 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요20:22,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성령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우리의 호흡과도 같은 것이다.
생령을 잃어 타락했던 것처럼 성령을 잃으면 우리는 영적 침체를 겪게 된다.
우리는 지금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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