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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날] 본향을 향하는 삶 (창 47: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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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향을 향하는 삶 (창 47:7~12)


금년에도 어김없이 민족의 고유명절인 설이 찾아왔습니다.  금년 설은 2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고향을 가지 않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작년에는 12. 6%에 불과하던 것이 금년에는 32.2%가 되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고향에 가지 않는 이유를 ‘어려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지금 한국경제의 심각성을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의 특징은 최악의 교통대란입니다.  폭설이 계속되고 있고, 매서운 추위가 이어집니다.  보통 때에도 이런 상황이면 도로가 마비되는데 명절이니 오죽하겠습니까?  도로공사도 예측시간을 아예 포기했습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고향을 찾아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입니다.  가지 못하는 사람도 마음은 이미 고향에 가 있습니다.  가는 사람들은 고향을 찾는 기쁨에 들떠 있습니다.  가고 싶어서 가는 사람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올해 설 명절도 고향을 향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고향을 그리워하며 찾아가듯, 믿는 자에게도 고향이 있습니다.  그곳은 단순한 ‘고향’이 아니라 성경은 ‘본향’이라고 말합니다.  태어나서 자란 정도가 아니라 뿌리와 근원이 되는 곳입니다.  고향과 본향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고향은 의지로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본향은 의지와 관계가 없습니다.  오라하면 가야 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본향을 향하여 갑니다.  그렇다면 본향을 향하여 가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그것을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나그네처럼 살아야 합니다. 

본문은 야곱의 생애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의 족장가운데 가장 많은 기록을 갖고 있고, 가장 우리와 흡사한 모습을 가진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의 생애는 반전이 가장 많이 일어난 생애입니다.  그것이 먼저는 지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벧엘, 하란, 브니엘, 세겜, 고센 등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또한 야곱생애의 반전은 성경의 스토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창세기 35장에 나타
납니다.  

창세기 35장은 야곱이 고향땅에 돌아와 벧엘을 다시 찾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의 기록에서 마지막 부분입니다.  여기를 끝으로 창세기는 요셉이야기로 진행됩니다.  그런 말씀을 보여주는 35장에서 야곱의 생애에 반전이 일어난 사건을 나옵니다.  그것은 그가 한꺼번에 3명의 죽음을 목격한다는 것입니다.  

처음 사람은 어머니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죽음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드보라는 예사로운 인물이 아닙니다.  그가 어머니의 도움으로 고향을 떠나 성공했지만,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드보라를 마치 어머니 대하듯 하며 극진히 모셨습니다.  그런 유모가 세상을 떠납니다.  야곱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곳을 '알론바굿‘이라고 짓습니다.  ’통곡의 상수리나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야곱의 마음에 깊은 슬픔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죽음은 라헬의 죽음입니다.  야곱에게서 라헬은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지탱하던 버팀목이었고, 약할 때 강한 것을 알게 했던 사람입니다.  그녀를  위해 칠년을 하루같이 수고하고 마침내 결실을 보았습니다.  라헬은 아이를 갖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태를 열어서 요셉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고향을 다시 찾아왔는데, 라헬이 베냐민을 임신하고 난산 끝에 길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라헬을 잃고 얻은 베냐민의 원래 이름은 ’베노니‘였습니다.  베노니는 ’슬픔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이 이름 속에서 야곱의 슬픔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게 합니다.  

세 번째 죽음은 아버지 이삭의 죽음입니다.  야곱에게 이삭은 어떤 존재입니까?  그의 인생길에 방향을 정해준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앙을 알게 해준 사람입니다.  그런 아버지마저 야곱 곁을 떠나고 맙니다.  창세기 35장은 야곱이 이삭을 장사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처럼 3명의 죽음을 목격한 야곱의 생애는 이후부터 새로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갑자기 가까운 사람이 죽는 것을 본 야곱에게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바로 인생은 돌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뒤부터 야곱은 입을 벌릴 때마다 ’돌아간다‘는 말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여기 본문까지 이어집니다.  

