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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3) (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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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3) (딤후 2:15)


[윤해영]시 [조두남]작곡의 <선구자(先驅者)>라는 가곡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 한 줄기 해란 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 뜻 깊은 용문 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자신의 목숨을 초개(草芥)처럼 여기면서 잃어버린 조국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만주평원을 말 타고 달리던 충절의 사나이들에 대한 노래입니다. 이 가곡은 1930년대에 민족의 한을 달래면서 불리어졌고, 부르는 사람의 가슴마다에는 민족과 광복을 위한 또 다른 선구자가 일어나기를 기원하는 열망으로 불탔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선구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자신을 이끼지 않고 남을 위하여, 공동체를 위하여, 나아가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불사를 시대의 선구자, 신앙의 선구자가 그리운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일꾼, 그것도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이야말로 신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 딤후 2:15의"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신앙의 선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드릴 수 있는 일꾼으로 인정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선구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무엇이 우리들로 선구자 되게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하겠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선구자란 곧 사명자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흔히 사람은 3번 태어난다는 말을 합니다. 제1의 탄생은 모태를 빌려 태어나는 출생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이 영생을 얻으려면 다시 한 번 새로 나야합니다. 영어로는 born again이라고 하는<거듭남>이 바로 제2의 탄생입니다. 영성이 거듭 날 때“왜 사느냐”,“무엇 때문에 사느냐”하는 궁극적 물음에 답할 수 있고 그때야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탄생이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가면서 어느 날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날, 곧 사명을 받는 날, 그것을 자각하는 날이 제3의 탄생입니다. 사람이란 사명이 있어야합니다. 사명에 뛰고, 사명에 웃고, 사명에 일해야 합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사명이란 곧 생명입니다. 

사명이란 살아 있는 이유가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죽은 자처럼 살지 않습니다. 마지못해 사는 사람이 아니요, 죽지 못해 사는 사람처럼 맥없이 살지 않습니다. 충분히 살아야할 이유를 자기가 하고 있는 일, 즉 사명 속에서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를"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라는 깨달음 속에 사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선구자입니다. 

둘째, 선구자란 앞서 가는 사람입니다. 글자의 뜻 그대로 맨 앞에서 말을 몰고 가는 사람이 선구자(先驅者)입니다. 거친 사막이나 싸움터에서 앞서 나가는 일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러나 선구자가 앞서가는 것은 그 전쟁의 이유를 알고, 그 행진의 목적이 가슴에 불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디서나 선구자는 솔선하고 앞서가는 진취적인 기상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 의해 역사도 바뀝니다. 문화도 달라집니다. 삶의 모습도 언제나 희망적으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에게는 나의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언제나 한 걸음 앞서서 달려 나가는 사람, 날아오는 화살도, 쏟아지는 총탄도 헤치고 나아가는 선구자가 있었듯이 오늘 날 선한 일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비방도, 비난도, 굴욕도, 무시도 헤쳐 나가는 선구자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한때의 베드로와는 다른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랐던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안일을 위하여 제자임을 떳떳이 나타내지 못하고 멀찍이 좇아가면서 추이를 지켜보고 그 결과에 따라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려 했던 비겁하고 옹졸한 모습과는 다른 것입니다. 선구자란 앞서 가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대해 연구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오늘 날 교회 안에는 구경만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 주인의식 없이 손님 대접만 받으려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를 배에 비유하면 그 배를 움직이는 선장이나 선원은 적고 타고 있는 승객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배가 항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위치에서 각자의 주어진 임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부가 편안히 쉬면서 가려고 하는 승객뿐이라면 그 배를 어떻게 움직이겠습니까? 

어느 신학자는 교인들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군대에 들어가는 유형의 교인이 있고, 다른 하나는 클럽에 들어가는 유형의 교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군대에 들어가면 나라를 위한 복종과 강인한 훈련도 앞장서서 감당해야하듯이 자신을 훈련하면서 신앙 생활하는 반면에 클럽활동에는 어느 정도 자유가 있습니다. 마음이 내키면 참석하고, 안 내키면 안 해도 되며,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그만 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앞장서서 나아가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셋째, 선구자란 싸우는 사람입니다. 인생은 전쟁터와 같은 곳이라고 합니다. 하루도 우리는 싸우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시간과 싸웁니다. 돈과 싸웁니다. 명예와 체면과 자존심과 싸우면서 삽니다. 그런데 이 모든 싸움 중에 참으로 어려운 싸움은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싸움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다른 어떤 것과의 싸움에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구자란 먼저는 자기와의 싸움에서이기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안일과 싸우며, 자신을 무너뜨리려는 악의 실체와 싸워서 이겨야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환경과 싸워야합니다. 주변의 부조리와 싸우고 외부의 여러 가지 구조 악들과 싸워서 이겨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하나의 싸움입니다.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인간관계와의 싸움입니다. 세상과의 싸움입니다. 가치관과의 싸움입니다. 공동체를 위하여 때로는 나를 희생해야하는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진정한 신앙의 선구자입니다. 

