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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바라보며 판단하라 (행 4: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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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바라보며 판단하라 (행 4:5~22)


한 아이가 친구 아버지가 나이도 많지 않은데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하나님은 왜 친구 아버지를 일찍 죽게 하셨어요?" 아들의 질문에 대답이 궁한 엄마는 “응, 그 분이 착하셨어. 하늘 나라에 필요하여 하나님이 일찍 데려가신 거야.” 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날 저녁 이 아이가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착한 사람은 빨리 죽는다면서요? 엄마가 말하는 걸 들었어요. 저는요, 솔직히 말씀드리는데 항상 착하지는 않아요.”

두려움은 우리가 믿는 모든 진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우리에게 두려움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결정적인 약점은 용기를 내어야 할 때 용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아도 진리 편에 설 용기가 없습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고도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어려움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그 진리 위에 굳게 서지를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믿는다면 반드시 고난의 테스트를 거쳐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에 대한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잘 믿는다 하던 사람이 어려운 일을 만나면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이 정말 복음이라면 고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힘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4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에게 대 핍박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체포 당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면서 걷지 못하던 자가 일어났습니다. 구원의 복음이고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왜 잡아 가두고 핍박하는 것입니까? 

복음의 특성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저 좋은 말씀이 아닙니다. 착하게 살라 죄짓지 말라는 말씀이라면 핍박이 일어날 이유가 없습니다.
복음이란 죄와 저주에서 구원받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죄와 마귀의 종노릇하던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메시지입니다. 복음은 악한 영과의 무서운 영적 싸움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해질 때 마다 사실상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악한 영과의 전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에 들어가 복음을 증거하였는데도 아무런 일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핍박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정말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 되려면 두려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믿음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두려움에 흔들리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결코 예수의 사람인 것과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두려움이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복음을 드러내고 살 수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핍박 앞에서 당당했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섰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당시 유대 나라의 종교와 정치를 통합한 최고 권력 기구입니다. 여기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까지 재판해 버립니다. 예수님도 여기서 사형 선고를 받고 빌라도를 통해서 사형 집행을 당한 것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 자리에서 재판 받으실 때, 베드로는 벌벌 떨다가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그 자리입니다. 그 현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다시 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 두려운 자리에서도 당당하게 예수를 전할 수 있었을까요? 
19절을 주목해 주십시오. 더 이상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도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하는 산헤드린 공의회를 향해서 베드로가 무엇이라 담대하게 외쳤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 공회보다 더 큰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의 증거입니다. 자기 눈 앞에는 지금 공회의 회원들 71명이 무서운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사람들이었고 지금 예수의 제자들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서 베드로가 본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충만함은 우리에게 어느 순간에나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하는 분명한 믿음을 우리에게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40일 지난 후에 승천하신 것 뿐만 아니고, 지금 우리 가운데 우리 마음에 오셨다는 그 사실을 성령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주십니다. 이 믿음이 지금 베드로에게 충만한 것입니다. 8절에 보면 그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 대답을 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보름스 의회 앞에서 종교재판을 받았습니다. 당시 종교재판은 무시무시한 것이었습니다. 죽이고 살리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마틴루터는 담대하게 종교개혁을 하는 자기의 입장을 밝히고 마지막에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Oh. God, Here I stand." (하나님이여 제가 여기 서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에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종교개혁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만 해도 유대인들이 이를 갈며 돌을 던질 때,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서서 내려다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상황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서 보셨습니까?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가시떨기 나무 앞에 있을 때, 엘리야가 호렙산 동굴 앞에 섰을 때,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가서 눈이 열려서 하나님을 보았을 때,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말씀에 의지해서 많은 고기를 잡았을 때,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완전히 변형되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은 한결같이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전에는 그저 하나님이 계시겠거니 막연히 믿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눈이 뜨였을 때 그들은 경외함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토록 커보이고 두렵게 보이던 세상, 그동안 심각하던 문제는 콩알처럼 작게 느껴졌습니다.