지금 애굽왕 바로 앞에서 그의 말은 돌아가는 인생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17년을 더 살던 야곱은 죽을 때 애굽이 아닌 조상의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합니다.  죽어서라도 다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과 후손들에게도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으로 돌아갈 것을 간곡히 부탁합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가나안은 단순해 지리적 고향만을 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곳은 바로 그가 영원히 돌아갈 본향이었습니다.  그 본향으로 돌아가는 인생임을 그는 믿음으로 알고 남은 생애를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야곱이 본문에서 바로에게 고백을 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여기 그의 말에서 눈길을 끄는 말이 바로 ‘나그네’입니다.  두 번이나 반복하여 자기 인생을 나그네로 표현합니다.  이것이 야곱인생의 놀라운 반전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자신을 나그네로 말합니다.  나그네처럼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그의 이런 신앙이 본문에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 나그네처럼 살아야 합니다.

나그네는 어떤 곳에도 정착하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합니다.  이것이 나그네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마치 여기에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고 집착하고, 정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부르면 다 놓고 가야 합니다.  내가 아끼는 어떤 것도 가지고 갈수 없습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사람이 빈손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갈 때도 빈손으로 갑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이 태어날 때는 손을 움켜잡고 태어납니다.  이제 세상에서 뭔가 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온 인생의 연수만큼 우리는 많은 것을 손에 쥐었습니다.  하지만 떠날 때 사람은 손을 펴고 갑니다. 지금까지 움켜잡았던 것 다 펴고, 내려놓고 갑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모두 나그네처럼 본향을 향하는 길목에서 어떤 것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어떤 곳에도 정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앞을 향해, 하늘을 향해,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의 나그네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축복하며 살아야 합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축복으로 시작해서 축복으로 끝납니다.  처음 야곱의 이야기는 축복과 관련하여 문을 엽니다.  그러다가 죽을 때에도 자녀와 후손을 축복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처럼 야곱의 생애에는 축복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야곱의 반전은 축복의 주체와 내용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축복을 받으려고만 했습니다.  아니 축복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곤경을 당했고, 수렁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돌아가는 인생, 본향을 향한 인생임을 안 뒤부터는 이제 축복하며 삽니다.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축복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축복하고, 사람을 축복하고, 본문에 와서는 드디어 바로왕까지도 축복합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애굽왕 앞에 선 야곱이 보여준 행동은 오직 축복뿐이었음을 발견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10절에도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야곱이 바로를 만날 때에도, 헤어질 때에도 축복합니다.  분명 다른 할 말이 있었을 텐데 오직 축복만 합니다.  그가 무슨 직위에 있는지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축복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놀라운 반전입니다.  전에는 축복을 받고, 뺏으려고 했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돌아가는 인생을 알고 깨달은 변화입니다.  

성경은 한마디로 축복의 책입니다.  심지어 저주의 말씀도 저주가 목적이 아니라 축복으로 바꾸라는 강조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까이 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말씀을 통해 축복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 중에 한사람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매주일 마다 변함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은 축복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축복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결코 축복이 빠지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본향을 향하여 가는 모든 길에 축복을 주십니다.  지금까지 축복이 임하였고, 앞으로도 축복으로 삽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된 백성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6:23-27)

그래서 이런 하나님을 믿는 자는 끊임없이 축복하며 살아야 합니다.  축복이 무엇입니까?  복을 비는 것입니다.  잘되라고 말하고, 잘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축복은 약을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허물과 약점을 들추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비방하고 수군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와 아픔이 아닙니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은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힘과 위
로를 주는 것입니다.  기도와 간구로 소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모두 야곱처럼 날마다 축복하면서, 기도하면서, 본향을 향해 가는 성도가 됩시다.


셋째는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 야곱과 살던 곳은 라암셋, 고센땅이라고도 부릅니다.  비옥하고, 살기가 좋은 곳입니다.  왕궁과 가까운 곳입니다.  바로는 야곱의 일행을 좋은 곳에서 살게 했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기근과 가난을 피해 내려온 길이었지만 이곳에 터를 잡습니다.  