개미를 잡기 위해서 개미 집 속에 불타는 초를 세워 놓으면 개미는 동료들을 돕기 위해 그 불에 올라가 몸으로써 불 끄는데 진력한다고 합니다. 개미가 불 가운데 들어가 자기 몸을 태우고 몸이 불타면 그 가죽에서<키츤스>라는 불연성의 진액이 나와 불이 꺼지고 다른 개미들을 살리게 됩니다. 그러한 희생적 행위가 개미나라를 곤충 가운데서 가장 강한 것이 되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희생도 감수하는 신앙의 싸움에 앞장서는 사람, 즉 신앙의 선구자가 되어야할 것입니다. 

넷째, 선구자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앞에서 생각해보았던 가곡<선구자>라는 노래의 배경이 되었던 그 시대에는 제 아무리 구국 열에 불타는 청년이라도 독립군이 되려면 반드시 세 가지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해야 했다고 합니다. 

1.당신은 총에 맞아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2.당신은 굶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3.당신은 추위에 얼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세 가지 질문의 핵심은 바로"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고서야 선구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는 말씀은 바로 신앙의 선구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말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하나님께 바쳐야 할 일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일찍이 자신을 하나님의 인정받는 일꾼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았던[사도바울]신앙의 선구자적인 고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오늘 여러분은 진정 하나님의 인정받는 일꾼입니까? 그렇다면 신앙의 선구자적인 기질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는 못 되더라도 정말 어느 한부분이라도 목숨과 맞바꿀 만큼의 결단으로 신앙생활 하시느냐 말입니다. 목숨은커녕 조그마한 고난 앞에서도 당황하며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찾아오는 어려움 앞에서 가장 쉬운 해결방법을 믿음을 포기하고 돌아서는데서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가 어렵고 힘들 때 금식하며 기도해 보셨습니까? 잠을 자지 못하면서까지 기도해 보신 적이 언제입니까? 생명에 관한 문제들은 하나님 앞에 맡겨둔 채로 몸부림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왔던 적이 여러분의 인생에 몇 번이나 있습니까? 

오늘 성경은"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말합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 어떤 신앙적 각오와 결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여러분을 드리시겠습니까?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양한 것처럼 성도가 신앙 생활하는 모습도 또한 다양합니다.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유형입니까?

우선은 고슴도치 형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슴도치의 온 몸에 가시가 돋아나 있는 것처럼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남들에게 가시 같은 존재입니다. 언제나 가시로 남을 찌르며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또 한 유형은 나팔꽃 형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남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남을 헐뜯기도 하고 남의 단점을 들추어내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유령형도 있습니다. 어느 날은 보이다가 어느 날은 안 보이는 그런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미온적인 자세로 책임감 없이 신앙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밀알형의 사람입니다. 모든 것에 열심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부흥과 남의 유익에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삶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공동묘지에는 묘비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습니다. 그 묘비에는 각기 다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지만 반드시 빠뜨리지 않고 적는 것이 있는데 몇 년도에 태어나서 몇 년까지 살았다는 표시를 할 때 중간에 줄을 긋는 <대시(-)>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점(.)보다는 조금 길지만 그리 길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짧은 표시 안에는 그 무덤에 묻혀 있는 사람의 생애가 압축적으로 담겨있습니다. 혹은40년, 혹은 70년의 그 인생이 짧은 한 줄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아직은 끝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끝날 것이고 그 동안의 우리생애가 압축되어<대시>로 표시 될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이 <대시>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세상을 살아야합니다. 많은 돈으로 채울 사람도 있을 것이고, 높은 지위로 채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인생 그<대시>안에는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겠습니까?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그 과정을 가장 의미 있게 연결시켜주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인생의<대시>입니다.“하나님의 일꾼 된 아무개, 하나님의 인정받는 일꾼으로 살다가다.”이 보다 더 좋은 대시의 내용이 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하루하루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인생의<대시>를 채워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세상욕망에 버려두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불 신앙적인데 바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인생의 짧은 줄을 채울 그 방법을 일러 주고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합니까? 

오늘 본문 딤후2:15절의 마지막 부분입니다."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써라"이 말씀처럼 하나님의 인정받는 일꾼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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