야곱이 들판에서 돌베개 베고 자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야곱이 벧엘 들판에서 그가 잠들 때까지만 해도 그는 너무너무 두려웠고 외로웠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돌베게를 베고 들판에서 잠을 자야 되는 신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 밤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주셨습니다. 눈이 열려서 하나님 보좌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잠이 깼습니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두렵지가 않았습니다. 그가 그곳에 제단을 쌓고 고백했습니다.

 창 28: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셨지만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았을 때는 두려움 속에 사로 잡혀 있었고, 영적인 눈이 뜨이니까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열왕기하 6장에 아람 군대가 도단 성에 있는 엘리사를 죽이려고 군대를 보내 포위하였을 때, 새벽에 엘리사의 사환이 이것을 보고 죽음의 공포에 떨며 두려워하는데, 엘리사는 태연했습니다. 상황은 같은데, 두 사람의 믿음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하나님께 종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선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왕하 6:16-17) 그 순간 그 사환의 마음에도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우리게 보게 되면 더 이상 세상에 큰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나를 두렵게 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수필을 읽었는데, 그가 생전 처음 바다를 보았을 때 심정을 쓴 글이었습니다. 충청도 오지 출신이라 청년이 되어서 친구와 함께 처음 바다에 가보았다고 했습니다. 이미 그림으로 사진으로 영화로 보았었지만 실제 바다를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답니다. 그는 바다를 보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바다가 그렇게 큰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바닷가에서 살았기에 그 사람의 마음을 다 공감할 수 없었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바다가 큰 것을 보면서 또한 자기가 너무나 작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자기 문제, 자기 계획, 자기 삶이 너무 작다는 것을 느끼며 울었다는 것입니다. 
  
바다 하나를 보고도 이런 느낌을 받는다면 하나님을 본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우리가 가진 판단, 생각, 계획, 모든 것이 다 바뀌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면 두려울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 크다, 힘들다, 어렵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바다 하나를 보고 그럴 수 있다면 하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도대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하나님을 막연하게 생각하고 믿으니까 하나님을 믿어도 삶이 변했다는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눈이 뜨이고 나면 이 세상에 더 이상 무서운 것이 없어집니다. 그 동안에는 큰 것도 많았고 놀랄 것도 많았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난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다 달라져버리고 맙니다. 

에스더에게 동족 유대인이 다 죽을 위기에서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왕에게 나아가 동족을 살려달라고 간청해야 할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에스더가 동족 유대인들이 멸족하게 되는 심각한 위기에 부디쳤을 때 삼촌 모르드개가 ‘네가 왕비가 된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니냐?’ 하는 말을 하므로 아하수에로 왕 앞에 담대히 니갈 사명을 받았습니다. 왕 앞에 나가서 내가 사실은 유대인이고 내 동족이 내일이면 다 죽게 생겼으니 우리 동족을 살려주십시오. 그 부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왕비라도 왕 앞에 나가면 죽임을 당하는 당시 풍습에 이것은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 그녀는 “죽으면 죽으리라” 결심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와 같은 사명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죽으면 죽으리라!’ 여러분은 한번이라도 그런 심정으로 살아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 자신 없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한번도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면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할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하는 고백을 주저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더 이상 그것은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죽음도 문제가 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엄청나고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눈 앞에 캄캄해지는 고난의 순간이 오더라도 가야할 길이 오히려 더 훤히 보입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사는지 어떤 길이 복된 길인지 너무너도 선명해 지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베드로가 자기들 앞에서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것을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행 4: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그들이 오히려 기가 질렸습니다.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 앞에 재판 받으러 서있는 사람 중에 말 한마디 제대로 변변하게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지식이 많은 사람도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한과 베드로는 제대로 공부를 한 사람도 아닌 범인인데 어떻게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는가? 그들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것 같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진 자 앞에서 스스로 위축된 것입니다. 

