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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단 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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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단 9:1~23)

  
'시작이 반이다.'라는 유명한 금언(金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제일 처음에 시작하는 것은 어렵지만 일단 시작만 해 놓으면 나머지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일을 시작만 하면 이미 반은 성취해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기독신자의 신앙생활에서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시작이 전부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분야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20절부터 23절에 "20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21곧 내가 말하여 기도할 때에 이전 이상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22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가로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나니 23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는 말씀이 보여 주는 사실입니다.
  
다니엘이 어떤 문제를 두고 기도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다니엘의 기도가 '시작될 즈음'에 벌써 그 기도에 응답을 준비해 놓으시고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그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즉 다니엘의 '기도가 끝난 직후'가 아니라 '기도를 시작한 순간'에 그 기도는 이미 전부 다 성취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이 2009년에 우리 교회 성도들이 '예배와 기도회에 일주일에 한 시간씩 더 참석하기 운동'을 하고 있는데, 바로 이런 기도를 체험할 수만 있다면 금요철야기도회나 매일새벽기도회가 얼마나 더 신이 나겠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시작할 때 이미 다 응답 받는 기도'란 어떤 기도인지를 이 다니엘의 기도를 통하여 이 시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말씀을 깨닫고 올리는 기도'는 그 말씀에 약속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으로써 필연적으로 응답받게 됩니다. 

본문 1절부터 3절에 기록하기를 "1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2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3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어떤 흠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인물을 말할 때 보통 요셉을 떠올립니다.
고난의 기간을 잘 인내했고 시험의 유혹을 이겨 내었으며 또 당대의 대제국 애굽의 총리대신까지 되었으니 영육 간에 거의 완벽한 모범이라 할 만한 신앙인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다니엘 역시 그에 쌍벽을 이룰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역시 어린 나이 때부터 큰 고난을 겪었지만 신앙의 힘만으로 잘 통과해 내었으며 목숨이 걸린 위험한 시험들도 잘 이겨내었습니다.
  
또한 바벨론 제국 시대에 '나라의 셋째 치리자'에서부터 바사 제국의 총리에 이르기까지 사회적으로도 큰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요셉과 다니엘이 거의 비슷하다 할 만하지만, 말년에 가서는 다니엘이 요셉보다 단연 뛰어난 면모를 보여 주고 있는데 바로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 많은 계시의 말씀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니엘이나 요셉이나 둘 다 젊었을 때에는 다른 사람의 꿈을 해석해 주는 영력을 발휘했지만, 노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특별계시를 받아서 그 해석과 함께 기록으로 남기는 사역을 왕성하게 수행한 것은 오직 다니엘에게서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그처럼 말씀 은혜가 충만했던 삶은 곧바로 기도생활로 직결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본문 2절에서 다니엘은 "서책으로 말미암아" 무언가를 깨닫고 기도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서책'이란 바로 예레미야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직접 내려 주시는 환상의 계시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이전의 선지자들이 기록해 놓은 글, 즉 그때까지 이미 성문화되어 있던 구약의 성경 말씀들을 항상 읽으면서 상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레미야서를 읽던 도중에 그는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연수를 깨닫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 만에 마치리라"고 예언하신 말씀, 즉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이 지나면 유다를 해방시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자기가 살고 있던 시대의 연수를 계산해 보니까 바로 그 '칠십 년의 연한'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다니엘의 심령을 감동시킨 순간 그가 즉시 했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금식하며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다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경륜을 깨닫게 되었을 때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으니 조금만 있으면 저절로 다 되겠구나.'라고 가만히 기다린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지금 당장부터 기도를 시작해야겠다고 판단하고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젊었을 때에도 기도생활 열심히 하느라고 사자굴에 던짐까지 당했던 다니엘이었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의 말씀 사역과 정비례해서 그의 기도 사역 역시 더욱 성숙해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도들도 "우리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리라"고 한 것처럼 '말씀'과 '기도'는 항상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목사가 기도하지 않고 말씀만 잘 전할 수 없는 것처럼, 평신도 역시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 자동적으로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학교수가 자기는 말씀만 전공하고 기도는 목사들만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엄청난 착각이며, 설교는 목사에게서 듣지만 기도는 무슨 '신통한 권사'에게 받아야 한다는 따위는 있을 수 없는 소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의 기도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말씀을 통하여 이미 선포해 주신 뜻, 이미 예언해 주신 약속을 바로 성도의 기도라는 순서를 거쳐서 성취해 나가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처럼 모든 일이 결국은 다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그 말씀을 깨닫고 기도하는 것은 그대로 응답받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깨닫고서 '주님, 제게 구원 얻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기도드리면 그대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는 말씀 앞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님, 제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깨어 있는 종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드리는 신자는 필연적으로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칭찬 받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무릇 경건하게 사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케 하느니라"는 말씀을 의지하면서 '주님, 이번 설날에 제사 때문에 불신가족들로부터 핍박을 당해도 꼭 이기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만 드리면 정말이지 놀라운 용기와 힘을 반드시 얻게 될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라는 말씀을 붙들고 불신남편을 위해서 간구하는 기도,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는 약속을 붙들고 자녀를 위해 올리는 기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역사의 벽보를 깨닫고 세계 선교를 위해서 드리는 기도, 이런 기도들은 우리가 이 기도를 시작하는 순간 이미 다 응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 뜻을 깨닫게 되는 순간 바로 그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기도드림으로써 그 필연적인 약속의 성취를 통하여 응답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죄를 함께 지는 기도'는 자신의 죄까지 찾아 회개하게 됨으로써 그때까지 막혀 있던 응답이 즉시 뚫리게 됩니다. 