그러나 고센 땅에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야곱에게 가장 좋은 것은 더불어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요셉과 더불어 삽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사랑하는 아들이 살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단숨에 내려왔습니다.  아무리 기근이 심해도 가나안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지만 오직 더불어 산다는 이유 때문에 야곱은 애굽행을 결정했습니다.  요셉만이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삽니다.  가족만이 아니라 여러 다른 사람들도 함께 삽니다.  바로 이것이 야곱의 큰 반전입니다.  

그는 처음 늘 홀로였습니다.  자이든 타이든 혼자일때가 많았습니다.  가족을 떠나 하란으로 갈 때에도 혼자였습니다.  하란에서 고생을 할 때에도 늘 허전하고 외로웠습니다.  형을 만나기 전날 밤 그는 얍복강에 홀로 남았습니다.  물질적으로는 넉넉했지만, 가족이 그립고, 사람이 보고 싶었습니다.  이런 야곱이 돌아가는 인생을 알았을 때 이젠 더불어 사는 삶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제 모든 자녀가 다 소중했습니다.  그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 큰 위로요, 힘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애굽에 내려올 때에도 모든 가족이 함께 자리를 옮깁니다.  어떤 자녀도 거기에 홀로 남지 않습니다.  모두가 더불어 가고, 더불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돌아가는 인생에서 그가 깨달은 진리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평생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고 불렀습니다.  금수강산은 ‘비단에 수를 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산천’이란 뜻입니다.  중국인들이 삼국지나 동이전(東夷傳)에서 우리를 ‘산과 골짜기를 따라 거주하며 계곡물을 마신다(隨山谷以爲居食澗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연환경을 그들이 얼마나 부러워했는지를 알게 합니다.  세상에 계곡물을 그렇게 아무데서나 풍부히 그냥 마시는 나라는 흔치 않습니다. 

이런 금수강산이 가능한 이유는 자연이 충돌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은 산을 만나면 휘돌아 가고, 산은 강을 만나면 발걸음을 멈춥니다.  산과 강은 그렇게 어우러져 계곡을 따라 아래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산과 강은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흐르고, 더불어 존재하기에 금수강산을 만듭니다.  만약 산과 강이 다툰다면 금수강산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닙니다.  세계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자연이 아름다움의 자태를 뽐내며 많은 관광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바로 더불어 가기 때문입니다.

강은교의 ‘우리가 물이 되어’라는 시가 있습니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올 때에는 인적 그친/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이 시는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염원하는 시인의 마음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물은 맑고 부드러우며 역동적인 힘을 지닙니다.  또한 생명력과 정화의 힘과 수용의 능력도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러한 자세로 서로 만난다면 세상이 밝고 아름답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물보다는 불로 만나려 합니다.  불은 힘이 있지만 물과 상반되는 것으로서 갈등과 파괴를 낳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어둡게 하고 인간의 가슴을 '숯이 된 뼈'처럼 메마르게 만들어 갈등과 다툼의 관계로 변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현대인은 갈수록 비정해지고 단절되어 갑니다.  시인은 이런 사회를 관찰하면서 이제 너와 나의 분리된 관계에서 '우리'로 한 덩어리가 되기를 염원한 것입니다.

이번 주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부모와 자녀가 만나고, 형제와 친척이 만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만나고, 동서와 올케가 만납니다.  친구와 이웃이 만나고, 성도와 성도가 만납니다.  우리의 만남 속에 더불어 사는 것의 아름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물과 불로서의 만남이 아니라, 물과 물로, 물과 산으로서 만나야 합니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힘을 주는 만남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살기가 이렇게 힘든데, 만나도 자꾸 힘을 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더불어 삽니다.  믿는 자는 더불어 갑니다.  본향을 향하여 모두 함께 갑니다.  늘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는 그날까지 나그네처럼 살고, 축복하며 살고, 더불어 살면서 천성을 향해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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