그들은 많이 배워야 말을 잘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많이 배워서 말 잘하는 자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서 말 잘하는 자는 다릅니다. 그 차이는 엄청납니다. 배워서 말 잘하는 사람은 두려운 순간이 오면 오히려 입이 닫혀버립니다. 그리고 말을 버벅 거리게 됩니다. 두려움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어려움과 문제가 생길 때 다릅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평소에는 말 잘합니다. 그러나 두려운 일이 생기면 아무 소리도 못하고 말을 더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두려운 일이 닥쳐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인 사람은 두려운 것 자체가 없습니다. 그의 입을 다물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어떤 환경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요한은 오히려 당당하게 그들에게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구원받을만한 다른 이름이 없다고 증거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말라고 위협하는 산헤드린 공의회를 향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하나님 앞에서 판단하라”고 외쳤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어려운 순간을 만날 때 어떻게 할 것인지, 두려운 마음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가룟유다가 제자로 부름받은 사람이었고 3년을 예수님과 함께 살았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이었는데, 언제 무너졌습니까? 십자가 고난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십자가 고난이 두려워서 결국 예수를 판 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의 시험 앞에서 두려워할 때 예수님을 부인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십자가 고난 앞에서 그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여러분도 밤잠을 자지 못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하지는 않으십니까? 그러나 두려움이 결코 괴로운 환경 때문 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앞이 캄캄할 뿐인 것입니다. 

베드로 요한, 그 겁쟁이들이 달라졌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받는 그 순간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담대하게 증거하였습니다.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성령이 임하신 다음,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고난 앞에서 무너지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고백하였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난도 있으리라!’ 
그 때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 핍박이 오게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입니다. 여러분, 준비 되셨습니까? 어떤 고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예수님만 따라갈 준비가 분명히 되셨습니까?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고난의 길로 인도하신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항상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더 이상 고난은 고난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두려움으로 묶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순간은 언제인가?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순간입니다. 환경과 여건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함께 계시는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받은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계속해서 눈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았다는 이야기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떤 어려운 일이 와도 문제가 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전도단의 오대원선교사님께서 한 번은 미국의 한인 2세 중학생들을 데리고 여름 수양회를 인도할 때, 약 1주일쯤 뉴욕시 할렘가에 데리고 가서 노방전도를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어떤 어머니가 와서 화를 내시며 어떻게 어른들도 무서워하는 곳에 딸을 데려가서 전도하게 하냐고 말했습니다. 그 때 오대원 선교사님께서 말했습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방학 동안 제일 위험한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가만히 누워 콜라를 마시며 TV를 보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사탄이 마음대로 역사하는 자리입니다. 거기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유혹을 받고, 타락하고 넘어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주십니다. 한번도 어려움을 당한 어린이가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순간이 가장 두려운 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면 위험한 자리, 편안한 자리가 달라 보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세상 어디도 두려운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다. 그것을 계속 확인하셔야 합니다. 만약에 이것이 분명하다면 모든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가져도 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든 어떤 일을 겪든지 여러분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심만 확신한다면 되어지는 모든 일에 확신이 생깁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핍박이 왔습니다. 체포를 당했습니다. 나중에는 매를 맞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베드로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키신 일에도 주의 계획이 있었다면, 복음을 전한다고 체포를 당하고 핍박을 받게 하신다면 거기에도 주님의 계획이 있지 않겠느냐고 믿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 19-34절에 보면 옥에 갇혀서 매를 맞고 빌립보 옥중에서 사도 바울이 찬양할 때 옥문이 열렸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자에게 소원이 있다면 특히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경우, 옥에서 빨리 나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옥문이 열렸는데도 섣불리 옥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내게 옥문이 열렸을까?’ 생각하며 옥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옥에 갇힐 때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으니 그 한밤중에 찬송과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옥문이 열린 것이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생각했습니다. ‘만일 나를 이 감옥에서 내 보내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애초에 나를 이곳에 갇히게 두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겠는가?’ 여기에 사도 바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매사를 자기 유익,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중심, 하나님 시각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판단은 정확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바울을 그 감옥에서 꺼내 주시고자 함이 아니라, 그 감옥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감옥 문이 활짝 열렸는데 감옥 안에 있을 죄수가 누가 있겠습니까? 빌립보 감옥 간수장이 지진이 일어나고 옥 문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감옥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감옥 문이 다 열렸습니다. 간수장은 생각했습니다. 죄수들이 다 도망갔겠구나!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감옥 문이 활짝 열렸는데 감옥 안에 있을 죄수가 누가 있겠느냐 말입니다. 그 간수장은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어차피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고 죽어야 될 것이라면 자기 손으로 자결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감옥 안에서 소리쳤습니다. “당신 몸에 손대지 마시오! 우리가 지금 그대로 있소!” 빌립보 감옥 간수장이 깜짝 놀랐습니다.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열린 것도 그랬지만 어떻게 옥문이 열렸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사실! 큰 충격, 간수는 이 사람들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날 간수장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빌립보 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진짜 믿고 항상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을 확신하고 살 때 우리 삶의 모든 일에 대한 확신이 생깁니다. 이것은 내게 저주가 아니고 실패가 아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위한 계획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고 나면 우리 안에 놀라운 믿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정말 나와 함께 계십니다. 나를 버리시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보면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 내가 겪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이 믿어집니다. 이 믿음이 분명하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십자가를 붙잡은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바로 “하나님 앞”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세상을 향해서 담대하게 보여주어야 할 모습입니다. 
 