본문 4절부터 6절에 기록하기를 "4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 5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6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조국 해방'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 주된 내용은 의외로 "자복하여" 기도하는 것, 즉 회개였습니다.
도대체 다니엘이 무슨 죄를 두고 기도했던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사실 다니엘의 개인적인 죄가 아니라 자기 백성 즉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범한 죄를 자복하며 드린 회개기도였습니다.

그 이스라엘의 죄는 

첫째로,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한 죄'였습니다.
5절에서 다니엘은 자기 백성이 "패역"하고 "반역"했다고 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크시고 두려워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한 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죄'였습니다.
5절 하반절에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다"고 했으며, 6절에서는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다"고 했으며, 또한 10절과 11절에서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것"과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치 아니한" 것을 회개했으며, 14절에서도 다시 한 번 더 "우리가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나이다"라고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이 죄를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으면서도 회개하지 아니한 것'을 또한 자복했습니다.
13절에서 "13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기도한 대로 이스라엘은 그런 망국의 재앙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회개를 할 줄 모르는 '목이 곧은'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다니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범죄를 이처럼 정확하게 꼬집고 기도하면서도, 구절구절마다 "우리가 범죄하여, 우리가 패역하여, 우리가 듣지 아니하여"라고 '우리'라는 말을 반복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5절부터 시작하여 이 '자복과 회개'의 결론에 해당되는 16절에서 "16주여 내가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좇으사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에게 수욕을 받음이니이다"라고 기도할 때까지 다니엘은 이 열두 절 속에서 무려 28회나 "우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즉 그는 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바로 자기도 함께 책임이 있는 죄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다니엘로 말하자면, 그는 이스라엘이 멸망의 길로 행하고 있을 적에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었으며, 따지고 말하자면 그 조상의 죄 때문에 자기 세대는 억울하게 그런 고난을 같이 당하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그 죄를 남의 탓으로 전가하려고 하지 않고 오직 '우리의 죄'라고 하나님 앞에서 자복하며 회개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에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했는데, 그 '짐'이 무슨 짐인 줄 아십니까?
바로 앞의 1절에 보면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이라고 했습니다.
즉 '죄의 짐'도 성도가 서로 나누어 져야 할 짐이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짐도 그렇지만 이 짐을 정말 서로 져 줄 줄 알아야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법', 즉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의 짐을 서로 나눈다는 것은 바로 '남의 죄'를 위해서 기도할 때에도 그것을 '우리의 죄'인 줄로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남의 드러난 죄를 보게 될 때 그것에 대하여 눈살을 찌푸리고 비난만 하는 자세로서는 절대로 그 짐을 나누어 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도 그렇게 남을 정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위 '주여, 저 종을 치소서!'라는 말을 기도라고 하는 못된 교인들이 간혹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야 재판장의 자세이지 어떻게 기도자의 자세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성숙한 성도는 '죄를 함께 지는 기도'를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식의 불신앙 때문에 기도할 때면 그것이 먼저 부모 된 나 자신이 신앙교육 바로 시키지 못하고 교회중심으로 학창생활하도록 지도하지 못한 죄 때문인 줄을 알고 정말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시험을 받은 구역원을 위하여 기도할 때면 평소에 그 구역원을 더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돌아보면서 그 발을 씻겨 주는 자세로 섬기고 대접해 주지 못한 구역장 자신의 죄를 먼저 회개해야 마땅합니다.
  
