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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떻게 살 것인가? (삿 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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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삿 25:21)


1. 그 때에…

먼저 ‘그 때에’라고 되어 있는데  이 때는 언제입니까?  사사기 1장 1절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사기 다음 책인 룻기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라고 시작하는 걸로 봐서 룻기는 사사기와 같은 시대이고, 사사기 다음 시대는 사무엘서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대략적으로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사무엘이 등장하여 사울을 왕으로 삼을 때까지 약 200여년에 걸친 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임명 받은 훌륭한 지도자들이 사라지고 아직 왕이 통치하기 전, 역사적 용어로는 부족연맹체 정도의 단계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사실 사사기에 나오는 열 두 명의 사사의 출신을 살펴보면 열 두 지파 각각에서 돌아가면서 선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계속 사사, 사사라고 말하는데 사사가 어떤 뜻입니까?  분명 우리 말인데 성경 외에는 잘 쓰이지 않는 단어입니다.  사실 웬만한 사전에는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영어로 하면 조금 친숙할 겁니다.  영어 성경을 가지고 계신 분은 사사기가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Judges.  발음이 조금 어려운데요, 우리 말로 번역하면 심판관 혹은 재판관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판관기’라고 번역되어 있는 성경도 있습니다.  10여년 전에 ‘판관 포청천’이라는 중국 드라마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때에 판관이 오늘 이 ‘사사’입니다.  

사사기는 그 이름도 어색하지만 그 내용도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분들도 이 사람은 아실 겁니다.  삼손.  그 삼손이 바로 사사입니다.  예전에 성탄절만 되면 특선외화로 삼손과 들릴라를 방영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삼손과 들리라가 왜 성탄 특선인지는 모르지만 그 영화 덕분인지 삼손에 관한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거기에서 조금 더 성경적 지식이 있으신 분들은 기드온과 300용사라는 것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예!  기드온도 사사입니다.  그렇지만 여기 앉아 계신 대부분은 더 이상 사사의 이름을 나열하기가 쉽지 않으실 겁니다.  참고로 이름이라도 들어보시라는 차원에서 사사기에 나오는 다른 사사들의 이름을 말씀 드리자면,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등이 있습니다.  이러고 보니 몇 명 익숙한 이름이 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창세기로부터 시작하여 신명기에 이르기까지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를 지나면 있는 이 사사기가 룻기보다도 잘 안 읽히고 바로 사무엘상하로 넘어가게 되는 이유가 뭘까요?  사실 삼손, 기드온 등의 이야기는 주일학교 공과공부의 단골메뉴이기도 합니다만 사사기 전체를 아우르는 묵상들을 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른 이유들도 많이 있겠지만 사사기의 시대상이 우리들의 입에 담기 거북한 내용들, 특히 설교에서 언급하기 어려운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여러 사건들은 요즈음 신문의 자극적인 머리기사로 쓰기에 충분합니다.  예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살인마 아비멜렉 후계자를 노리고 형제 70명을 한 자리에서 살해
군 장성 입다 승리의 제물로 딸을 바치다
고위 공직자 삼손 적국의 창녀에 기밀을 누설하고 적군에 생포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있다는 사실이 낯설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오늘로 치자면 ‘19금’에 해당하는 내용들이 많은데요, 사사기에는 특히나 후반부로 갈수록 심의대상이 될 내용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 현실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버지의 유산 때문에 등 돌리는 형제들 이야기는 흔합니다.  고위층을 대상으로 한 미인계로비는 수 천년에 걸쳐오고 있구요.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사사기 같은 이 현실을 살면서 사사기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히브리어 단어가 많지는 않습니다만 평화를 뜻하는 샬롬은 익숙하실 겁니다.  그 앞에 엔을 붙이면 부정어가 되는데요 이것을 붙여서 표현 해 본다면 샬롬이 없는 엔샬롬의 시대!  어떻게 그럴 듯 합니까?  사실 신학서적에 관용구처럼 등장하는 말입니다.  구약에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엔샬롬의 시대에 살면서 샬롬을 외쳤고, 사람들 또한 그러한 엔샬롬의 선포를 좋아했습니다.  동시에 엔샬롬을 선포하던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가두고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엔샬롬 즉, 평화가 없는 세상인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교회에서만은, 설교에서만은, 샬롬을 듣고 평안하게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세상일도 복잡한데 교회까지 와서 싫은 소리 들을 이유가 없다는 거죠.  본문이 말하고 있는 그 때는 오늘과 비슷하게 바로 이런 공허한 샬롬을 외치던 엔샬롬의 시대였습니다.