여러분에게 책 한 권을 소개합니다. 댄바우만이 쓴 [아름다운 능력의 길 예수]라는 책입니다. 

[아름다운 능력의 길 예수]에서 댄바우만이 1997년 이란에 단기선교를 갔다가 출국 과정에서 간첩이란 억울한 죄로 이란 감옥에 갇혀 지낸 9주간 동안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빨리 그곳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감옥에서 매를 맞고 고문을 당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에게 물어보려무나.’ 그러나 그는 하나님은 틀림없이 뭔가 자기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이 있음을 알지만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자기는 거기서 빨리 나가는 것만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워낙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는 묻습니다. ‘하나님, 제게 말할 수 없이 폭행하고 고문하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때 그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신의 마음 속에 자신을 심문하던 그 사람에 대한 사랑과 긍휼함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때리고 고문하는 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지옥과 같은 몇 주를 보내고 어느 날 감방에 돌어와 서 쓰러져 있는데 밖에서 간수들이 하는 이야기가 귀에 들려왔습니다. 간수들은 페르시아말로 이야기를 했지만 그는 이란 선교를 준비하면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들은 이해할 수 없어. 그들은 매를 맞고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자꾸 오는지.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우리가 그들을 죽이려고 하는데 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는지 더 이해할 수가 없어.’ 그때 그가 자기 방에 도청장치가 되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감방에서 자기를 고문하던 간수와 이란을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다 들은 것입니다. 

그때 또다른 간수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좀 알아. 전에 한번 들은 적이 있어.’ 하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댄바우만이 깜짝 놀랐습니다. 며칠 동안 그들이 하는 대화를 들으면서 더 놀란 것은 그 중에 세명이 예수를 영접한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복음을 나누면서 ‘나도 저 사람들과 같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싶어, 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나도 가지고 싶어.’ 
  
그렇게 9주가 지났습니다. 이제 마지막 사형 판결을 받는 재판석에 섰습니다. 그런데 판사가 판결문을 낭독하는데 무혐의로 석방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려와서 자기를 포옹하더랍니다. 

댄바우만이 하나님이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사랑하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신 것이 어떤 뜻인지를 비로서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지 않았다면, 아마 댄바우만은 그 일생에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계속 열어주십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 앞에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 동안 내가 본다고 하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했던 일인가, 도대체 무엇이 어려운 일이며 도대체 무엇이 힘들며, 무엇이 도대체 크며. 그 동안 내 눈으로 보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을 무시했던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경멸했던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제가 성령 안에서 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제가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말 알기를 원합니다.

“주여, 종이 본다고 생각했던 것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본다고 하면서 죄짓고 의심하고 함부로 말하고 살았습니다. 
주를 경멸하였으며 무시했으며 방자하게 행하였으며 거짓된 자였습니다.
주여 다시 한번 눈을 열어 주옵소서!
핍박 앞에서 유혹 앞에서 갈 길이 분명히 보이게 하옵소서!“

하나님 앞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든지 두려움에 반응하면 안됩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 간절히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제가 이제부터는 무엇을 본다고 쉽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때 내가 하나님 앞에 있다고 고백했던 그대로 하나님, 제 눈도 열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세상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 문제보다도 더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뜨고 모든 것을 판단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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