신앙생활이 연약하거나 교회생활에 불충한 교인을 위하여 기도할 때면 그 교인의 영혼을 맡은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제대로 다하지 못한 전도자 자신의 죄부터 바로 그 양의 목자장 되신 주님 앞에서 정말 벌벌 떨면서 자복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저 장로가 저래서는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면 그 장로를 애당초 잘못 세웠든지 아니면 잘못 교육시켰든지 아니면 바른 본을 보여 주지 못한 당회장 자신의 죄부터 먼저 돌이켜 보면서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도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서야 그 어떤 기도도 응답될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반면에 기도하는 중에 자기가 이전에는 자각하지 못하고 넘어가 버렸던 죄를 발견하게 되고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게 만든 방해물이 바로 내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 회개하게 되면 그 기도는 이미 응답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를 함께 지는 기도'를 통하여 바로 자신 속에 숨어 있던 문제점과 고질병부터 깨끗이 정돈함으로써, 모든 막혀 있던 것들이 뚫리면서 순식간에 응답받게 되는 역사를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긍휼만을 의지하는 기도'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반드시 속히 응답해 주지 않으실 수 없게 됩니다. 

본문 17절 이하 19절에 기록하기를 "17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 18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19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바 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기를 간청하면서,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성을 보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저와 우리 백성이 이렇게 회개하고 있사오니 우리의 변화된 모습과 정성의 기도를 보아 주옵소서.'라는 식으로 무슨 자기네 쪽의 공로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와 자기 백성과 자기 나라와 자기 성전이 황폐되어 있는 그 고난의 현장을 그대로 보아 주십사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다니엘 스스로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라고 말하고 있듯이 순전히 '하나님 당신의 긍휼하신 성품'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은 하나님의 긍휼이 왜 절로 발동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까?
그 이유 역시 그의 기도에서 구구절절이 나타나고 있는데 바로 "주를 위하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라고 한 후에 곧 이어서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18절에서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라고 했으며 19절에서는 아예 대놓고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정말 기도의 줄을 바로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와 자기 백성의 죄를 그처럼 진심으로 자복하면서도 결국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 쪽의 어떤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느 구절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하는 양심이나 자기의 겸손한 자세를 보시고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당신의 영광과 성호를 위하여 그 기도를 이루어 주십사고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벌을 받아 비참하게 된 당신의 백성과 이방 민족 앞에서 황폐하게 된 당신의 성전의 현실을 보시면, 하나님 편에서 절로 '주 자신을 위하여' 그 긍휼을 발동하여 구원해 주지 않으실 수 없을 것을 다니엘은 확신하면서 기도드렸던 것이었습니다.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 이 얼마나 멋진 기도입니까?