2. 이스라엘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그 때의 이스라엘에 대해서 생각해보시죠.  여호수아 23장을 읽어보겠습니다.  시간 관계상 1, 5, 7절만 읽어보겠습니다.  줄여서 보자면,너희에게 안식을 다시 말해 샬롬을 주셨다, 이 주신 땅을 차지하라 그리고 우상숭배 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라 입니다.  그리하면 이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영원히 안식을 누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 아름다운 땅이 너희에게 무덤이 될 것이다라는 유언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사사기의 시작은 어떻게 됩니까?  1장 21절입니다.  27절부터 므낫세, 에브라임, 스불론, 아셀, 납달리, 단 지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약속으로 허락하신 땅 정복에 실패합니다.  

2장 2절부터 5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죽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 어느 날 분배 된 땅에서 이방인들을 제대로 내어쫓지 않았다고 여호와의 사자가 경고를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소리 내어 웁니다.  그리고는 어떻습니까?  

2장 6절부터 오늘 읽은 구절인 사사기 끝장 끝절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보김에서 울었죠.  그리고는 끝입니다.  교회를 조금 오래 다니신 분들.  가끔 기도회나 부흥회 혹은 수련회 등에서 가슴을 치며 울며 기도하신 기억들이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 그 이후 여러분의 삶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러분의 눈물이 삶에 이어지지 않고 보김에서의 눈물처럼 그냥 땅만 적시고 말았던 것 아닙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영혼이 샤워한 것처럼 개운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고, 엄격하게 말하면 시작을 한 것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성도간의 교제를 하고 다 좋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하루하루 달라지는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한 달, 한 달은 다릅니까? 아니면 작년 이 맘 때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 봤을 때 어떠십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좀 더 알고, 그리스도를 조금 더 닮은 모습입니까?  예배참석이나 성경공부 참석회수를 말씀 드리는 게 아닙니다.  내세울게 그것밖에 없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회와 관련 없는, 종교적 행위가 아닌,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어떠한 점이 달라졌습니까?  이웃을 더 사랑하시게 되었습니까?  화를 덜 내면서 유연해지셨습니까?  범사에 감사하고 계십니까?  1년은 너무 짧은가요?  2~3년 늘려서라도 돌아보십시오.  뭔가 조금 나아진 게 있습니까?  처음 믿기 시작할 때의 뜨거움 외에는 돌아보면 부끄러운 것밖에 없고 상승곡선이라기보다는 전반적인 하향곡선이지는 않으신지요.  살아가다 보면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신앙에도 부침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상승곡선으로 가야겠지요.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인 그 때의 이스라엘은 명백하게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향곡선임을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사사기의 저자는 이 두 사건을 사사기 앞과 뒤에 의도적으로 배치하여 두었습니다.  

먼저 1장 1,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리고 20장 18절을 봅시다.  이 두 구절은 쉽게 비교됩니다.  두 구절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앞두고 여호와 앞에 나와 묻습니다.  누가 먼저 싸우러 나가면 되겠습니까?  두 구절 모두 여호와께서는 유다가 먼저 갈찌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싸움의 대상이 달라졌습니다.  

1장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러 가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런데 20장에 와서는 열 두 지파 중 하나인 베냐민 지파와 싸우러 갑니다.  가나안과의 싸움으로 시작된 사사기는 열 두 지파 중의 하나인 베냐민 지파의 몰살 전쟁으로 막을 내리고 21장은 전후수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기 형제 베냐민과의 전쟁에 가슴 아팠던지 ‘나의 형제’, ‘나의 형제’ 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결국 베냐민 지파 남자 600명을 남기고 다 죽였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올 때 베냐민 지파 자손 수는 남자만 대략 45,60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마지막에 가서는 남자 600명만 남게 되었습니다.  베냐민 지파 안에는 결혼할 여자가 없어서 멸절의 위기까지 가고 그 대책 수습을 하는 장면이 21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사사시대가 끝나고 이스라엘이 그토록 원하던 왕을 새워달라고 했을 때 세워졌던 왕 사울은 바로 이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원래부터 열 두 형제 중 막내였던 베냐민 그리고 오늘 사사기에서 확인되듯이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에서 초대왕 사울이 배출됩니다.  그 때의 이스라엘은 이렇게 점점 하나님과 멀어져 가고 있었고,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간섭하고 있었습니다.


3. 왕이 없었으므로…

그렇다면 그 때의 이스라엘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본문으로 돌아가보면, 사사기의 저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이 구절을 해석하는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이런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사들의 시대가 지나가고 왕정시대에 살았던 사사기의 기자는 옛날을 돌아보면서 사사시대의 실패는 오늘과 같은 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라는 역사적 관점을 가지고 이야기했을 겁니다.  그럴 수 있겠죠.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런 반문이 듭니다.  왕이 있었다면 달라졌는가?  다윗, 히스기야, 요시야 등 몇몇 왕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신앙을 악화시킨 왕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사사시대의 문제는 정치적 안정과는 다른 문제였습니다.  

