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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회자란? (행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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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란? (행 2:42)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일전에 어떤 점쟁이가 낸 광고에서 ‘집사, 장로, 목사도 환영’이라는 문구가 실렸습니다. 이런 광고를 보면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이 점을 보러 가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 속상한 것은 목사도 환영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만큼 목사의 권위도 땅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목사로서 하기 쉬운 설교는 아니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기에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 한 번 쯤은 해야 할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한 선교사님이 아프리카에 선교하러 갔는데, 사자를 만났습니다. 사자와 싸울 수도 없고, 너무 급한 나머지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사자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지켜 주세요.” 그리고 눈을 떠 보니 사자도 감동을 받았는지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라 기도하나 들어보니 사자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깨니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선교사님이 ‘아! 입장이 다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선교사님의 입장은 사자에게 먹히지 않는 것인데, 사자의 입장은 일용할 양식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따라 합시다. “입장이 다르다.” 

부엌에서 들으면 며느리 말이 맞고 방에서 들으면 시어머니 말이 맞습니다. 그러니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입장에서 며느리를 이해하고 덮어주어야 됩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됩니다. 목사의 입장과 성도의 입장이 다르겠지만 목사의 입장에서 성도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예루살렘교회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오순절날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께서 바람처럼 불처럼 임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자 120문도에게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교회생활은 마치 천국생활을 보는 듯합니다. 그들은 날마다 모여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고, 함께 교제하고, 성찬식을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고, 심지어 재산을 팔아서 서로 나누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운 생활을 본 세상 사람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 결과 주님께서 구원 받는 사람의 수가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이 강력하게 이끄시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강력한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귀하게 사용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들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목회자인 것입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사역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의 영적 생활은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되어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령이 이끄시는 교회의 중심에 있던 목회자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목사의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목사를 성경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셔서 자신의 신앙생활에 큰 유익을 얻으시고 목사의 목회를 돕는 좋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목회자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에 기도하는 사람 아나니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바울에게 직접적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통해서 있었으나, 바울은 자신을 사람이 불렀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갈 1:1에 보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이라고 고백합니다. 

목사의 자긍심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확신에서 오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하나님이 부르셨다. 나는 하나님의 종이다”라는 확신이 목사를 목사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흔들리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자기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누구인가를 확신하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 나는 하나님의 종이다”라는 확신이 부족할 때 흔들리는 것입니다. 


목사는 무엇보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목사의 자격을 볼 때,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갖추었느냐 등을 봅니다. 심지어 어느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를 청빙하는데 키가 175cm는 되어야 한다는 조건까지도 내놓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조건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목회를 맡기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를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요21장에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후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목사는 말씀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신앙생활의 키는 사도들이 가리친 말씀입니다. 본문을 읽어봅시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주의 종들은 말씀을 잘 가르쳤고, 성도들은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들었고 믿는 자들의 수가 더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의 가르침을 잘 받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신앙생활에 생명과 활기가 충만합니다. 히 4:12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습니다. 살아 있고 활력 있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면 그 사람의 영혼이 살아나고 활력 있게 운동력 있게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신 32:1-2절에도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채소 위에 내리는 비 같고 이슬 같고 단비 같습니다. 이슬과 비를 맞은 채소가 쑥쑥 자라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좋은 마음으로 듣는 성도의 믿음은 자기도 모르게 쑥쑥 자라는 것입니다. 

목사의 설교는 세상적인 가치나 상식선에서 해서는 안 됩니다. 고후 13:3에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세 번째 가려는 이유가 나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울이 가진 지식도 아니며, 세상의 윤리도 아니며, 상식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서 증거 하려고 하셨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목사는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설교를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상식과 지식과 윤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상식으로는 뱀의 머리를 잡아야 하지만 모세는 상식을 따르지 않고 뱀의 꼬리를 잡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여호수아는 상식적으로 여리고를 돈다고 여리고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여리고를 돌았습니다. 