기도한다는 것은 사람이 무슨 조건을 내걸고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저것 요구 사항들을 열거해 놓고 하나님께 떼쓰듯이 달라붙는 것도 바른 기도는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는 오로지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하나님 앞에 솔직히 그대로 내어놓고, 오로지 하나님 당신의 긍휼하신 성품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간구하는 것입니다.
부모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감추고 인정하지 않으려고만 하는 자녀가 부모 눈에 사랑스럽게 보일 수 있겠습니까?
  
그저 "아빠, 엄마, 제가 잘못했어요."라고 한 마디만 하면 당신의 핏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부모의 본성은 당장 작동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과 흥정 따위를 할 아무 공로도 염치도 전혀 없음을 깨끗하게 인정하면서, 그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그 어느 부모도 자기 자녀가 벌 받고 풀 죽은 모습으로 남의 눈에 보이게 되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는 것은 하늘 아버지에게도 꼭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도 응답의 힘은 그 어떤 '기도 잘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 쪽의 자비하시고 인애하신 성품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신령한 기도 전문가'의 영력에 응답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면 그 중보자의 성호에 걸린 영광을 위하여서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드슨(Judson)이라는 선교사는 말하기를 "어떤 희생을 해서라도 기도만은 유지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기도만큼은 한사코 유지하려 하겠습니까?
바로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보다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것이 백배 천배 훨씬 더 낫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성도만이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기도만큼은 절대로 빠뜨리거나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아무리 나 자신은 기도드리기조차 염치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처지라 할지라도 그저 하나님의 긍휼하심만을 의지하여 기도함으로써, 그 어떤 경우에도 오로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의 자녀를 속히 구원해 주시고 당신의 몸 되신 교회를 반드시 축복해 주시는 응답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다니엘의 바로 이런 기도가 "시작될 즈음에" 즉시 응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본문 이후에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그처럼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간구한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해방' 정도가 아니라 '메시아의 도래'까지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응답은 즉시 이루어진 것인 동시에 먼 장래에까지 미치는 것이었으며, 완전히 성취된 것인 동시에 구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받은 응답이 되었던 것입니다.
  
젊을 때에 고난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인내하여 끝내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주의 일에 크게 쓰이는 교회의 일꾼이 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온갖 시험을 당하면서도 결코 실족하지 아니하고 이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전 생애를 다 바쳐서 충성스럽게 섬기는 전도자가 되는 것도 두말할 필요 없이 실로 위대한 인생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 위에 우리는 먼저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매사에 형통하고 모든 사명에 지혜롭고 능력있게 섬기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무엇을 하든지 간에 제일 먼저 '기도와 간구로 엎드리는' 준비자세부터 취할 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필연적인 응답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바로 내 속에 숨어 있던 방해 들보'를 발견하고 그것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기도라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의 자기 영광'이라는 엄청난 동기와 결과를 유발시키는 힘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라는 말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불신자들은 돌과 나무 앞에 물을 떠다 놓고 손을 비비면서 그런 기도가 마치 뚝딱 두드리면 당장 복을 떨어뜨려 주는 신통한 '복 방망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도 어쩌지 못하고 죽은 조상의 신주(神主)가 마치 살아 있는 자손들에게는 무슨 전능의 힘이라도 발휘하는 듯이 벌벌 떨면서 그 앞에 절하는 악한 풍습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무엇을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다룰 때 '신주 모시듯 한다.'라는 속담까지 생겨났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의 기도야말로 '주여'라고 외치는 첫 순간에 이미 다 응답을 받게 되는 신속하고도 확실한 능력이 있는 진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그 주님께서는 아예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응답이라는 것은 '얼마나 잘 기도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기도를 하느냐 안 하느냐?'에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응답은 벌써부터 다 준비해 놓으시고 오로지 우리가 기도하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는 하늘 아버지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기도와 '죄의 책임과 회개를 서로 나누는' 기도와 '하나님의 긍휼하신 성품에 의지하는' 기도를 드림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 자녀에게 속히 그리고 더 크게 내려 주시는 응답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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