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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숙을 향한 순례의 길 (고전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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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을 향한 순례의 길 (고전 3:1~9)


• 순례자

“저마다의 인생 여정은 그 핵심을 보면 순례다.” 이 한 마디를 써놓고 하염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성스러운 땅을 밟듯 조심스럽게 걸어가야 할 인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갈짓자 행보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가야 할 길은 분명히 알고 걷고 있는 것일까? 인생의 중반을 넘긴 지금도 여전히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게 부끄럽지만, 이것은 회피할 수 없는 물음입니다. 

어떤 여행자자 낯선 이국 사람들 틈에 끼어 조그마한 고깃배를 타고 홍해를 유람하다가 “내가 왜 여기서 이렇게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는 거지?”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든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낯익은 현실조차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마치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그런 낯선 시간 체험이야말로 너 자신을 돌아보라는 하늘의 부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부름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 지금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들이 정말로 소중한 것인지를 되묻게 합니다. 순례자들의 말은 깊은 울림이 되어 다가옵니다.

“순례자들은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인다.”
“순례자가 된다는 것은 마음에 지도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다만 위대한 순례자이신 그분의 손을 잡고 걸을 뿐이다.”

목적지를 향해 하루하루 걷노라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순례자들에게는 무엇이든 받아들이려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무슨 음식을 먹고 어디서 자고 길에서 누구의 호의를 입든 매번 감사하는 이가 순례자입니다. 순례자이셨던 예수님도 선교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행장을 단출하게 하라시면서, “아무 고을이나 아무 마을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서, 그 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어라”(마10: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주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평화를 빌어주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순례자는 우정과 환대의 공간을 열어가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도 자기 생을 순례로 이해했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빌3:12)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나아가는 불퇴전(不退轉)의 신앙 용사 바울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인생은 나아감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익숙하던 세계를 떠나 미지의 세계로 떠났습니다. 탕자는 돼지우리를 떠나 아버지 집을 향해 발길을 돌림으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 오름길 

그러면 우리가 잊어버려야 할 뒤의 것은 무엇이고, 붙들려고 하는 앞의 것은 무엇입니까? 뒤의 것은 성령을 거스르는 육적인 삶이고, 앞의 것은 성령을 따라 사는 영적인 삶입니다. 영적으로 진보했는지를 알아보려면 우리가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를 살펴보면 됩니다. 지금도 여전히 쉽게 화내고 앙심을 품습니까? 쉽게 좌절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데 게으르고, 나보다 못한 사람들 앞에서 터무니없이 뻐기고 있습니까? 남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하고, 충동적으로 말하고, 규모 없는 처신으로 주위에 피해를 줍니까? 음식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욕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육적인 사람입니다. 

질문을 바꾸어 봅니다. 여러분은 이전보다 더 자비롭습니까? 이전보다 더 마음이 고요하고 관대해졌습니까? 이전보다 더 남을 배려합니까? 이전보다 더 정겨운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전보다 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영적으로 진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성 신학을 가르치는 어느 교수가 수련회 강사로 초빙을 받았습니다. 비행장으로 그를 영접하러 나온 한 스태프가 수련회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매년 수련회에 참석하는 한 여성에 대해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내적인 상처도 많고, 아주 성가신 사람이니까 조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모임을 마치자 한 여인이 찾아와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직감적으로 스태프가 말했던 ‘그 여인’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회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다음날 점심 식사 후에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산책을 나갔습니다. 좁고 지저분한 길을 걷는 데 이미 한 사람이 지나간 자취가 보였습니다. 갈림길에서 망설이는데 저 멀리로 어떤 사람의 모습이 보였지만 누구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도랑에 감자튀김을 담았던 용기와 냅킨 그리고 컵이 버려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어떤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쓰레기를 주워라.” 잠시 얼떨떨해졌지만 그의 마음에 저항감이 생겼습니다. ‘나는 신학대학 부총장이고, 대학의 정교수이고, 수련회의 강사가 아닌가?’ 그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향해 항거하듯 말했습니다. “내가 버리지 않았는데요.” 그가 막 그 장소를 벗어나려는 순간 똑같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주워라.” 그는 여전히 납득할 수가 없어서 불퉁거렸습니다. “주님, 이것은 환경 친화적 제품이어서 비만 내리면 다 녹아내릴 텐데요.” 세 번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주워라.” 그는 어쩔 수 없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도랑으로 내려가 쓰레기를 주워, 수련회장 문 옆에 마련된 쓰레기통에 넣었습니다. 

방으로 돌아가 그는 “꼭 제가 그 일을 해야 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도 또렷하게 들리던 음성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약속대로 그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자리를 잡고 앉자 여인은 한 말씀 드려도 되겠느냐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저는 산책길에서 우연히 목사님의 뒤를 따라 이곳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가던 발걸음을 돌이켜 도랑에 들어가 쓰레기를 줍는 모습을 보면서 ‘이분은 진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마지못해 했던 이 순종은 내적 상처로 인해 신음하던 그 여인의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되었고, 주님은 그 여인의 마음에 들어가 그를 씻어주시고, 치유하고, 과거의 인력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Robert Mulholland Jr., <>, pp.94-96)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렇습니다. 