목사는 성도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목사의 기도시간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는 기도와 하나님 앞에 성도를 세우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는 기도를 해야 영성을 유지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성도를 세우는 기도를 해야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하고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입니다.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는 목회자의 모범을 보인 분은 구약에서는 사무엘을 들 수 있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들 수 있겠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삼상 12:23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을 말씀하신 후에 눅 22:31, 32에 보면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는 사무엘과 예수님의 본을 받아서 성도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목사는 성도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목회자에게는 3권이 있습니다. 치리권, 강도(도를 가르침)권, 축복권입니다. 축복권은 민 6:22-27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셨습니다. 아론과 아론의 자손들 즉 제사장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주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회자가 축복하는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성도가 되십시오. 저절로 축복이 나올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목사가 축복하려는데 뭔가 찜찜하면 안 됩니다. 신앙의 기본에 충실하시고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주일 중심, 십일조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그래서 목사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다 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은 목회자를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용수 목사님께서 훌륭한 지도자가 있는 공동체는 평안하고 행복해하고 감사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미국이 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특별히 지도자들이 훌륭해서 복을 받았습니다. 미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워싱턴 대통령은 온 미국인이 고마워하는 훌륭한 대통령입니다. 그는 뛰어난 리더십으로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게 되자 국민이 다시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했지만 그는 사양했습니다. 

워싱턴이 얼마나 훌륭한 인격을 가졌는지 알 수 있는 두 가지 사건을 소개하겠습니다. 그가 총사령관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사복 차림으로 부대 주위를 돌아보다가 한 상사의 지휘 아래 군인들이 큰 나무를 옮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무가 너무 커서 군인들이 쩔쩔 매고 있는데도 상사는 호령만 하고 있었습니다. 

총사령관 워싱턴이 그 상사에게 말했습니다. “상사, 당신은 왜 나무 옮기는 일을 돕지 않소?”, “나는 졸병이 아니오. 나는 지휘관이오. 그래서 지휘를 하는 거요.” 워싱턴은 웃옷을 벗어버리고 군인들과 함께 땀을 흘리며 나무를 운반했습니다. 상사는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일을 다 마친 후 워싱턴은 양복저고리를 집으며 말했습니다. “상사, 앞으로도 큰 나무를 운반할 일이 있으면 총사령관을 부르게. 냉큼 달려오겠네” 그제 서야 상사는 그 신사가 총사령관 워싱턴인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느 쌀쌀한 가을날, 미국의 한 육군 대령이 길을 가다 개울을 만났습니다. 개울을 건너려면 구두를 벗어야 하는데 구두를 벗기가 귀찮고 또 물도 차가울 것 같아 망설이고 있는데 한 노인이 다가왔습니다. 
“여보시오, 영감. 이리 좀 와 보시오.”, 
“대령님, 왜 부르셨습니까?”, 
“이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구두를 벗기도 귀찮고 물도 차가워서 그러니 영감이 나를 업고 이 개울을 좀 건네주시오”, 
“예, 그러지요. 업히세요”, 

노인의 등에 업힌 대령이 물었습니다. 
“영감도 군 생활을 해 봤소?”
“예” 
“사병으로 제대했소?” 
“아니올시다”
“하사관이었소?” 
“아니올시다” 
“아니, 그러면 위관 장교였소?” 
“아니올시다” 
“아니, 그러면 소령이었소?” 
“아니올시다” 
“중령이었소?” 
“아니올시다” 
“아니, 그러면 나처럼 대령이었소?” 
“아니올시다” 대령이 덜덜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 노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사령관을 지냈던 대통령 워싱턴이었습니다. 
대령이 산책 나온 대통령에게 업혀서 개울을 건너게 해달라고 했으니 어찌 되었겠습니까? 워싱턴 대통령이 힘이 없고 약해서 대령이 시키는 대로 했겠습니까? 이게 인격입니다. 

워싱턴은 매일 기도하며 성경을 읽고 평생 한 번도 주일을 범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며 나라를 다스려서 미국이 복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북한에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인권이 유린당하고 경제가 피폐한 것은 잘못된 지도자 때문입니다.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야 기쁘고 행복하고 감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아합 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는 나라가 가난하고 백성들이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웃시야 같은 훌륭한 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는 나라의 부귀와 영광이 극에 달했습니다.