대선 때만 되면 우리는 많은 기대를 합니다.  이번에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좀 달라지지 않겠는가?  충현교회 장로님이 대통령이 되면 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전라도에서 대통령이 나오면 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권위적이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기업하던 사람이 하면 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왕이 혹은 대통령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아닙니다.  훌륭한 왕 혹은 제도적인 안정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한 왕의 부재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사무엘상 8장 4절부터 8절까지 읽어봅시다.  여기에서 왕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한 가지 재미 있는 사실은 사사기에서 ‘사사’라는 단어는 극히 제한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사기 2장 16절에서 나오는 ‘사사’는 복수형으로서 ‘사사들’이라고 해야 정확합니다.  그 외에는 사사 기드온, 사사 드보라처럼 쓰여진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용되는 곳은 11장 27절에서 심판하시는 여호와라고 할 때 이 ‘심판’이라는 단어가 바로 ‘사사’를 뜻합니다.  결국 사사기에서도 공정한 재판관이신 사사는 여호와 한 분뿐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왕이 없었다는 것은 누가 왕이냐의 문제로 보여집니다.  이 주제는 기드온과 그의 아들 아비멜렉의 이야기에서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사사기 6장32절을 보시면 기드온은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갖게 됩니다.  그 뜻은 ‘바알이 스스로 싸우게 하라’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밤에 몰래 바알 신상을 무너뜨렸는데 다음 날 사람들이 수소문 한 결과 범인이 기드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을 죽이려고 사람들이 찾아오니까 기드온의 아버지가 나서서 바알이 진짜 신이라면 바알이 벌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 바로 여룹바알입니다.  

  이후 기드온은 연전연승을 했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 기드온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8장 22, 23절을 읽어봅시다.  바로 그 이후 에봇을 만들어서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만 기드온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왕임을 분명하게 알고 그것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그것도 첩에 아들인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정실부인 자손들 즉, 자기의 배다른 형제 70명을 한 자리에서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됩니다.  그의 이름 아비멜렉은 ‘내 아버지가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왕이라고 말하던 기드온!  반면에 내 아버지가 왕이다 곧 내가 왕이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등극을 시도했던 아비멜렉!  사사기는 전체적으로 하강곡선을 그리지만 기드온과 아비멜렉의 이야기를 분기점으로 하여 그 하강의 정도가 분명하게 보여집니다.  기드온은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는 유혹 앞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시다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아비멜렉은 형제들을 죽이면서까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왕좌에 올리기 원했습니다.  결국 사사기 후반부에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표현이 4번에 걸쳐 후렴구처럼 반복됩니다.


4. 그 소견에 옳은 대로…

마지막으로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봅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 소견에 옳은 대로라는 구절을 생각해봅시다. 14장 3절에서 삼손이 자기의 아내를 고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 때의 동사가 바로 ‘그 소견에 옳은 대로’ 라고 번역되어 있는 그 동사입니다.  

‘그 소견에 옳은 대로’를 쉽게 말하자면 자기 마음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변화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어떤 일을 선택할 때 그 일이 옳으냐 그르냐를 문제 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좋으냐 싫으냐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을 느끼십니까? 살아가시면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의 기준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 일이 올바른 길인가, 혹은 이 일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가, 좀 더 노골적으로는 이 일이 얼마나 돈을 벌어다 줄 것인가 등의 기준을 잡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있어서 선택의 기준은 점차 ‘이것을 내가 좋아하는가’ 입니다. 살아오시면서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는 길의 결과가 어떤 것이었는지 알지 않습니까?  청년들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내가 가고 싶은 길과 그렇기 않은 길이 있다면 하기 싫은 길로 가라.  그러면 거의가 올바른 길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다라구요. 물론 극단적인 방법입니다만 우리는 우리 좋을 대로 편할 대로 하면 점점 안 좋은 쪽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오늘 읽은 사사기의 마지막 구절은 결국 이렇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고 모두 자기 마음대로 살았다.  

그런데 이렇게 놓고 보니까 현대인들이 살아가야 하는 이상적인 모델이 되었습니다. 후대에 역사가들은 우리들을 이렇게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1세기 사람들은 중세의 사람들과는 달리 종교에 얽매이지 않았고, 19세기까지의 사람들과는 달리 전통과 관습에 얽매이지도 않았고, 20세기의 사람들처럼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강박도 없었으며, 정말 자유롭게 감성적으로 본능에 따라 각자의 꿈을 이루며 살았다.  그럴 듯하고 좋아보이죠?  

