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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알고계시는 주님 (요 1: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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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고계시는 주님 (요 1:43~51)


오늘 말씀은 우리 구주 예수님과 제자 빌립과 간사함이 없는 사람, 나다나엘을 만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 하나님의 속성을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 예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다 알고 계시며,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도 다 알고 계시며, 우리의 앉고 서는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 속에 가진 모든 것을 아시기에 우리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속사정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은 한편 두려운 마음도 들지만,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고, 힘을 주시고 있습니다.  

히4:13 말씀에서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행1:24에서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서는 인구가 60억 명 이상이 살고 있습니다.  그 중의 우리 한 사람이라는 수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 수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알아주실 때에 우리 한 사람을 온 천하보다도 귀한 존재로 받아주시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당신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10:29-31에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도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맞아떨어져야 죽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 주님이 빌립이라는 제자를 선택하시는 내용과 빌립의 친구인 나다나엘이란 사람을 선택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빌립이라는 사람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헬라식 이름으로, 말을 사랑하는 사람, 말을 잘 타는 사람이란 뜻이 있습니다. 예전에 말을 사랑하고 말을 잘 타는 사람이 있었는지, 그런 이름을 유대인에게도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헬라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헬라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에, 먼저 빌립에게 다가와서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라고 말을 붙일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자기 고향 사람인 안드레게 가서 말씀드리고, 다시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님에게 가서 그런 사실을 알려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빌립이란 인물이 두 사람이 나오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빌립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12제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초대교회가 세운 7집사님 중에도 빌립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사도빌립과 집사빌립을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빌립이 벳새다 출신이라는 것을 밝힌 것은 그도 어부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갈릴리바다 주변에 형성된 마을에 살던 젊은이들은 농사를 짓고, 어업에 종사하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게 되었는데, 우리 주님은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나의 뒤를 따르라, 나의 제자가 되라는 초청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의 시제를 보면 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 지속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말로, 계속해서 따르라, 제자로서의 삶을 살라는 명령입니다.  빌립은 길에서 주님을 만났는데, 주님의 부르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빌립의 사람됨을 아셨습니다.  그가 열정을 가진 사람이요, 해박한 지식도 소유한 사람인 것을 아셨습니다.  빌립은 영적인 일에 관심도 많았고, 알고 믿고 싶어 하는 열정도 있었습니다. 빌립은 주님을 따르면서, 그의 친구 나다나엘을 주님 앞에 인도하였습니다. 빌립은 인간관계가 좋고, 다른 친구들로부터 신뢰심을 가질 수 있었던 인물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은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메시아대망 사상에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나다나엘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말했습니다.  

당시에 성경을 조금이나 안다는 사람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예언하기를 자기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여러 번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그 선지자”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복음서에도 나오고, 사도행전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신명기18:15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라는 말씀도 장차 오시리라고 약속하신 선지자들의 예언입니다.  

문서선지자로 이사야는 고난 받는 종으로 오실 메시아를 말씀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오실 메시아를 말씀하셨습니다. 다니엘은 “인자같은 이”를 말씀하셨습니다. 미가선지자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스가랴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메시아를 말씀하셨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언약의 사자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선지자들이 외친 그 선지자, 메시아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빌립의 친구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이 말은 갈릴리 지역의 격언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나사렛이란 동리는 지금까지 유명한 사람이 나온 적이 없는 시골의 아주 작은 동리에 불과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의 고향인 가나라는 동리와 비슷한 동리였습니다.  

그러자 빌립은 “와서 보라”고 하였습니다. 빌립이란 사람은 친구에게 진실을 말하였으나, 친구가 받아들이지 않으니, “와서 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정말 친구를 신뢰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보입니다.  전에부터 빌립이란 사람은 진지한 사람이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요, 신앙도 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메시아를 만났다고 하며, 받아들이지 않자, “와서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견해를 지닌 사람에게 계속 설명해보았자, 싸움만 일어날 것이요, 효과도 없는 말싸움만 계속될 것입니다.  직접 와서 그가 메시아인지, 아닌지 알아보면 될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주셨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바돌로매라는 인물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바돌로매라는 이름의 뜻은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바돌로매의 본 이름은 나다나엘이요, 유대인들이 쉽게 바돌로매라고 부른 것 같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바돌로매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요한복음에는 전혀 바돌로매라는 이름으로 나오지 않고, 바돌로매가 나와야 할 자리에 나다나엘이란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에게 나다나엘이 오는 것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나다나엘의 인격을 통찰하시고 그의 진면목을 알아주시고, 그의 진심을 알아주시고 있습니다.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요, 그 속에는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은 거짓이 없다는 말입니다.  “보라”라는 말씀은 단순히 바라보라는 말이 아니라, 감탄사입니다.  감격하여 보라는 말입니다.  “저 사람이야말로”, “아, 저 젊은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깊은 속사정까지 아시고 내면의 실상을 꿰뚫어 보시고 있습니다.  우리의 비밀한 생각까지 알고 계십니다. 