지도자가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기업주의 정신이 훌륭하면 그 기업이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기업주가 허랑방탕하면 그 기업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지도자인 목회자는 대통령이나 기업 총수나 어떤 기관이나 단체의 장들보다 더 중합니다. 왜입니까? 세상의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그저 이 세상에서만 어렵고 힘든데, 교회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지옥으로 끌려가고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를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교훈입니다. 홍수가 나서 부모와 랍비가 떠내려가고 있는데 한 사람밖에 구할 수 없다면 누구를 먼저 구해야 됩니까? 여러분 중의 많은 분들도 ‘목사님이 아무리 귀해도 내 부모님을 구해야지’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탈무드에는 랍비를 구해야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를 낳아주시고 사랑과 희생으로 길러주신 부모님도 귀하지만, 나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랍비가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랍비는 생명을 이끌어 가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랍비는 영혼을 인도하는 목자이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것을 떠나서, 이치를 떠나서 부모보다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집에 가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어머니께 “어머니, 오늘 목사님이 설교하기를, 어머니와 목사님이 홍수에 떠내려가면 목사님부터 건지랍니다.”라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겠지요. 하지만 그만큼 목회자가 중한 것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갈 6:6에서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순종하십시오.

목회자는 교회의 치리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회자는 주님의 대리자로 교회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행 20:28에 보면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목회자를 교회의 감독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딤전 5:17에 보면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들은 목회자를 배나 존경할 자로 알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목회의 모델을 제시해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고 목회의 방향을 지시 받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그 방향을 제시하면 백성들은 모세의 지시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받아서 전달한 모세의 지시에 불순종하고 원망하고 불평했던 사람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했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교회의 목회 방향을 저에게 지시하십니다. 저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방향을 성도들에게 제시해야 하고 성도들은 그 지시에 순종해야 합니다. 모세 시대에 장로들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에도 교회마다 장로님들이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에 대해서 장로들에게 가부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장로들은 모세의 지시를 그대로 따랐고 모세가 하려는 하나님의 일을 반대하지 않고 도왔습니다. 모세의 목회의 방향이 다수결로 결정된 일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장로님들로 목사의 동역자로 돕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목사가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한다면 모든 것을 걸고 순종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란 시간과 재산과 능력과 목숨까지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목사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지 마십시오.

약 5장에 보면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했던 것처럼 목사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특별한 기름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지만 수많은 약점을 가진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사에게 너무 지나친 기대를 하지 마십시오. 목사는 슈퍼맨이 아닙니다. 목사는 주님이 아닙니다. 

사도 중에 사도는 베드로 사도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수제자였고 사도 중에 사도였던 베드로도 여러번 실수를 했습니다. 한번은 주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사단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또 주님을 3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잖아요. 목사도 사람입니다. 목사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지 마세요.

어느 목사님이 목회를 하려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들아, 사람을 의식하지 말아라.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해도 흔들리지 말고 사명감으로 해라. 네가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 목사가 좋은 차를 타고 다닌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고, 고물차를 타고 다니면 목사님은 교회의 얼굴인데 교회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고물차를 타고 다닌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네가 까만 양복을 입고 다니면 ‘우리 목사님은 밤낮 장례식만 하는가 봐.’라고 말할 것이고, 네가 산뜻한 옷을 입고 다니면 ‘우리 목사님, 요즘 바람났나 봐’라고 말할 것이다. 네가 설교를 조금 길게 하면 ‘우리 목사님 테이프가 길구먼’ 이라고 말할 것이고 설교를 짧게 하면 ‘우리 목사님 요즘 공부하지 않나 봐’라고 말할 것이다. 또 여기저기 다니면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하라고 늘 저렇게 다니기만 하나?’라고 말할 것이고 교회를 지키고 있으면 ‘우리 목사님은 인기가 얼마나 없으면 우리 교회에만 있을까? 어쩌면 오라는 곳도 그렇게 없을까?’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니 목회자는 사람 말에 흔들리지 말고 사명감으로 해야 합니다. 