• 중력과 은총 사이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안타까움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교인들 사이에 있는 시기와 싸움이 그런 판단의 근거입니다. 시기심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픈 것이고, 싸움이란 남들보다 커지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의 마음씨가 어떠해야 할지를 아주 간결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12:15). 

그런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기뻐하는 사람을 보면 내가 그런 기쁨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것이 속상해서 어떻게든 그의 기쁨에 흠집을 내고 싶어집니다. 우는 사람을 보면 그의 고통이나 외로움에 연루되는 게 싫어 짐짓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인 오름길에 올랐지만 몸과 마음에 밴 습관을 벗어던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괴롭습니다. 주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마땅히 가야 할 길로 가지 못하는 누추한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끈질긴 지향입니다. 수백 번 넘어지더라도 기어이 다시 일어나 하늘의 뜻을 받들려는 사람이야말로 참 사람입니다. 

우리는 ‘중력’과 ‘은총’ 사이에 있습니다. 중력은 우리 옷깃을 잡아채며 세상의 즐거움도 얕볼 것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중력은 잡아당기는 힘이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우리가 집착하는 바’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뜻이 아닌 다른 것으로 향하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삶에 작용하는 중력입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에 빠진 까닭이 뭔지 아십니까? 농담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무거워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는 중력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자기 자신을 향할 때 그는 무거워졌고 곧 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집니다. 은총이 우리를 들어 올려 줄 때 우리는 비로소 중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미세하게 흔들리면서도 언제나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의 바늘처럼, 믿음의 사람이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지향하는 사람입니다. 살다보면 우여곡절을 많이 겪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 가슴에 하나님을 향한 지향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자기를 믿고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끔 세상 돌아가는 현실을 보며 답답해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도 문득 안달하고 조바심하는 나의 모습이 불신앙임을 깨닫습니다. 냉소하고 조롱하고 한숨을 내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런 가운데도 말없이 희망과 생명을 파종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을 지탱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들은 중력에 압도당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둠이 그들 영혼의 빛까지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젖을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못했다고 탄식합니다. 젖은 믿음이 주는 행복과 기쁨일 겁니다. 하지만 믿음에는 시련도 따릅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많은 복을 받을 것이지만 고난도 겸하여 받을 것(막10:30)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수행하는 이들이 견뎌내야 하는 어려움이 곧 단단한 음식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에 육신을 부여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삶으로 번역한 이들은 어려움도 겪습니다. 하지만 그 결실은 달콤합니다. 삶이 건강해지고, 비애감은 줄어듭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20:35)는 말씀은 주는 기쁨을 맛본 사람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그것을 삶으로 번역하지 않는 이들은 식당에 들어가 메뉴판만 보고 나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 동역자

신앙고백을 삶으로 번역해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을 때 우리는 시기와 다툼에 빠져들게 됩니다. 시기와 다툼은 本을 붙잡지 않고 末을 붙잡는 이들이 필연적으로 빠져드는 영혼의 함정입니다.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시비를 가리려 하고, 네 편 내편을 가르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도 가리워집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 편이니, 아볼로 편이니 하며 다투는 것에 침통함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유명한 밭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아볼로든 바울이든 하나님의 밭을 가꾸는 일꾼들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심었다면 아볼로는 물을 주었을 뿐이고,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역할만 다를 뿐 일꾼이라는 점에서는 하나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밭에서 다른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고마워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해주니 말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주님의 일을 위해 부름받은 이들을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칭호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란 하나님과 함께 멍에를 멘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당신의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

비탈지고 척박한 밭을 갈기 위해서는 겨릿소에 쟁기를 지워야 합니다. 농부들은 두 마리 소에 멍에를 함께 메우는데, 밭갈애비 즉 쟁기꾼이 보기에 왼쪽에 서는 소를 안소라 하고, 오른쪽에 서는 소를 마랏소라 합니다. 안소는 경험이 많고 사람의 말귀를 알아듣는 소입니다. 마랏소는 안소가 이끄는 대로 따라 가면서 일을 익히게 됩니다. 물론 안소도 마랏소 덕분에 밭을 쉽게 갈 수 있는 것이지요. 이 척박한 세상을 갈아엎어 희망을 파종하시려는 주님은 친히 안소가 되시어 마랏소인 우리와 함께 멍에를 메십니다. 

하늘을 향한 순례자인 우리는 매사에 서툴지만, 곁에서 깨우쳐주시고 알아듣게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기에 그 길을 안심하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아직 겨울이 다 물러가지 않았지만 이제 입춘이 코 앞입니다. 겨울 한복판에 우뚝 서는 봄처럼, 주님은 이 곤고한 세상에 나아가 생명의 봄을 알리는 전령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삶이 하늘을 향한 순례라는 사실을. 일상의 모든 순간에 이 벅찬 소명을 잊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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