본래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은 간사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전의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복을 받으려고 노력하였으며, 진실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야곱을 깊이 살펴보면 간사한 점이 아주 많은 사람입니다.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간사한 사람을 변화시켜 이스라엘로 만들어 가시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야곱형의 사람과 이스라엘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곱형의 사람은 사람 본위로, 물질본위로 살아가는 유형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형의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야곱 유형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이스라엘형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나다나엘을 보시고,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신 것은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란 말이요, 야곱형의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형의 사람이라고 하는 칭찬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이 간사해지고 거짓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진실하게 살아가고 있었기에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에게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우리 주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게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읽다보면 가슴이 뜨끔뜨끔해집니다.  우리 주님은 일일이 말씀하지 않으시니 그렇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시139: 1-3에서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라고 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이 가보자고 하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던 것은 빌립도 전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에게 가서 고자질하여 사전에 입을 맞추고 그럴듯하게, 믿음이 가도록 사전에 짜고 접근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였습니다.   약 5m 정도의 높이로 자라고, 약 8m 길이의 가지를 가지고 있어 유대인들은 마치 야외에 갖춘 또 하나의 방처럼 사용하는데, 기도와 명상을 위한 조용한 장소로 즐겨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민족의 장래를 놓고 기도하며, 특별히 메시아의 오심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되신다는 다른 말씀입니다.  나다나엘이 기도하는 것을 보셨고, 그의 기도의 내용도 다 아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호6:1에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앉으며 서는 것이며, 우리의 생각과 말도 다 알고 듣고 계십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셨고, 내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주께서 나를 찾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나다나엘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나, 허물이 있는 것도 보셨을 터인데, 그가 가장 경건하고 아름답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그 열정을 보아주시고 칭찬하시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자기를 알아주는 예수님을 자기의 스승으로 알고 일생 살아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자기 앞에 있는 예수님은 단순한 선생이나, 한분의 랍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위대한 선지자요, 선지자보다 더 먼저 있었고, 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요1:49입니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위대한 고백의 하나입니다.  나다나엘이 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되신다는 말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말은 단순한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정리하여 말씀해주십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보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과거 솔로몬 왕 시절은 이스라엘에서 아주 번성한 시기였습니다. 왕상4:25에서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고 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미가4:4에서 예루살렘의 회복을 예언하였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미4:4)고 했습니다.  스가랴도 메시아 시대를 내다보면서 슥3:10에서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베이커(K. L. Baker)라는 신학자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영적으로 큰 은혜를 받은 상태”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라이트프트(Lightfoot)는 “이 때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며, 기도와 명상에 잠겨 있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이 회개한 곳은 무화과나무 아래였다고 합니다.  “나는 한 무화과나무 아래 쓰러져 엎드려 정신없이 눈물에 잠겨 있었나이다.  그리고 내 눈에서 홍수처럼 터져 나오는 그 제물이 주 앞에 상달하였나이다.”(참회록2:8)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집에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을 공간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 영혼의 무화과나무를 가꾸어야 합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51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늘이 열립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이 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야곱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제는 예수님이 참된 언약의 중보자가 되시고, 하늘가는 길이 되시고, 생명이 되시고, 진리가 되어주시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대표자가 되시기에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중보자가 되어 주십니다. 

옛날 야곱은 벧엘에서 잠을 잘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늘부터 사다리가 내려고 천사들이 그 사다리를 통하여 오르락내리락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야곱과 언약을 맺으신 것을 말씀하시고 있지만, 이제는 예수님이 새언약의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을 그림언어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도 나의 무화과나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단순과 고독을 길러야 합니다.  세상을 떠나서 은밀한 기도한 기도의 장소로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고, 하나님 향하여 하나님 앞에 앉아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우리 주님의 은총을 감사하는 나만의 시간,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내면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 7명의 제자들이 갈릴리바다로 고기 잡으러 갈 때에 함께 그 자리에 있을 만큼 주님의 일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붙잡고 깊이 연구하여야 합니다.   나를 알아주시는 주님 나도 주님으로 인하여 새로운 인생을 산다고 고백하면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의 왕이 되신다고 고백하여야겠습니다.  

여러분의 무화과나무는 어디입니까?  얼마나 자주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고 있습니까?  여러분, 기도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습니까?  삶의 우선순위를 무엇에 두고 있습니까?  기도하시는 시간에 주님이 어루만져주시는 손길을 느껴보셨습니까?   우리도 주님을 위한 꿈, 주님과 함께 하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모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사다리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주님을 묵상하며,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위하여 헌신을 다짐하면서 기도할 때에 하늘이 열리며, 주님이 하늘가는 길이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것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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