영국의 어떤 교회 성도들이 스펄젼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 담임목사님이 공석중입니다. 새로운 목사님을 모시려고 합니다. 여기 우리가 가지고 온 조건이 있습니다. 이런 목사님을 모시고 싶습니다."라고 하면서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첫째, 스펄젼 목사님 같이 훌륭하고 탁월한 목회자. 
둘째, 탁월하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성경 교사. 
셋째, 불타는 마음으로 영혼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넷째, 자비로운 심성을 가지고 성도들의 상처를 싸매 줄 수 있는 사람. 
다섯째, 솔로몬의 지혜를 가진 사람. 
여섯째, 명철하고 활기차며 적극적인 사고의 소유자. 
일곱째, 미남. 
여덟째, 다른 사람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어 조화를 잘 이루는 사람. 
아홉째, 행정 능력에 있어서 탁월한 수완이 있는 사람. 
열 번째, 창조적인 사업가적 두뇌를 가진 사람. 이런 열 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러자 스펄젼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좋은 수가 있습니다", 
"아니, 목사님 그런 놀라운 목사님이 있단 말입니까? 어디 있습니까?", 
"예, 예수님을 직접 모시지요. 사람 가운데 어디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어떤 교계 신문의 칼럼에 『좋은 목사의 자격』이란 제목의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습니다. “그는 황소의 힘, 불독의 끈기, 사자의 담대함, 부엉이의 지혜, 비둘기의 순결함, 양의 온유함, 암소의 근면함, 독수리의 비전, 낙타의 인내, 말의 밥통을 가진 자”가 좋은 목사의 자격이라는 말입니다. 만약 위에서 나열한 조건들이 좋은 목사의 자격이라면 저를 포함한 대다수의 목사님들이 강단을 내려와야 할 것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만약 하나님도 위에서 말한 조건을 원하신다면 저는 오늘 당장 목회를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하게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목회자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마세요. 


성도들은 목회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목회자에게 많은 스트레스가 있기 때문에 성도들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목사는 성도의 기도를 먹고 사는 것입니다. 

미국 교회 협의회에서 조사 보고한 내용을 보면, 우리 나라도 비슷하리라 봅니다만.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지난날의 목회자들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있으며, 목회자의 75% 이상이 한번 내지 그 이상 스트레스를 견디기 힘들어 목회 생활을 그만둘까 생각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목회자들의 받는 스트레스의 원인 가운데 90%는 교회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종교 뉴스(Reliqious News)>사가 목회자를 상대로 조사한 보고에 의하면 미국 목회자들의 좌절의 가장 큰 이유는 교인들이 쉽게 교회 생활을 중단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목사와 사소한 의견이 맞지 않는다든지, 교인끼리 사이가 나빠졌다든지 하는 일시적이고 지엽적인 일로 교회를 나오지 않는 예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빌리 그레이엄에 의하면 목회자가 주일 낮 예배 때 한 시간 정도 설교하는 것이 중노동 자가 일주일 내내 노동하는 것만큼 에너지가 소모된다고 합니다. 기독교 역사에 남는 설교가 스펄전은 설교 준비에 지쳐서 50대에 죽었다고 한다. 참으로 평신도들이 잘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목회자의 고충입니다. 그 외에도 목회자의 고충이 많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도 성도들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저는 이번에 40일 금식기도를 하면서 성도들의 기도가 얼마나 목회자에게 힘이 되는지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40일 금식 중에 외부에 나가서 목회자들에게 3번의 강의를 했고, 평신도들에게 한 번의 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금식 37-39일째에는 분당에서 부흥회까지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40일째인 어제는 책상에 앉아서 기도하면서 오늘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이건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기적이라고 믿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저에게 힘을 주신 것입니다. 앞으로도 저를 위해 기도를 더 많이 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일에만 전념하게 해야 합니다.

최낙중 목사님께서 시골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목회자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습니다. 
“목사님, 농촌 목회는 정말 힘들어요. 도시교회가 도와주지 않으면 생계를 잇기도 어려워요.” 

목사님은 아주 우울한 표정으로 하소연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은 총 15명이구요. 한 달 총 헌금은 5만 원 정도 됩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부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하십니까?” 
“토끼 150마리, 개 5마리를 키우고 있어요” 
최목사님의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교인은 15명인데, 토끼는 150마리라니…' 
그 목사님은 목회를 하는 것보다 토끼 키우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교회를 돕는데 더 힘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는데 그 시골 목사님처럼 목회보다 다른 일에 혹은 불필요한 일에 힘을 쓰지 않고 목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별거 아닌 일로 시험 들어서 신앙이 흔들리거나 교회를 떠나느니 마느니 하면서 에너지를 소모시키지 마십시오. 오직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는 목사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목회자를 보는 시각이 좋아야 합니다. 

목회자를 좋은 시각으로 보는 사람은 목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성장하고 결국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를 보는 시각이 좋지 않으면 설교도 안 들어오고 교회 생활도 부정적이 됩니다. 결국 신앙이 떨어지고 하나님과도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를 좋은 시각으로 보시고 저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공급받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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