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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없는 것처럼 하라 (고전 7: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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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것처럼 하라 (고전 7:29~31)

 
우리 사회의 계층 간의 갈등은 어제 오늘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근 그 갈등의 정도가 지나치게 심해진 것 같아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정부 시절에도 양극화 문제를 해소시켜 보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계층 간의 골만 더 깊어진 것 같습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 정권을 '강부자', '고소영' 정권이라고 부르면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봐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괜히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아닙니다. 사실 강남 부자 일색이었고 대부분 고대 출신으로 소망교회에 출석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좋은 뜻으로 펼치려는 정책까지도 국민의 지지를 받기보다는 심한 저항에 부딪히지 않았습니까? 계층 간의 거리를 좁혀야 할 마당에 오히려 정부가 앞장 서서 그 거리를 멀어지게 만든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일 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에 미국에서 비롯된 금융 위기 한파가 우리에게까지 몰아치게 된 것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주 우리는 참으로 끔찍한 사고 소식을 접했습니다.
서울 용산의 재개발 지역에 있는 한 건물 옥상에서 농성 중이던 철거민들을 강제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지 않았습니까? 이 사고의 진상에 대해서 저는 제대로 판단할 위치에 있지 못합니다. 다만 이 사고 관계자들이 서로 조금씩 상대를 배려했을 것 같으면 이렇게 끔찍한 참사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서로 양보했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 이런 현상은 다만 사회적 현상에 국한시킬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갈등과 소외, 분열과 다툼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 안에서도 자주 발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찌 보면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결책을 교회가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책은 전혀 없습니까? 이 시대에 덕을 세우고 화합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입니까? 왜 없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옛날 고린도 교회는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파당을 짓는 일이 있었습니다. 믿음 때문에 발생하는 가정 생활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 문란한 성생활도 있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느냐 마느냐 하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또 교회에서 나누는 공동 식사 때문에 심하게 상처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성령의 은사로 인한 혼란도 있었습니다.

그 많은 문제들 가운데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 7장의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이 실제로 겪었던 몇 가지 문제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가정 생활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몇몇 여인들은 믿지 않는 남편과의 이혼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또 성도들 중에 부유한 성도들도 있었지만 세상적인 안목으로 볼 때 약하고 가난한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에 비교가 되고 때로는 소외감을 느끼고 비관하며 낙심하게 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계속해서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없는 것처럼 하라!”
마치 아닌 것처럼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성도들을 배려하고 교회의 덕을 세울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먼저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라는 권고는 결코 결혼을 부정하거나 금욕 생활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남편이 믿지 않기 때문에 혼자 교회에 나오는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편과 함께 나오는 여인들을 부러워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남편들은 그런 여인들을 배려해서 아내와 함께하는 모습을 지나치게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왜 우는 자는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라는 것입니까?
남편이 믿지 않기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비관하는 여인들로서는 슬플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랑이 되시고 남자나 여자나 성도들은 모두 다 그 주님의 신부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슬퍼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라는 권고는 남편과 아내가 함께, 또한 부모와 자식들이 함께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을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나오는 것은 기뻐해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못한 성도들이 보고 비관하고 낙심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그 기쁨을 드러내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렇지 못한 성도들을 배려하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어서 매매하는 자들과 물건을 쓰는 자들을 언급하고 있는 까닭은 그 지역이 당시 상업이 매우 번창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고 권고하는 까닭은 교회 안에 부유하게 잘 사는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약하고 가난한 성도들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유한 성도들은 교회에서도 매우 오만하게 행동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약하고 가난한 성도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약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세상 물건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성도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들을 배려해서 비록 부유할지라도 드러내고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새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압니까? 외제차를 구입하는 일입니다. 그가 하는 말이 외제차를 타야 거래 회사나 관공서나 은행 등에서 자신의 회사를 탄탄한 회사로 인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어디 외제차뿐입니까? 아파트 평수가 몇 평인가, 학교는 어느 학교 출신인가 하는 것으로도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을 삼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자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인정받기 위해서 자랑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힘이 있는 척, 많이 아는 척, 그리고 돈이 있는 척합니다. 이런 것을 세상 사람들은 지혜롭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서라도 자랑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성도들의 가치 기준은 결코 이 세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 권고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종말이 가깝다는 것입니다. 종말이 올 것 같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새 생명을 얻고 영원한 천국을 향해서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침 안개와 같고 뜬구름과 같은 이 세상의 부귀 영화에 집착하거나 지나치게 자부심을 갖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 그런 것이 없다고 해서 너무 낙심하거나 비관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때문에 있는 자들은 있어도 없는 것 같이 하고, 없는 자들 또한 없어도 있는 것 같이 하는 삶의 자세가 성도들에게는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삶은 부유할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권력을 가졌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자랑거리가 있어서 기쁠 수도 있고 아니면 애통하거나 슬플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 부자이면 축복, 가난하면 저주, 힘이 넘치면 축복, 힘이 없으면 저주라고 가르치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자랑스러운 일이 있으면 감사하고 그렇지 못할 것 같으면 불평하고 원망하지 않습니까?

내가 만약 부유하면 내가 가진 재물로 힘을 발휘하고 잘 믿으면 나처럼 부자가 된다고 자랑하는 삶이 아니라 전혀 부유하지 않은 것처럼 겸손하게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도 내가 지금 가난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가난해도 전혀 궁핍하지 않은 것처럼, 마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살아야 마땅합니다. 아니 사실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하는 없는 것처럼 사는 삶이 우리 모두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삶이야말로 이 세상의 삶을 초월하는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도 분명히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13)
그렇습니다!

날마다 세상을 이길 능력을 공급해 주시는 주님과 함께 없는 것 같은 삶을 살면서 약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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