21세기 포스트모던의 철학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종교, 관습, 이성의 굴레를 벗어버려라. 그건 다 정신적으로 스트레스일 뿐이다. 지금 당신이 원하는 바로 그것을 해라. 그런데 이것은 3000여년전 사사들의 시대 바로 그 때에, 왕도 없이 어떠한 기준도 없이 사람들이 각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던 그 때의 모습입니다.

다시 한 번 사사들의 시대의 이스라엘을 생각해봅시다. 이집트에서 바로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을 주시면서 한 가지 당부를 하셨습니다. 가나안의 신을 섬기지 말고 오직 나만 섬기며 살라고…  그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에덴동산의 아담에게 하신 것과 같았습니다.  동산 나무의 실과는 다 먹을 수 있었고, 오직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만 먹지 않으면 되는 것처럼 말이죠.  힘들 때면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담이 그 때 선악과를 먹지만 않았더라면… 내가 아담이었으면 안 먹었을텐데, 라고 말이죠.  그런데 사사기 시대에도 똑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에덴동산처럼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하셨던 것처럼 이방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만을 신신당부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으로 주신 땅을 차지하지도 못하였고,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심지어 단지파는 그 땅에서 쫓겨나 북쪽으로 도망가서 살았습니다. 

그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왜 이렇게 쉽게 변해버렸습니까?  유목하며 광야에서만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보면서, 농경과 도시의 생활을 보면서, 그들의 선진문명에 반해버렸습니다.  어서 빨리 그들의 기술을 체득해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광야에서나 유용했지 이제 계절에 따라 씨를 뿌리고 추수하려면 농경의 신이 필요했고, 곳곳을 다니면서 장사를 하려면 안식일, 절기에 따른 제사들이 거추장스러웠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약 시대 내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방신과 겸하여 섬겼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별반 다를 바 없는 상황입니다.  세상 사람들 기준에 맞추려면 영어도 잘 해야겠고, 자격증도 있어야겠고, 줄도 있어야겠고, 겉모습도 가꿔야겠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이렇게 있다가는 도태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 좋죠.  하지만 그건 오래 전 이야기이고 현실은 그렇게 녹녹치 않다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다만 겸하여 섬길 뿐입니다.  교회 안 나오면 조금 찜찜하니까, 1주일에 한 두시간 나와서 앉아 있기만 하면 되니까, 이 정도는 보험처럼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는 성경공부나 기도회도 참석할 수 있습니다.  보김에서 울었던 것처럼 말씀을 듣고 찔리고 슬퍼서 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대부분이 머물러 있습니다.  

사사기 어느 부분에서도 진정한 회개가 없었고, 하나님이 원하시던 공평과 정의가 있는 공동체는 실현되지 않았으며, 그들 사이에 있는 이방신들은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위급할 때면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점점 하강 곡선을 그리다가 결국 단 지파는 분배된 땅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도망가고, 베냐민 지파는 멸절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셔서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로보트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진정한 인간다움으로의 회복이 있습니다.  또한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자유에서부터 십자가에 죽일 수 있는 자유까지 허락하셨습니다. 아담이 선악과가 아닌 다른 실과들을 선택해서 먹을 수 있었습니다.  실수로, 다른 것이 맛이 없어서, 혹은 너무 배가 고픈데 마침 선악과밖에 없어서 먹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담은 그것을 알고 분명하게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선택하여 먹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여러 선택의 상황에서 하나님만을 택하여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 직전 여호수아의 유언을 봅시다.  여호수아 24장 15절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왕으로 정하여 섬기며 사는 삶을 택하였습니다.

여러분 오늘 설교본문은 짧은 구절이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2008년을 여러분은 어떻게 사셨습니까?  혹시 사사기처럼 하강곡선을 그리면서 내려오시지는 않았습니까?  중간중간에 울며 안타까워 하던 적은 있었지만 보김처럼 끝나버리지는 않으셨는지요.  

여러분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지만 결과는 정해져 있습니다.  아름다운 땅에서 샬롬을 누리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나의 형제 베냐민을 밟기도 하고, 단 지파처럼 쫓겨나기도 하면서 멸절의 땅에서 엔샬롬으로 살 것인가.  이 두 가지 결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2009년을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왕 없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만을 택하여 섬기겠다던 여호수아의 외침에 따라 가시겠습니까?  

좀 더 길게 볼까요?  여러분의 인생이 사사기처럼 마무리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여호수아의 유언처럼 마무리 되기를 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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